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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내 안의 깊은 계단
강석경
창비 199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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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왕
판매자 평가 5 1명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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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소개

책소개

목차

1. 새장을 열어놓으면
2. 비둘기의 집
3. 평등한 죽음
4. 배반
5. 겨울은 왜 와야 하나
6. 늑대와 춤을
7. 대낮에 등불을 들고
8. 호우주의보
9. 알을 깨고 날아간 새
10. 그대 안의 깊은 계단
11. 나는 긴 강을 흐르는 물이니
12. 창사로 가는 길
13. 신의 선물
14. 소멸의 시간
15. 삼년 뒤의 여름

저자 소개1

강석경

 

姜石景

1951년 대구 출생.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 대학 재학중 이대학보사 주최 추계문예에 단편소설 「빨간 넥타이」가 당선되었으며, 당시 심사위원 이어령의 추천으로 단편 「근(根)」, 「오픈게임」으로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숲속의 방』으로 오늘의 작가상과 녹원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로 21세기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밤과 요람』, 『숲속의 방』, 장편소설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미불』, 장편동화 『인도로 간 또또』, 산문집 『일하는 예술가들』,
1951년 대구 출생.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 대학 재학중 이대학보사 주최 추계문예에 단편소설 「빨간 넥타이」가 당선되었으며, 당시 심사위원 이어령의 추천으로 단편 「근(根)」, 「오픈게임」으로 『문학사상』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숲속의 방』으로 오늘의 작가상과 녹원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로 21세기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밤과 요람』, 『숲속의 방』, 장편소설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미불』, 장편동화 『인도로 간 또또』, 산문집 『일하는 예술가들』, 『인도 기행』, 『능으로 가는 길』, 『저 절로 가는 사람』, 『이 고도를 사랑한다』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1999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148*210*30mm
ISBN13
9788936433345

예스24 리뷰

--- 99/11/5 조창완(chogaci@hitel.net)
순간의 예술인 연극과 수천년의 역사와 대화하는 고고학. 두가지의 차이와 닮은 점은 무엇일까. 한 가지에서 나고 때를 달리해서 지는 낙엽이라는 절창으로 인생을 노래했던 '제망매가'의 월명사처럼 소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사람을 이야기한다. 물론 사촌이라는 한 층계가 있지만 말이다.

피난와서 첩이 된 어미에게서 나온 강희와 소정. 다행히 본처에 아들이 없어 호적의 상석을 차지한 강희는 독일에 가서 연극을 배우고 돌아와 공연을 준비하는 연출가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강하게 찾으려는 사람이다. 반면에 동생 소정은 첩의 딸로 아무 곳에도 정체성을 두지 못한 채 유린받는 여인이다. 이들의 사촌이며 무거운 영혼을 갖고, 고고학도의 길을 걷는 사촌 강주. 이 셋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이들의 관계에 중심선에 닿아있는 사람은 강주의 연인이다가 강주가 교통사고로 죽자, 그녀를 사모했던 강희와 결혼하는 이진과 나중에 등장하지만 소정의 중국 창사 여행중에 우연히 동행해 삶과 사랑을 반추하게 해준 일본인 친구 히로 정도가 있다. 작가의 설명처럼 줄거리는 찾아가면서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기에 넘겨두고 보자.

강석경의 변모가 거칠면서 힘찬 것은 그녀의 행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티벳의 수도 라사에서 건진 소설에서 그토록 영혼들을 떠돌게 하더니, 이번에도 등장하는 영혼들은 떠돈다. 왜 그럴까. 소설속에는 그녀가 건져냈던 글이나 그림, 음악 들이 계속해서 하나의 텍스트로 제시된다. 주된 인물인 강주를 묘사하는 연인 이진은 강주를 '형이 따뜻한 사람인 건 틀림없지만 다가가면 어느새 물러서는 산그림자 같아. 형은 내가 옆에 있어도 혼자 있는 사람 같아'(23p)라는 대사는 강주의 성격을 쉽게 설명하는 말이다. 수천년 전의 유적과 대화하는 고고학도로 강주는 가족사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소정과 깊은 마음속의 대화를 나눈다.

소설의 가장 큰 물음은 사랑이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일 것 같다. 강희가 독일에서 겪은 외교관 부인과의 만남이나 소정이 겪은 히로와의 만남은 상대를 배려한 사랑의 깊음을 이야기한 반면에 강희가 이진에게 보여주는 집착이나 소정의 주위에서 움직이는 남편 상훈이나 여러 남자들의 행보는 사랑이 아닌 소유나 집착, 명분, 욕망의 헛됨을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강희가 가진 헛된 집착들은 깊은 성찰자 강주의 묘사인 '강주가 연극에서 감지한 것은 파괴적인 것들이었다. 봄을 기다리며 언 밭을 갈아엎는 갈묻이가 아니라 수족관을 휘저어 흙탕물에 고기를 몰아붙이는 아이의 장난 같은 파괴를.'(212P)이란 설명을 통해서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역사나 인생이나 사랑은 단순히 불쏘시게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내다볼 때, 느낄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일 것이다.

소설은 많은 복선으로 얼키어 있다. 고고학의 유물들에서, 이진에게 적합한 연기자에 대한 감상까지. 이진은 가련한 여인 '오필리어'보다 복수의 여신 '메디아'가 되고 싶어했으니. 또한 소정이 노릴었던 히로와 노닐던 중국의 구이린(桂林)은 경주의 옛이름 '계림'과도 같아 연기(緣起)의 폭들은 더욱 넓어진다. 이런 히로와의 만남 순간에 경주에 마음의 적을 두고자했던 강주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또한 작가가 생각하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속에 녹아있다. 이데올로기란 수천만년을 역사와 대화하는 고고학의 중요성과 남녀평등 문제 등 많다. 물론 그녀가 거칠게 선동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속의 소제들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한다. 남녀평등 문제만 봐도 고대사나 중국 현대인들의 삶, 서양에서의 예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며, 가부장적인 대한민국의 허구를 보여준다.

소설의 미덕 중에 하나는 작가의 발품이다. 경주를 비롯한 고고학에 관한 자료, 중국 여행에 관한 자료, 독일에 관한 자료 등등은 작가가 철저하게 의식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하나 쌓아둔 것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마음속의 욕망이나 짧은 여행으로 감정을 표시하며 부유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노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일 것 같다.

물론 많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 쓰는 문화적 기호들은 조금 거칠기도 하다. 가령 '레미제라블'이나 히로를 설명하며 이야기하는 '국화와 칼', 혹은 마오쩌둥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아직 협소한 시각이라는 것을 느낀다. 여행시간의 차이겠지만 중국은 96년부터 외국인에게 차등요금을 받지 않고, 중국인의 월급의 몇분의 몇이라는 화폐의 가치규정도 중국에서 조금만 살아보면 얼마나 우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혜석이나 전혜린의 느낌을 이어받은 듯한 최승자, 홍신자나 강석경의 발걸음들은 이제 서른을 넘긴 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다. 독자나 관찰자들로서 그녀들의 신난한 삶은 보며 음미하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더불어 내 삶을 알차게 하는 지형도의 흔적을 보여준 작가들을 위해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 99/11/11 고흥준(coju@hitel.net)
봄, 그리고 경주다. 청동기시대의 유구를 발굴중인 고고학자 '강주'. 그가 나타내는 봄은 희망이 아니다. 그에게 봄은 만남이 아니다. 봄은 이별이다. 봄은 불우한 예감이다. 봄, 그리고 청색이다. 잠에서 깨면 선연하게 드러나는 꿈의 실체. '소정'은 계단 앞에 선다.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득하다. 그러나 그녀에겐 첫발을 내딛는 자가 느끼는 잔혹한 희망이 묻어있다. 그녀 안에서 자라고 있는 깊은 계단.

강석경이 <청색시대>나 <숲속의 방>에서 보여주던 젊음의 비릿함대신 찾아낸 키워드는 '계단'이다. 계단은 상승의 도구로도 하강의 도구로도 이용된다. 이런 상징적인 의미는 강주와 강희, 그리고 소정과 이진이 엮어내는 삶의 궤적과 동일한 곡선을 그려내는데 유용하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죽음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곳곳에 나타나는 죽음의 담소들, 파헤쳐지는 수천년 전의 무덤, 강희가 들려주는 '죽음의춤'이라는 그림 이야기, 연극속의 리스의 죽음, 강주와 같이 발굴하던 민기가 잃은 첫 아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미처 꽃피우지 못한 희완의 죽음, 그리고 강주의 죽음.

거기에 반복적으로 새의 이미지가 더해진다. 새장 속에 갇힌 새, '정신치료사'라는 그림 속에 나오는 새장과 새, 비상을 포기한 비둘기 떼, 무덤 속에서 발굴된 수천년 전의 청동새 장식, 구국새의 슬픈 전설.

이진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강주에게 하는 말은 그 출발점의 구실을 한다. '난 새장을 닫아놓을 거야.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날아가는 거야. 꽁꽁 문을 닫아 걸 거야.'(24p)

고고학자이며 흙을 사랑하는 남자 강주. 그는 상처를 지닌 누이 소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가족이다. 강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연약하고 부드럽다. 혼자서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국은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정체(停滯)된 에너지다. 고여있으므로 아름다운, 그러나 어느쪽으로도 흐르지 못하는 힘의 불안한 근원.

'난 알 속에 머물고 싶어하는, 깨어나지 않은 새인가봐. 그게 내 전생인가봐. 바깥 세상을 두려워하는 연약한 새.' (강주의 말, 227p)

연출자인 강희,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만큼의 무게인 증오로 짓눌려 있다. 그에겐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으나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지만, 항상 상실만을 느낄 뿐이고 채워지지 않는 고독이 그의 운명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 그에게 '냉정함'은 존재의 이유가 된다.

'우린 서로 좋아하지만 나도 자유고 너도 자유야. 네가 누구를 데려오든 질투도 상관도 하지 않겠어. 그러니 너도 냉정해지길 바래.' (강희의 말, 125p)

강주의 약혼녀인 이진.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예술적 한계를 깨닫고 괴로워한다. 강주의 연인으로 행복하고 결혼을 꿈꾸지만 강주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독일에서 돌아온 강주의 사촌 강희에게 음악적인 조언을 해주고, 그가 연출하는 연극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런 이진에게 강희는 어떤 운명을 느끼고 강주의 죽음 후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은 없다. 이진은 강희의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을 결심하게 되고 마치 강주의 넋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창을 연다.

'누구의 가슴 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이진의 말, 198p)

강희의 여동생이며 도서관 사서인 소정은 첩의 딸이라는 제도의 굴레 속에서 상처받는다. 소정에게 세상은 벽일 뿐이다. 다정하게 손 잡아주지 않고 차갑게 문을 닫아버린 세상 속에서 소정은 가족이라는 질긴 끈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남편과의 결혼을 통해 세상으로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다.

서울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소정은 중국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서 히로라는 고대사 전공의 일본인과 만난다. 히로를 통해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던 세상과의 화해 가능성을 깨닫게 되는 그녀는 '이별을 연장하고 가슴속에 그리움을 묻어두기로'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지닌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무엇인지를 가늠케한다.

강주의 죽음 이후 소정은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민을 떠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마음 속에 그녀을 묶고 있던 제도의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품은 채. 거기에 대해서 작가는 '행복의 땅에서 쫓겨나는 이브는 비통하나, 인습의 땅에서 걸어 나가는 서른아홉 살의 여자는 지쳐 보이지만 희망을 안고 있다.' (307p)고 쓰고 있다.

오랜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고고학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투박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강석경의 솜씨는 아직 건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푸릇한 젊음의 상흔들은 그녀가 추구하는 구심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지니고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소정'의 행동 양식은 그녀의 대표작인 <숲속의 방>에서 불우한 청춘의 상징 '소양'을 연상시킨다. '늦여름의 태양 아래서 붉은 선혈을 뚝뚝 흘리던 사루비아' 때문에 휴학을 결심하던 우리들 청춘의 비극적 희생양이었던 '소양'을 그녀는 이 소설 속에서 '소정'이라는 희망적인 이미지로 성숙시켰다. 이런 작가적 계보는 여전히 그녀에게 청춘의 굴레가 어떤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게하는 정신적인 힘이며 또한 일방적인 소외이기도 하다.

강석경은 이것을 위해 많은 부분을 사유와 고찰로 지새우고 분석, 통합하고 있다. 다만 식상한 이론적 토로를 사족처럼 이어간 부분은 어색하고 미처 다듬어지 못한 풋내가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고독과 죽음, 그 무거운 짓눌림 뒤에 찾아오는 삶의 희미한 빛.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세상. 삶이라는 무거움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못 감동적이다.

헤세라는 천재 이후에 껍질을 깨고 태어나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 껍질을 미처 보지 못하는 강희, 껍질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강주, 스스로 삶의 껍질이 되어버리는 이진,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했던 삶의 한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서려는 소정은 저마다 다른 껍질과 태어남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판이하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삶의 구비구비를, 때로는 비척이며 걷기도 하고 때로는 날개를 편 채 비상하기도 한다. 독자는 그들의 불안한 행보 안에서 어쩔 수 없는 희망과, 새삼 어깨를 짓누르는 불우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다.

책 속으로

이 소설에서 스토리만 좇는 독자라면 고고학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한 문장도 필연이기를 바라며 수없이 언어를 걸르는 작가 입장에선 독자가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듯 넘어가기 보다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광맥을 찾아가듯 소설 읽기를 희망한다. 현대의 모든 것이 한없이 가벼워져가고 있지만 인식에의 욕구로 책을 읽는 독자라면 작가와 함께 다양한 삶을 추적해야 하리라.

--- 작가후기 중에서

'어떤 원시부족들은 새장을 열어놓는 것이 잠자는 동안 영혼이 신체에서 빠져나가는 걸 가리킨다고 믿었대. 아프리카 의사들은 밤에 새장을 열어놓는데, 그러면 밤에 도망쳐나갔던 영혼들이 다시 주인에게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p.25)

'그건 선험적인 것인지도 몰라. 고고학으로 가득 차 있지만 형 가슴속에도 누가 뛰어들 수 없는 연못 같은 오롯한 공간이 있잖아. 누구의 가슴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198 p.)

새벽 두시. 홀로
강으로 내려가본 일이 있는가
강가에 앉아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일이 있는가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이미 죽은 어머니, 신이여 축보하소서
연인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 여자 나지 말았었기를 바란 일이 있는가

할렘강으로의 나들이
새벽
한밤중 나 홀로
하느님. 나 죽고만 싶어
하지만 나 죽은들 누가 서운해할까

(랭스턴 휴즈의 시 - 깊은 슬픔의 프롤로그에서도 나온 시가 다른 시처럼 다가옵니다. - 290 p.)

--- p.

소정이 열두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해 초여름 묘소에 첫 참배를 했다. 비석엔 자녀들의 이름이 한자로 씌어 있었다. 유정만의 장자 유강희, 장녀 미진, 차녀 미연, 삼녀 미재, 사녀 미옥. 다시 보았지만 소정의 이름은 비석에 없었다. 강희 오빠 이름은 선두에 당당히 새겨져 있건만 왜 소정의 이름은 보이지 않은 것일까. 아들이 없는 본집의 네 딸의 이름은 적자여서 선연히 새겨져 있었다.

소정은 그때 모든 것을 알았다. 유소정은 유정만 가계에서 죽은 이름이라는 것을. 잉여 존재라는 것을. 나누기하고 남은 소수점으로서 반올림되는 군더더기라는 것을. 아이는 묘지를 걸어나오며 땅을 디딜 때마다 땅이 늪처럼 꺼지고 있는 듯 느꼈다. 초여름이었으나 등에 땀이 났고 당번 때 한번 올라가본 국민학교 옥상에서 같이 죽자고 말한 아홉살의 짝 얼굴도 뒤통수를 치며 떠올랐다. 어떻게 죽는 건데? 소정이 호기심에서 물으니 짝이 말했다. 둘이 손잡고 옥상 위로 끝없이 걸어가면 돼. 버림받은 아이는 그렇게 허공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소정은 그날 밤, 한 남자아이를 불러냈다. 소정과 동갑인 재수생이었다. 지금은 얼굴조차 희미하지만 그의 저금통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 늘 저금통을 들고 나와 누구를 줄까 하고 두리번거렸다는 아이였다. 소정은 그에게 전화해서 갈 곳이 없으니 저금통을 들고 나오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주문대로 돼지저금통을 들고 나왔고 그들은 돈을 털어 여인숙에 들어갔다.

소정은 그날 밤 동생 같은 남자아이에게 처녀를 던졌다. 패거리들과 어울려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술취한 애송이에게 더러운 입맞춤을 당하고 침을 뱉은 적이 있을 뿐이다. 남자아이는 처음이 아니었다. 미숙하여 난폭하게 서둘렀고 로션을 바르며 몇차례나 삽입했다. 소정은 인형처럼 누워 아픔만 느꼈을 뿐이다. 남자아이는 아침에도 한차례 삽입하고 담배를 피우며 다 산 어른처럼 말했다.
“처녀가 별거 아니지?”

남자아이의 턱엔 애기수염이 막 자라고 있었다. 풋내가 나서 소정은 그것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소정은 아침 햇살에 초라하게 드러난 여인숙의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며 하, 큰 소리로 웃었다.

대출실 열쇠를 맡기고 밖으로 나서자 밤의 시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정은어지럼증과 함께 공복감을 느꼈다. 뱃속이 텅 비어 있는 듯하여 몸에 힘이 빠지는데 그건 영양의 결핍이 아니라 영혼의 현기증 같았다. 매일 다가오는 밤이건만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나서면 밤의 공기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끼곤 했다. 매듭이 풀린 채 변함없이 반복되는 생활 탓일까. 대출자들과의 사무적인 짧은 대화, 활자 중독증으로 늘 침대 옆에 쌓아두는 책들, 자극 없는 생활에 기름을 치듯 일이주일 만에 서울로 오는 상훈.

소정도 처음엔 주말부부 생활이 어긋난 관계를 교정해주리라 기대했다. 떨어져 있으면 서로의 필요를 깨닫게 되고 그리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오가는 생활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두사람은 여전히 공통화제가 없었고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취미도 달랐다. 소정은 그들이 함께 있는 일요일엔 영화라도 보고 싶었지만 히사일에 지쳐서인지 상훈은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상훈이 좋아하는 것은 술친구였다. 어쩌다 소정에게 이끌려 영화를 보더라도 공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보다 피가 뜨거운 젊은 베티의 순수와 광기가 그려진 「베티 블루」를 보곤 “희극인가 비극인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지. 상대역인 조르그는 사랑하는 베티가 정신병원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것을 보고 베개로 숨을 끊는다. 상훈은 베티 같은 여자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

--- p.134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기애에 빠져있는 인간들이 죽음으로써 식물에 봉사하다니 상처가 옹이처럼 박힌 육체 기쁨보다는 모멸감을 안겨준 자신의 육체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거름이되어 꽃의 부분이 되다니 나무야 나는 너를위해 살아가리 사랑을 하기위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기보다 나의 고독을 꽁꽁싸서 뒷날 신성한 네 발치에 묻히리 다음 생에선 내 작은 뜨락을 그대 가지 위에 펼치리

--- p.145

출판사 리뷰

『내 안의 깊은 계단』은 오랜 구상과 취재를 통해 씌여진 역작으로 음악과 고고학 및 연극에 대한 저자의 뛰어난 식견, 독일과 중국에 대한 저자의 풍부한 지식 등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은 90년대의 삼십대가 어떤 정신적 방황과 사랑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첩의 아들인 강희는 연극연출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인물로 독일 유학시절부터 한 여자에만 구속되는 평범한 결혼생활 대신 자유롭게 여러 여자와 돌아가면서 동거하는 생활을 선택하는 인물로 사촌의 약혼자 이진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강희의 여동생이자 첩의 딸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몸부림치는 소정은 강희와는 반대되는 인물로 중국여행 중 한 일본인을 만나 순수한 사랑을 배우고 결국 불행한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이민을 떠난다. 고고학도인 강주는 강희와는 사촌간으로 이 시대 평균적이며 착한 인물상으로 그려지며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진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장이진은 약혼자 강주가 죽자 강희와 결혼하지만 강주가 남긴 아이를 키우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이런 인물들을 통해 저자는 이 시대 삼십대의 광기의 사랑과 이에 비판적 거리를 둔 순순한 사랑, 첩의 딸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고 진정한 구원을 찾기 위한 방황 등을 지적 세련됨으로 그리고 있다.

추천평

강석경이란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에 남다른 격조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까닭에 나는 그 격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다. 강석경은 생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의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은 정신의 낭비일 것이다. 강석경 소설의 서늘하고 격조높은 향기는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은 강석경 소설의 매력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사색의 깊이도 한 정점에 도달해 있다. 경주의 그 둥근 고분들을 배경으로 삶의 본질과 죽음을 어루만지고 있는 소설 속에 푹 빠져 있던 하루 동안, 나는 진정으로 행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설 속 인물들과 교유하며 언제까지나 거기 머물고 싶었다. 소설 바깥으로 절대 나오고 싶지 않았다.
양귀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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