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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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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심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의 완전한 정지, 호흡의 정지, 신체 기능의 정지는 삶의 종말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적절한 자격을 가진 의사가 신체의 죽음을 선고하는 문서를 작성하면, 장례 절차가 시작된다. 몸을 닦아 치장한 뒤에 관에 넣어져 묻히거나 태워진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람들에게 사망 소식이 전파되어 인지된다. 한 달 이내에 동사무소에 사망신고서를 제출해서 호적을 닫는다. 통신사에 연락해서 핸드폰을 해지하고, 은행과 보험사에 연락해서 계좌를 폐쇄한다. 그런 절차들을 통해서 사회 속에서 활동했던 정신, 인격, 신분을 말소당해야 죽음이 완성된다. 사람의 죽음은 신체의 기능 정지라는 자연의 현실과 사회적 인격의 소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련의 사건이다. 죽은 사람에겐 정지한 몸의 현실에 맞춰 정신을 조정할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그걸 해줘야 한다. 누군가 죽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16-17쪽
엄마에게 자식들의 삶은 낯선 타자의 그것이나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사물로 변했다. 엄마의 인생을 구성했던 모든 좋은 것들이 해체되고 있었다. 평생 선량하게, 잘 살아보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지만, 엄마는 통제할 수 없이 쇠락하는 몸으로 무력감과 고독을 겪어야 했다. 노인이 되면서 누구나 그러하듯이. 41쪽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았다. 아버지가 언제 죽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정도로 늙고 크게 병들었는데 장님까지 되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노후의 평안이 박살 날 거라는 말을 빼고, 한 줌의 품위와 독립성이 보장되는 노후를 보내기 위해선, 설사 그게 운전을 포기하는 일이 된다고 해도 예방적인 의료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표현. 없다. 46쪽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72쪽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82쪽 빈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교는 부두교 정도였을까. 이런저런 신앙이 한꺼번에 공존하는 풍경은 죽음과 관련된 그 절실한 믿음의 동작들이 유일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권위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따름이었다. 공존할 수 없는 믿음, 합치할 수 없도록 부서지고 조각난 의례 절차들을 한자리에 묶어두는 힘은 장례에 관련된 법률에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3일 이내에 빈소를 세우고 발인해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 그게 나라의 법이다. 다들 그걸 알고 있어서 발인 전에 와서 절하고 울고 부조금을 내고 밥을 한 끼 먹고 갔다. 107-108쪽 사랑 주던 엄마는 이제 없고, 효도 받으려는 아버지만 남았다. 148쪽 두서없는 것 같아도 아버지의 이야기엔 주제가 있다. 어려웠던 유년기와 시련의 청년기를 넘어서 군대에 들어가 엄마와 더불어 당당한 삶을 얻었다,라는 것의 반복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병들고 늙은 현재의 자신을 잊는 거다. 아버지의 과거는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상현실이 작동하려면, 아버지를 향해서 늙고 병든 홀아비라고 자꾸만 일깨우는 장성한 딸이 없어야 한다. 온갖 이야기를 다 하지만, 아버진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관련되거나 나와 공유했거나 나를 끼워 넣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나는 삭제된다. 아버지 얘기를 오래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192쪽 “사랑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막아서도 안 되는 거야.” 나는 쉰 살도 넘은 엄마가 열일곱 소녀 같다고 생각했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사를 사랑의 관점에서만 생각했던 엄마. 어찌 생각하면, 엄마의 죽음을 겪은 것은 우리뿐이니, 엄마는 전혀 죽지 않은 듯도 하다. 210-211쪽 그렇지만 필멸이 필연이라고 알아도,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거듭거듭 생각해도, 그걸론 고통은 덜해지지 않는다. 세계가 세계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해봐도, 애석한 정은 끊어지지 않는다. 전진하는 세계는 한없이 슬픈 세계다. 225-226쪽 엄마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도 비슷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엄마의 구두들은 한결같이 왼쪽 밑창이 오른편보다 조금씩 더 닳아 있었다. 무의식중에 엄마가 왼쪽 다리에 조금씩 더 힘을 싣고 걸었던 거다. 가방들은 엄마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길이로 끈이 맞춰져 있었다. 엄마의 정장들을 보면, 엄마가 어떤 날, 어떤 장소에서 입었는지 기억났다. 엄마 물건들은 타지 못하고 남은 엄마의 몸이었다. 247쪽 ---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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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어.”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 동생의 목소리가 엄마의 죽음을 알렸다. 낯선 죽음. 사회는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소비’하기를 조장한다. 상조회 및 장례식장의 고객이 되어야 죽은 사람을 무사히 보낼 수 있다. 엄마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노인이 되어 당뇨와 만성 신부전을 앓는, 집안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권위만 고집하는 퇴역 군인인 아버지가 남았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엄마는 일등신붓감으로 컸다. 60년대에 쌍꺼풀 수술을 할 정도로 당찬 성격이었다. 그런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였을까,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엄마를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소희 언니와 은희, 그리고 아버지와 돌아가신 엄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열정 가득한 사람이면서 좋을 대로 생각하는 소희 언니는 호주에 살아서 그런지 아버지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지속한다. 은희는 막내답게 속풀이 다하면서 산다. 그럼 나는? 어렸을 때는 제법 엄마의 자랑이기도 했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어른의 체면을 위해 돌아가는 사회 안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나는 언니와 동생, 둘 사이에 치여 살면서 내 것을 쟁취하기 위해 본능처럼 개인주의를 택했다. 그런 내가 엄마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처리하고 당분간 아버지를 돌보게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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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실의 기록 《상실의 시간들》은 엄마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49일이 지난 지금, 슬픔보다는 평범한 일상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엄마를 생각하는 시간보다 살아 있는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고, 같이 병원을 다니고, 아버지 혼자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삶을 정비하는 일이 급선무가 된다. 만성 신부전과 고혈압이 있는 아버지는 강도 높은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 모순 속에서, 정기적인 출퇴근 없이 연애소설을 쓰는 나는 당분간 모시게 된 아버지와 매일 전쟁을 치른다.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 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엄마는 사망진단서를 받기까지 ‘환자’인 채로 대기 중이었다. 응급실 구석에 잠옷 차림에 미간을 잔뜩 찡그린 엄마를 그대로 둔 채, 아버지는 응급실 앞 대기실에서 엄마의 죽음을 처리해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희와 내가 의사의 서명을 받고 장례식장의 이용객이 된 뒤에야 엄마는 비로소 장례 의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나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황망한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빈소며, 조문객을 위한 식사며, 술이며, 떡을 골랐다. 남 앞에서 울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의 교회 친구인 아줌마들이 몰려와 범인을 색출하듯 심문하고, 몇 번 보지도 않은 아버지 쪽 친척들은 엄마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이제 형님은 어떻게 사냐며 고래고래 울부짖었다. 엄마를 추억하거나 그리워하거나 슬퍼하기는커녕,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아버지가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43년간 아버지와 살아온 엄마는 대체, 어떻게 살아낸 것일까.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났고, 내가 세 살 때 이사 온 원주에서 삶을 마친 엄마. 10년쯤 전에, 엄마는 심부전을 판정받았다. 엄마의 심장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아빠의 퇴직과 소희 언니의 결혼과 이민, 나의 불안정한 생활, 은희의 박사 진학 등이 있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아버지는 명령과 복종이 익숙한 군 생활을 33년이나 했다. 집에서는 언제나 부재했던 아버지를 두고 엄마는 아빠를 ‘애국자’이자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훌륭한 가장’이라고 했다. 어떤 일에서건 아버지의 판단이 가족 전체를 위한 최선으로 여겨졌다. 그런 아버지가 퇴직한 직후 엄마의 생활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평생 도맡아온 살림에 대한 권한을 뺏겼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여겼던 자식들의 삶은 알 수 없는 사물로 변해버렸다. 몸은 쇠락해가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들이 일상에서 벌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엄마가 엄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스물세 살 엄마는 스물아홉의 아버지를 맞선에서 만났고, 키가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긴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여자 형제 중에 국민학교를 나온 건 엄마뿐이었고, 시골마을에서 엄마는 양장학원도 다니는 일등 신붓감이었다. 부모님을 조른 끝에, 67년에 쌍꺼풀 수술도 한 엄마. 그런데 내가 대학에 합격하면 쌍꺼풀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엄마는, 잘못되면 어떡하냐고 무서워서 안 되겠다고 날 붙잡고 병원에서 도로 나왔다. 아버지를 따라 낯선 도시에 새롭게 적응해야만 했고, 아버지에게만 의존하며 세 아이를 홀로 키운 엄마. 늘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는 사실만으로 감탄하던 엄마의 삶은, 돌이켜 볼수록 짧기만 하다.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82쪽) 엄마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애도의 방식을 정하는데도 가족들은 저마다의 개성대로 방안을 내놓는다. 한배에서 난 자매들이지만 날 때부터 집안의 스타였던 소희 언니와 언니들과의 싸움을 선택한 막내 은희의 당찬 성격, 그 사이에서 내 편은 나밖에 없다고 결심한 나. 각자 느끼는 슬픔은 저마다 몫이 다르고, 가족은 자라면서 타인이 된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쪽) 〈작가의 말〉을 통해, 최지월은 실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죽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보통 사람이 보통의 삶에서 겪는 보통의 죽음, 평범한 죽음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는 의도는 구체적 상황과 보편적 감성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설로 완성된다. 인생이란 영원할 것 같은 생의 한 가운데를 지나, 결국 찰나였음을 깨닫는 여정이 아닐까. 찰나생 찰나멸. 그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상실의 시간들》은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