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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오후의 빛 · 메리 크리스마스 · 악보 넘기는 남자 · 두 사람 · 커다란 초록색 눈 ·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 생의 한가운데 오후의 빛 중학교 교사이며 테니스를 즐기는 강희섭은 13년 만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신선영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옛 학교에 함께 가보자는 제안을 받는다. 신선영의 갑작스러운 연락으로 강희섭은 40대 중반에 접어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정말 괜찮았어? 이게 네가 만족할 만한 모습이야? 그리고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 옛 추억이 가득한 은산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강희섭은 은산으로 가는 도중 신선영으로부터 자신의 시신을 거두어 달라는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은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 안 보이거나, 횟집에 들어갔을 때 그녀 쪽 음식이 그대로 있거나 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해 질 무렵 둘은 은산에 도착한다. 그런데 학교를 둘러본 뒤에 그녀가 강희섭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혼란에 빠져 신선영을 찾던 강희섭은 그가 혼자 은산에 내려왔다는 목격자들의 말을 듣게 된다. 결국 그녀를 찾는 데 실패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출근해 모 선생으로부터 신선영이 암으로 투병 중이며 현재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메리 크리스마스 스물 아홉의 '하나'는 모자랄 것이 없는 강남 중산층 가정의 자녀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 그늘에서 눈물로 자기 존재의 위기를 모면하며 살아온 엄마의 삶을 비굴하고 비참하게 여긴다. 그래서 마돈나처럼 실권을 쥐고 화려하고 요란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성형 수술을 하거나 섹시한 옷차림으로 화려하게 외양을 치장할 뿐이다. 그녀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짧은 시간에 세상 사람들이 '꺅' 하고 우러러보는 화려한 성공을 꿈꾼다. 그리고 섹스에 관한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 대박을 터뜨리는 일에 매달린다. '하나'의 친구 성자는 지방 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제적인 성공을 꿈꾸며 서울로 유학해 대학을 졸업했지만 실직 상태로 머물러 있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성자는 대학 시절 또래들처럼 매혹적인 여대생이 되어 유리 구두의 주인공을 꿈꾸었다. 무리한 아르바이트로 명품을 구입해 외양을 치장하는 데 빠졌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둔다. 실속을 차리기로 생각을 바꾼 성자는 대학을 졸업해 여러 직장을 전전긍긍하지만 불안정한 근무 조건 때문에 오래 다니지 못해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적인 안정을 이뤄 어려운 집안 살림을 보태고자 한 소박한 꿈마저 좌절되고 안정은커녕 셋방의 월세도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성자는 자기 자신의 삶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두 친구는 스물아홉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안국동 점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악보 넘기는 남자 국문과 1학년생인 나는 수업이 없는 목요일이면 퇴역한 군인 아버지가 새벽같이 일어나 요구하는 과도한 욕실 청소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수업 핑계를 대고 동네 앞 공원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연못에서 한 아저씨와 만나게 된다. 실업자처럼 허름한 차림이었지만 연못 속 잉어를 보고 던진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 나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그의 빌라까지 따라가게 된다. 그로부터 예술의 전당 클래식 공연 티켓을 건네받은 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찾아간다. 아저씨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막연하게 상상하던 나는 공연이 시작되면서 반주자 옆 어두운 곳에서 악보 넘기는 일을 하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한다. 나의 눈에 아저씨는 노예처럼 너무나 초라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비쳐졌고 그런 아저씨의 티켓을 받고 공연장을 찾은 나는 그 자신 역시 추락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며칠 후 아저씨와 다시 조우한 나는 아저씨에게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듣게 되는데……. '난 매일 아침 일어나서 아직도 내가 음악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안도해. 거기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 두 사람 서른여섯의 그와 쉰다섯의 그녀는 지하철 종착역을 지나쳐 기관차 보관소로 향하고 있는 지하철 차량 속에서 잠들어 있다 깨어난다. 3호선의 '수서역' 너머 어느 황량한 곳에 내던져진 그들은 마주하게 된 낯선 풍경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두 사람은 지하철에서 내려 암흑 속의 돌밭을 헤쳐 나가야 하는 공동의 운명으로 얽히게 된다. 서른여섯의 남자는 다니던 아홉 군데의 직장이 모두 부도가 나 실직 상태에 빠지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40대를 맞이 해야 하는 지지리 운이 없는 자신의 생을 절망하고 있다. 쉰다섯의 여자는 집안 형편 때문에 성악가로서의 삶이 좌절되는 경험을 겪은 후 사회적 지위와 부를 쥔 남자와 윤택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험난한 지대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둘은 확연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남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난경에서 벗어난 여인은 본래의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돌아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 버린다. 커다란 초록색 눈 주인공은 대통령 직속 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는 일을 앞두고 서류를 작성하는 도중에 한동안 뇌리에서 잊어버리다시피 했던 배다른 딸의 문제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전에 일했던 지방의 도시에서 5년간 만난 여자의 아이를 20여 년간 모른 체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력서 칸에 배다른 딸의 경력을 가짜로 써넣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고시 패스 후 줄곧 법원에서만 재직해 온 그에게 오른쪽 팔이 마비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결국 이력서를 채우지 못해 그의 발탁은 고사로 처리되고 그는 겉만 번듯했지 마음자리 저 밑바닥에 죄책감을 간수하고 시달리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수긍하기에 이른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파산을 하고 직장을 잃어버린 데다 아내마저 집을 나가 버린 최광일에게 신용보증기금에서 한 사내가 찾아온다.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인간의 비정함에 몸서리를 친 최광일은 신용보증기금의 사내가 그가 만나 왔던 채권자들과 어딘가 많이 다르다고 느낀다. 집 안에서 빚 상환에 대한 사무적인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볼일을 끝내고 헤어졌다가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신용보증기금의 사내는 볼일을 보러 다른 곳을 가지 않고 모 절에서 하는 점안식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광일은 점안식과 같은 숭고한 의식을 보게 되면 혹여나 기적 같은 일이 자신에게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를 따라나선다. 그러나 절에 도착했을 때 점안식은 모두 끝나 있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최광일은 좌절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용보증기금의 사내가 암으로 위를 몽땅 들어내고 비장까지 들어낸 채 먹고살기 위해 남의 빚을 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빚 독촉에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힘든 자신의 처지보다 더한 신용보증기금의 사내를 보고 자신과 반대편에 있다고 여겼던 이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생의 한가운데 여고 동창생 관계인 나와 윤주는 25년 만에 졸업 기념 모임에서 만난다. 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고, 반면에 윤주는 대학교수의 아내로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현격한 신분 차이에 부담을 느낀 나는 윤주와의 만남을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만나게 된다. 그러는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주의 실생활을 알게 되면서, 나는 윤주의 삶과 자신의 삶이 생각했던 것만큼 상황 면에서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윤주'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여러 번 수술한 데다가, 그녀의 남편 역시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윤주를 속여 왔던 것이다. 결국 '나'는 '윤주'의 외로움을 수긍하기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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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넘기는 남자』는 작품 구성이 미려한 소설집이다. 그것은 작가가 당대 유행에 대한 풍부한 묘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물고 물리는 천태만상을 달변으로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만남과 이야기라는 설정을 기본적인 구성법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두 인물의 대비적 동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외견상으로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연민을 갖게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다만 타자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이 세계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생의 한가운데」 「두 사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에서는 파산을 겪고 빚 독촉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힘든 처지에 놓인 최광일과 암으로 위를 몽땅 들어내고 비장까지 들어낸 채 먹고살기 위해 남의 빚을 받으러 다니는 신용보증기금의 사내와의 만남이 묘한 대비적 동일성을 이루면서 결국 두 사람이 인생의 나락에서 만난 같은 운명의 동반자라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다다른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생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신이 쏜 화살 한 촉으로 인생은 극적으로 추락할 수도, 혹은 비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표제작인 「악보 넘기는 남자」는 홀로 가난한 삶을 이어 가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다른 잡념을 갖지 않는 순수하면서도 낭만적인 '악보 넘기는 남자'를 통해 생의 초라한 진실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세련되고 우아한 중산층 여성들과 젊은이들, 특히 예술 애호가들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부단히 생성되고 발전하는 새로운 풍속도를 비판적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가 자기 자신이 속한 성(性)과 연령과 계급 및 신분에 심정적 거리를 확보하면서 당대의 풍속도를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은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 「메리 크리스마스」에서도 잘 나타난다. 작가는 「신용보증기금에서 온 사내」에서 발자크의 시대나 채만식의 시대나 오늘날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빚 때문에 한쪽 신장을 떼어 내고 한쪽 다리를 떼어 내고 아들딸을 팔아넘기는 오늘날의 세태를 가감 없이 묘사한다. 「메리 크리스마스」에서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포스트모던 걸 '하나'와 직장 일을 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성자'라는 두 세계를 무리 없이 보여 주고 있다. 「오후의 빛」 「커다란 초록색 눈」 「생의 한가운데」는 중년에 이른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를 환영과 변신이라는 신체적인 변화와 관련지어 밀도 있게 다루었다. 「오후의 빛」의 주인공 강희섭은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 승진에 매달리는 법 없이 오로지 테니스나 즐기며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옛날 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신선영'이라는 여인의 전화를 받고 그녀와 함께 옛 추억을 찾아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작품에서 환상적인 경험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는 의식의 영역으로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이나 고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비실체적인 존재와 여행을 떠나 대화를 나누고 신체적인 접촉을 하는 환상은 결국 '강희섭'의 젊음에 대한 향수가 중년의 위기의식과 더불어 한층 고조된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