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는 단순히 정지된 시간과 고요한 세계를 캔버스에 펼쳐놓은 그림을 의미할까요? 늘 그런 건 아닙니다. 정물화 속 사물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담은 음식이나 물건도 있습니다. 그 쓰임새와 아름다움 덕분에 세계 곳곳에서 널리 사랑받으며 자연스레 인간의 역사를 품게 된 사물도 존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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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나 시계, 성서와 같은 사물은 자본주의의 주도 세력인 부르주아의 성장과 그에 얽힌 사건을 상징합니다. 청어나 튤립처럼 자본주의의 흥망성쇠를 나타내는 물건도 있지요. 후추나 오렌지, 지구본에는 유럽이 새로운 뱃길을 열고 해상무역을 장악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설탕과 초콜릿, 커피에서는 유럽과 서양이 다른 대륙을 착취한 잔인한 역사를 읽어낼 수 있고,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을 통해 20세기 이후 발달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찾아볼 수 있지요. 탁자 위에 펼쳐진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역사와 개념, 작동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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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부질없는 것을 뜻하는 바니타스화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Adrian van Utrecht, 1599~1652가 그린 「꽃과 해골이 있는 정물화」는 바니타스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위트레흐트는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데 스테인비크의 제자이기도 했다. 바니타스화에 놓인 사물들은 제각기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죽음, 허무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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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라이프』가 ‘지난 천 년간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100가지 발명품’을 선정했다. 영광의 1위를 차지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창안한 활판인쇄술1이다. 구텐베르크 역시 1999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밀레니엄 인물’로 뽑혔다.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전에는 인쇄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 않다. 인쇄술은 일정하게 배열된 활자나 그림이 새겨진 판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 등의 재료를 대고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기술이다. 활자를 목판에 조각해 찍어내는 목판인쇄의 경우, 이미 기원전 3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4세기경에는 유럽에도 널리 소개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목판인쇄술은 널리 활용되지 않았다. 주로 제목을 찍거나 그림 장식을 제작할 때만 쓰였다. 나무판에 글자를 오목하게 파거나 볼록하게 깎는 과정 자체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 pp.34-35

21세기 현대인이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듯, 600년 전의 네덜란드인들도 음식 정물화를 식당 벽에 걸어놓고 감상했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음식과 식기는 주로 고급스러움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네덜란드의 신흥 중산층, 부르주아들은 부와 풍요를 과시하기 위해 화가에게 희귀하고 값비싼 음식 그림을 주문했다. 부르주아만 그랬을까? 서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 접하지 못하던 고급 음식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SNS 사진을 통해 고급 호텔의 디저트나 뷔페를 눈으로 감상하듯,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도 값비싼 음식이 담긴 그림을 보며 대리 만족 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 p.51

오렌지와 레몬이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당시 유럽의 정물화에는 유독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가 뭘까? 구불구불 이어지는 레몬 껍질이 시간의 흐름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일부만 벗겨진 것은 유한한 삶의 시간이 그만큼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반쯤 깎인 과일은 화가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레몬의 오톨도톨한 표면과 그 안의 싱싱한 과육은 질감의 차이가 명확하다. 그런 차이를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려낼수록, 화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 p.72

오렌지와 레몬이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당시 유럽의 정물화에는 유독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가 뭘까? 구불구불 이어지는 레몬 껍질이 시간의 흐름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일부만 벗겨진 것은 유한한 삶의 시간이 그만큼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반쯤 깎인 과일은 화가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레몬의 오톨도톨한 표면과 그 안의 싱싱한 과육은 질감의 차이가 명확하다. 그런 차이를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려낼수록, 화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