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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판 서문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감사의 글 약어 및 암호 제1부│불임(不姙)의 세월 제1장│한국분단사연구의 시각과 방법 제2장│한반도 분할의 결정 과정: 미국의 역할을 중심으로 제3장│신탁 통치의 결정 과정: 미국의 구상과 변질을 중심으로 제4장│군정의 초기 정책 제5장│군정의 통치 구조 제6장│일본 식민지 유산의 처리 제7장│미군정과 한국인의 갈등 제8장│해방 정국에서의 과도 입법 기구 제2부│비극의 잉태 제9장│한국 공산주의자의 발생 제10장│신탁 통치 파동 제11장│미소공동위원회의 시말 제12장│해방 정국에서의 우익의 갈등: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제13장│해방 정국에서의 좌익의 갈등: 박헌영(朴憲永)과 김일성(金日成)을 중심으로 제14장│해방 정국에서의 중도파의 좌절: 여운형(呂運亨)의 활동을 중심으로 제15장│좌우 합작의 시말 제16장│남북 협상 제3부│카인의 후예들 제17장│세 번의 비극: 대구 사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麗順) 사건 제18장│미군 철수와 한국 문제의 UN 이관: 1947~1949 제19장│한국전쟁과 미국 유도설: D. 애치슨의 연설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제20장│한국전쟁의 기원: 김일성(金日成)의 개전 의지를 중심으로 제21장│한국전쟁에서 비정규군의 투쟁 제22장│한국전쟁의 휴전 제23장│서해 5도의 정치지리학: 1945-1953 제24장│결론: 통일로 가는 길 |
申福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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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분단의 원인에 관한 종래의 논쟁이 안고 있는 약점은 한국 지식인들의 책임 논리가 사실에 빗나간 채, 내가 아닌 남(미국과 소련)을 원망하는 데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스스로 안고 있었던 분단의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접근 방법이다. 1945년 전후의 역사에 관한 국내외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분단의 원인은 역시 상황 논리보다는 책임의 논리에서 검토되어야 하며, 책임의 문제를 따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먼저 나 자신의 흠을 안 연후에 남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제1장 한국분단사연구의 시각과 방법」중에서 졸속을 거쳐 분단이 확정된 다음 미국은 소련이 이를 선선히 응낙한 데 대해서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남쪽으로 내려간 데 대해서 놀랐다. 사실상 소련군의 남한 진주계획도에 따르면, 그들은 지난날의 나남 19사단과 용산 20사단의 작전 관할 영역인 38° 45′ 이남의 진주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 뒤 링컨은 40°선을 제시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제2장 한반도 분할의 결정 과정」중에서 이때와 곧 이어진 국가 설립 과정에서 한국의 농지 개혁이 성공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아직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를 선명하게 하려면 토지 개혁과 농지 개혁의 정확한 개념 규정이 선행되어야 하며, 미군정의 토지 개혁과 한국전쟁 기간에 실시된 남한의 농지 개혁의 시대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은 토지 개혁이었고, 남한은 농지 개혁이었다. 공산 사회에서의 토지 개혁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남한의 경우는 좀 다르다. 남한에서 농지 개혁이 실시될 무렵 소작농들은 농지 대금 납부의 어려움 때문에 “농사짓지 못하는 농지 개혁”보다 “농사지을 수 있는 소작의 길”을 선택했다. ---「제6장 일본 식민지 유산의 처리」중에서 군정은 그들의 소망대로 좌익을 박멸하지 못했고 오히려 적의(敵意)만을 강화하여 줌으로써 우익과의 타협을 차단했고, 결과적으로 뒷날의 비극을 잉태했다. 미군정이 신생 국가에서의 이념적 다원성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울 수 있었더라면 해방 정국을 민족적 파열과 분단의 고착화로 몰고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들은 좌익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고, 좌익은 그들 나름 이를 감내할 수 없었다. ---「제7장 미군정과 한국인의 갈등」중에서 이러한 모순을 거친 뒤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는 토지의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라는, 한국의 농민으로서는 불가사의한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이념의 이해(理解)나 고뇌와 관계없이 농민들이 공산주의로 경도하도록 유도했다. 북한에서 발표된 새로운 정책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토지와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여 대중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는 것으로서 1946년 2월이 되면 그것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소문이 남한에 퍼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막 고향에 돌아와 실업 상태에 있는 대다수의 가난한 한국 농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남한에서는 일본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무능력이 목소리 큰 공산주의자의 비난의 표적이 될 뿐 아니라 커다란 약점이 되고 있었다. ---「제9장 한국 공산주의자의 발생」중에서 그렇다면 좌익이 찬탁으로 선회한 위와 같은 논리 가운데 어느 주장이 적실할까? 여러 가지의 논리를 검토해 보면 결국 모스크바 지령설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그 실례로, 조선공산당 경기도당 청년부 책임자였던 박일원(朴馹遠)의 증언에 따르면, 모스크바 결정이 발표된 직후에 당 정치국원인 강진(姜進)이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였던 샤브신(A. I. Shabshin)과 장시간 회담했다고 한다. 박일원의 말에 따르면, 박헌영은 1월 2일에 비밀리에 급히 평양에 다녀왔다. 그의 말대로라면 박헌영이 돌아온 즉시 나동욱(羅東旭)의 집에서 중앙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린 셈이다. 박헌영은 그 문제를 당에 대한 충성의 문제로 만들어 내심의 반대에도 모스크바 결정의 절대 지지를 강압적으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제10장 신탁 통치 파동」중에서 김구는 노회(老獪)한 공산주의자 김원봉에게 농락당했고 권력에 탐닉하는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우남에게는 욕심 없는 충심(衷心)이 필요했고 백범에게는 경륜이 필요했다. 이 두 사람의 헤어짐은 두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해방 정국의 불행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의 합일점은 탁치 반대나 반공과 같이 누구를 반대하려는 일시적 제휴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紐帶]는 이동하는 적이 사라짐과 함께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를 위한 제휴란 이토록 허망한 것이었다. ---「제12장 해방 정국에서의 우익의 갈등」중에서 박헌영은 1956년 7월에 끝내 처형되었다. 박헌영의 몰락과 김일성의 부상은 한국 현대사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방법은 달랐지만 둘이 모두 남한의 공산화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그 어느 쪽이었든 전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다름이 있다면 박헌영의 경우, 김일성과 같은 무력 적화를 도모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가정은 가능하지만, 그는 어쩌면 더 경직된 맑스-레닌주의 국가를 창설했을 것이며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이름의 내란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전면 무력 남침이냐 아니면 인민 봉기냐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다. ---「제13장 해방 정국에서의 좌익의 갈등」중에서 남북 협상에 관한 종래의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민족주의 운동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일행의 북행은 지혜롭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제주 4·3사건이 비극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5·10 총선거가 1주일도 안 되게 임박해 있는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불리한 정치적 입지의 돌파구를 찾고자 북행했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역사의 현장을 이탈한 것이며, 통일 의지도 없는 북한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제16장 남북 협상」중에서 제주 4·3 사태를 이념이 남긴 상처로 풀이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고도(孤島)이므로 해방 뒤부터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온상지였으며 자유스럽게 공산주의 사상 교육과 공산주의의 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하여 4·3 공산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그 당시 제주도민에 대하여 죄악을 저지른 미군정 시대 집권자들의 과오를 은폐하려는 수단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용학자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제주도민의 의식 수준으로 보아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폭도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민중의 항쟁에 이념이 그토록 심각하게 착색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따라서 제주 사태는 좌우익의 대결 구도도 아니며, 이념이 낳은 비극도 아니다. 그것은 이념적 소신이나 확신도 없이 단지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우익 테러리즘이 민중을 핍박한 잔혹사이며, 인간이 얼마나 짐승처럼 살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일 뿐이다. ---「제17장 세 번의 비극」중에서 음모설의 핵심은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해 공성계(空城計)를 썼으며, 그러한 유혹의 손짓으로 나타난 것이 곧 애치슨의 연설이었는데 이것이 함정인지를 몰랐던 김일성이 이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NPC 연설과 관련하여 그 개전 이유를 가장 비감하게 피력한 사람은 임영신(任永信, Louise Yim)이었다. 당시 민의원으로서 UN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임영신은 한국전쟁이 미국의 음모로 일어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NPC 연설은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할 경우, 과연 그들이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얼마나 대담하게 공격할 것인가를 떠보려고 계획된 시험이라는 것이다. ---「제19장 한국전쟁과 미국 유도설」중에서 한국전쟁의 성격은 내전이었으며, “기나긴 갈등의 한 단계”(only a phase in a much long conflict)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글이 내전설에 근거했다고 해서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이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 당시 섬터요새(Fort Sumter)에서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라는 물음은 남북전쟁사에서 중요한 이슈가 아니며, 월남전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고 묻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제20장 한국전쟁의 기원」중에서 휴전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설정된 북방한계선의 애초 목적은 남한의 반북주의자들이 북한 쪽으로 진군하면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의미로 클라크 UN사령관이 일방적으로 획선한 것이다. 당시의 의도로 본다면 이것은 영해선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고,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전선”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나 남북의 분단 체제가 대결 구도로 경직되면서 남한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영해의 개념으로 확대·해석되었다. ---「제23장 서해 5도의 정치지리학」중에서 설령 북한이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러시아·중국·한국·미국 중의 어느 나라가 먼저 진주할는지를 예측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이 급작스럽게 붕괴할 때를 대비하여 남한 측이 마련한 “충무 9000”의 따르면 북한이 붕괴할 경우에 남한의 통일부장관이 북한의 총독이 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코믹하다. 북한이 붕괴할 경우에 중국의 남진 가능성이 남한의 북진 가능성에 견주어 훨씬 높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하면 북한이 다시 분단된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 ---「제24장 결론」중에서 |
한국 분단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열다
사회과학의 역사주의’와 ‘역사학의 사회과학화’ 이 책은 ‘사실과 이론의 조화’라는 학문의 본령(本領)을 집요하게 모색하면서 거대 역사(grand history)를 복원해 내고 있다. 미국연방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1차 사료의 섭렵을 통해 총 15년의 연구 끝에 연구 성과를 담아낸 이 책은 저간의 한국전쟁 연구를 아우르면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회과학의 역사주의’와 ‘역사학의 사회과학화’를 요구한다. 사회과학이 역사학을 도입할 경우에는 사료의 수집·처리에 유익하며, 역사학이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할 경우에는 이념, 체제, 그리고 국제적인 역학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학문적 태도는 종종 현대사의 주역들에 대한 냉혹한 재평가와 탈신화화(脫神話化)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된 허상들을 가차 없이 깨부수는 일에서부터 한국의 사학계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다. 한국의 사학사는 민족주의사관이라는 이름 아래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잘못 이해된 실증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료 해석에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빗나간 민중주의는 편협한 시각으로 역사를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저자 신복룡 교수의 지적이다. 1943~1953년, 그 10년의 역사가 주는 교훈 속에서 해답을 찾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연구 범위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된 1943년의 카이로 회담으로부터 한국전쟁의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분단이 봉인(封印)된 1953년까지의 10년의 역사이다. 왜 10년사인가? 저자는 이 기간이 한국 분단의 고착화 과정이었으며, 이때 남긴 유산이 한국 현대사를 너무도 굴곡되게 만들었다고 본다. 따라서 향후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의 길은 그 10년의 역사가 주는 교훈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분단의 내쟁(內爭)적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내쟁적 요소에 대한 종래의 시각은 좌우익의 대립에 주목했지만, 이 책은 좌익 내부의 갈등과 우익 내부의 갈등이 좌우익의 갈등보다 오히려 더 심각한 역기능을 했다고 본다. 따라서 우익에서의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 좌익 내부에서의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 중도파 내에서의 여운형과 김규식의 갈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른 저작과 다르다. 아울러 이 책은 갈등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이데올로기적 차이보다는 해방 정국의 주역들의 인간적 애증과 악연, 그리고 소승적(小乘的) 욕망에 역점을 두어 해방 정국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한편, 저자는 분단 이후 전개된 통일 운동의 단순 논리를 비판한다. 만일 한국 분단이 강대국에 의한 냉전의 산물이라면 구소련·동유럽의 몰락과 함께 통일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1943년에서 1953년까지의 시기에서 연구의 실마리를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통일이 쉽게 안 되는 이유, 남북갈등의 요인과 남남갈등의 기원의 역사성에 주목한다. 당시 비극적 내전 상태로 치닫게 된 데에는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얽혀 있다. 임시 정부, 신탁 통치, 미소 공위, 좌우 합작, 과도 입법 기구, 좌우익의 갈등, 중도파의 몰락, 남북 협상 등 격동의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일어난 신탁통치 결정, 46년 10월 대구 사건, 48년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으로 이어지는 비극은 결코 단순한 연대기적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분단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연구자들에게 이론적인 각성을 촉구하면서 사실(史實)로 무장할 것을 권고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연구사는 이념의 선전 도구였으며 ‘개전 책임’을 묻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것이다. 이제 단순한 개전 책임 논쟁에서 벗어나 전쟁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남북이 평화와 통일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되었다. 통일 논의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어쩌면 ‘어서 빨리 통일하자’는 성급함이 오히려 통일을 지연시키는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 역사주의로의 회귀 이 책이 한국 현대사를 보는 기본적 시각과 방법은 재수정주의와 역사주의에 속한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역사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역사주의라 함은, “현존하는 것은 모두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인간과 사회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사물의 진상·의미·가치를 알려면 그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가능하다”는 고전적 의미로 쓰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오랜 역사성을 갖는다는 것, 분단은 1945년 8월 11일 새벽에 미국의 몇몇 장교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그러한 가능성이 잉태되어 있다가 그 시점에 구체적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뿐이라는 인식이 역사주의적 시각의 출발점이다. 한국 현대사의 문제를 역사주의적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논리는 역사주의를 통해서만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아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역사가 중요한 교훈과 해답을 마련해 주는 도구임을 강조하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에만 남아 있는 냉전의 현재성(現在性)과 엄존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주의의 함정을 피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