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해설 | 강경석 작가의 말 |
李柱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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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내 책상에서 보이는 작은 산에는 몇년 전 태풍을 맞고 꺾여버린 큰 가지를 아슬아슬하게 매달고 있는 아까시나무가 있다. 가지는 완전히 끊어져 바닥에 떨어지지도 않고 새잎을 내지도 않고 그렇게 매달려만 있다. 바람이 유난스러운 날이면 창가를 오래 서성이는 버릇이 생겼다. 이응아. 오늘은 해지는 방향으로 연희동 골목을 걷다가 벽돌담을 악착같이 기어오른 능소화 덩굴을 보았어. 기역아. 지금도 보길도엔 동백이 다글다글 피었다가 목숨처럼 툭 지고 있을까? 치읓님. 손 내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읒씨.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좋아요. 아직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다. 쓸 날이 없지 않고, 쓸 힘은 내가 마련할 몫이다. 같이 불러주면 좋겠다. 다정하게. 이름을. 안부를. 2020년 여름 이주혜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진술하는 일은 리치가 말한 ‘짧고 강렬한 움직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면) 타인이 불쑥 내비친 날것의 감정을 마주쳤을 때만큼 당혹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만 왜 울었냐고 한번쯤은 물어볼걸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다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요. (71면)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 (77면) 아직 자두도 한알 못 땄는데. (…) 침이 고인다. 새콤하고 달큼한 자두. 한알만 먹어도 배가 부른 큼직한 자두. 겉도 붉고 속도 붉은 피자두. 한입 베어 물면 입가로 주르륵 붉은 물이 흐르는 기순네 자두. 숙이는 기순네 딸이지. 내가 숙이를 훔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지. (82면) 우리 세진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수줍게 고백했었지. 그애다. 그애. 우리 세진이 뒤를 따라 겨우 수박 한통 들고 온 아이. 반짝이는 내 태양을 가로챈 아이. 내게서 세진이를 빼앗아간 아이. 저 도둑년. (84면) 어느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절대로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웃고 나니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106면) 추천사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무작정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거는 그것이 일정한 기만이었음이 폭로된 뒤에도 완전히 부정되진 않는다.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확신”이 산산이 깨져나간 뒤에도 “사랑”의 가치는 거의 훼손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기만과 “확신”의 오류조차 명백한 진실의 일부라는 각성이야말로 판에 박힌 가부장제 비판에서 작품을 구원하는, 『자두』의 소설적 성취를 대변한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