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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곡
2. 자크 라캉 3. 조르주 캉길렘과 장 카바예스 4. 장 폴 사르트르 5. 장 이폴리트 6. 루이 알튀세르 7.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8. 질 들뢰즈 9. 미셸 푸코 10. 자크 데리다 11. 장 보레유 12. 필립 라쿠-라바르트 13. 질 샤틀레 14. 프랑수아즈 프루스트 글의 출처 옮긴이의 말 |
Alain Badiou
‘철학’이란 무엇이며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지난 20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철학을 사유 불가능성이나 설명 불가능성 등으로 그 자리를 옮겨놓았다. 그것은 곧 총체성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내지는 거부였다. 따라서 헤겔이나 마르크스는 철학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금 헤겔이 새롭게 철학계에서 논의 대상의 한가운데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레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대한 반성 내지는 ‘철학하기’의 진정한 물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알랭 바디우 역시 포스트모더니즘류의 철학은 철학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며,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다시 한 번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기의 범죄라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파국과 나치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철학의 불가능성과 무기력을 확인하는 것뿐이라면, 결국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책임 회피나 자포지가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에 대한 저자의 확신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대한 열한 번째 테제와 더불어 덧붙였던 확신을 공유하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와 “철학은 폐기되지 않을 것이다” 사이에 놓인 확신, 철학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스스로를 변모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환영(幻影)에 맞서 진리를 붙들어라! 그것이 바로 ‘철학’하기의 진정성 작고한 동시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형식으로 꾸려진 이 책은 바디우가 털어놓은 철학하기의 윤리하고 할 수 있다. 여기 담긴 열네 명의 철학자들은 바디우 자신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를 철학의 길로 인도한 스승들과 선배들이고, 지적인 대결을 벌였던 동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들뢰즈나 데리다처럼 개인적인 불화(不和) 관계와 더불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상속과 거부, 계승과 단절이라는 방식을 통해 바디우가 자신만의 지적 자산을 형성하도록 이끈 20세기의 장본인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바디우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의 성격과 함께 유산의 목록들을 정리하고 용도를 표기함으로써 새롭게 전유하고자 하는 철학자 바디우의 애정 어린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우리가 철학자에게 기울여야 하는 관심은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추문이 아니라 그의 삶이 철학과 함께 추구하고자 했던 ‘사유의 윤리’라고 말한다. 바디우의 판테온(pantheon)이 자신의 위대한 스승들뿐만 아니라 철학의 적대자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대문자 진리(Verite)를 향한, 하나의 진정한 이념을 향한 추구를 삶 속에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기존의 전통에 순응하는 계보나 학파에 안주하지 않고 혼돈스러운 현실과의 대면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디우에게 사유의 윤리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재의 지형을 파악하고 각각의 진리를 향해 분투하는 삶에 대한 긍정을 최대한의 가능성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철학하기의 엄격함을 실천하기의 엄격함과 결합함으로써 최후의 긍정에 대한 승인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의 비난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해체와 설립을 반복했던 라캉, 학문적 필연성과 앙가주망의 필연성들을 동시에 붙들려 했던 캉길렘과 카바예스, 철학적 반목에도 불구하고 구트 도르 거리를 함께 행진했던 사르트르와 푸코, 르노-빌랑쿠르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철학의 새벽을 열었던 리오타르 등, 이들 열네 명의 철학자들은 각자의 판단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진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은 저 고대의 철학자가 보여준 것처럼 이념을 따르는 진정한 철학자의 삶이었으며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을 위한 사유의 윤리를 따르는 삶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바디우에게 다채로운 형식들 너머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원칙, 사유의 윤리를 기억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의 점차 희미해져가는 철학하기에 대한 확신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래할 미래를 위한 현재의 준비로서의 ‘철학하기’ 바디우는 자신의 판테온에 받아들인 철학자들이 변혁과 투쟁의 시기였던 1960년대의 서명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들과 동일한 그런 서명을 누릴 자격을 갖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누구도 우리 시대의 서명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한 시대는 그 시대의 “보물을 계승하고 문제시하고 숙고하고 기억하는 정신”(한나 아렌트)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사명을 수행한 자들에게 우리는 서명자라는 명칭을 수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밝힌 것처럼, 21세기의 우리 시대는 아직까지 혼돈과 미결정의 상태이고 과거와의 화해를 끝마치지 못했다. 게다가 서명자의 명칭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현재와 분투하는 우리가 아닌 미래 세대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직까지 끝내지 못한 유산 상속 작업과 더불어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를 명확하게 식별해내고 생산적인 긴장 속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직 도래할 미래의 현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