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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왜 조선 풍수학인이 일본 풍수를 논하는가
하나, 『작정기』와의 만남 1.일본 정원과 일본 풍수는 둘이 아닌 하나 둘, 자기 길을 가는 일본의 도읍지 풍수 1.일본과 조선의 주산 2.일본의 풍수 수용 역사 3.일본의 초기 도읍지 후지와라쿄 4.두 번째 도읍지 헤이조큐 5.천년 고도 교토 6.일본 도읍지 풍수의 완성, 도쿄 셋, 일본 정원과 풍수 1.한반도에서 흘러간 일본 정원 2.자기 길을 가는 일본 정원 넷, 천황릉과 풍수 1.일본의 음택 풍수 2.일본의 천황릉 참고문헌 |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도시의 방위와 사람 체질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설정한 뒤 “인간이 거주하는 곳의 기후와 지역이 실제로 인간의 물리적, 도덕적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후배인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도시의 터를 잡는 입법자들뿐만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는 건축가들도 어떤 지역은 상대적으로 인간에게 좋거나 나쁜 성격을 형성하게 해주고, 어떤 지역은 수질이, 또 어떤 지역은 그 땅에서 자라는 생물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영향을 줄 수도, 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는 그 지역의 토양과 대기의 특성, 지역 특성, 그리고 물의 공급 등과 관련된 의술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그의 저서 《건축십서(建築十書)》에서 강조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관념은 서구의 의학뿐만 아니라 도시설계와 건축의 토대가 되었다. 동아시아의 풍수(風水)와 비슷한 관념이다. 중국에서 발원하여 인근의 여러 나라로 흘러간 풍수지리는 그 지역의 풍토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묘지풍수가 그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데다가 ‘풍수학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잡설을 배설하는 ‘풍수술사’들의 숫자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풍수철학은 없고 잡설만이 난무하다보니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풍수하면 눈살을 찌푸릴 정도이다. 필자 역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공이 풍수학이라고 소개하기가 두렵다. “풍수학자와 풍수잡술가와 오십보백보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풍수학의 실정이다. 처음부터 그랬던가? 고려와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로서의 풍수 한반도의 경우 삼국시대에 이미 풍수가 수용되었지만 국가 차원이 아닌 개인 혹은 특정 집단에 의해서였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는 국가적 차원에서 풍수를 수용한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후세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이 가운데 제2조는 ‘모든 사원들은 신라 말의 명풍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헤아려 세운 것이므로 그가 정해 놓은 땅 이외에 함부로 절을 세우지 못하게 할 것’, 제5조는 ‘서경(평양)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에 이곳을 중시할 것’, 제8조는 ‘금강 이남 땅은 배역(背逆)의 땅이므로 이곳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을 담고 있다.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일종의 유훈통치였다. 그로부터 250여 년 후인 1198년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란 관청을 설치하여 산천의 길흉을 묻지 않고 사찰을 함부로 지어 지맥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되, 필요한 경우 비보(裨補)풍수를 행하도록 하였다. 풍수를 통한 국토관리였다. 당연히 풍수전문가가 일관(日官)이라는 관리로 활동하였으며, 풍수관리가 되기 위해서 필독해야 할 풍수 서적들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수용한 풍수는 국역(國域)풍수로서 국가의 권력과 부를 적절하게 분배하기 위한 철학이자, 현대의 토목, 건축, 조경의 모든 기술과 지혜가 포괄된 실학이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도 국가적 차원에서 풍수를 수용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멸망의 필연성과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할 때 풍수승(風水僧)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셨다. 무학대사는 훗날 정조에 의해 신안(神眼)으로 칭송받는다. 일반적으로 풍수사는 그 실력에 따라 4단계로 나뉜다. 범안(凡眼)→법안(法眼)→도안(道眼)→신안(神眼)이 바로 그 4단계인데 정조는 무학대사를 신안(神眼)으로 평하여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기린 것이다. 풍수승 무학대사만이 조선 건국에 기여한 것이 아니다. 무학대사가 ‘풍수철학자’로서 건국에 기여하였다면 풍수실무가, 즉 ‘풍수테크노라트’의 역할도 지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관 이양달이다. 그는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서운관 판사직을 받는데, 종1품 벼슬에 해당된다. 지금의 1급 공무원보다 훨씬 높은 벼슬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높은 벼슬을 지관이 받았는지, 당시 세종 임금의 발언을 직접 들어보자. “지리(地理: 地官) 이양달은 개국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공적이 있으며, 나이도 이미 80이 되었으므로 내가 그에게 판사의 벼슬을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왕명이 지당하옵니다.” 이렇게 풍수지리가 고려와 조선의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조선 말엽으로 들어오면서 나라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면서 풍수지리도 쇠퇴의 길로 빠져 묘지풍수만 남게 된다. 이 책 본론에서 언급할 일본의 풍수 수용과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풍수란 무엇인가? 풍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다. “바람(風)과 물(水)이다.”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산수(山水), 즉 자연을 말한다.” “만물을 포용하고 있는 하늘과 땅, 즉 감여(堪輿)를 말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하는 이론이다.” “터 잡기의 예술(art)이다.” “땅의 이치에 관한 지극히 정교한 이론이다.” 인간이 대지 위에 태어나 집을 짓고 거주하는 모든 포괄적 행위가 바로 풍수다. 개인 주택뿐만 아니라 마을, 중소대도시, 도읍지 터를 정하고 그 공간 배치를 할 때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집터인 무덤도 마찬가지다. 옛 사람들은 이때 풍수지리의 지혜를 활용하였다. 이와 같은 터 잡기의 지혜로서 풍수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히포크라테스, 플라톤, 비트루비우스의 관념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들과 풍수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문학적·사회과학적 가치판단을 전제하는 것이 풍수지리다. 그 정언적 명령을 조선조 500년 동안 지관 선발 필수과목이었던 《장서(금낭경)》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풍수 행위를 통해서) 군자는 신이 하는 일을 빼앗아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是以君子奪神工改天命). 후대의 중국학자 진희이(陳希夷)는 이 문장을 “성인(聖人)은 풍수라는 중추기관을 쥐고서 …… 이를 세상에 실행함으로써 천명을 바꿀 수 있고, 신이 하는 일도 빼앗을 수 있다.”라고 주석하였다. 위 문장에서 언급되는 군자나 성인은 치자(治者)를 뜻한다. 《주역》에서의 군자가 치자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집단의 지도자 혹은 통치자는 풍수 행위를 통해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후천개벽, 혁명, 극락토, 천년왕국 등 여러 종교들이 갈망하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풍수는 전국토를 명당화하자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한반도에 고려와 조선이란 왕조가 들어섰던 초기에 그 건국세력들은 풍수를 통해 그러한 이념을 구현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본래적인 풍수개념이다(아주 작게는 묘지풍수를 통해 한 집안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도 포함된다). 풍수가 갖는 혁명성을 일찍이 간파한 분이 시인 김지하 선생이다. 김지하 선생은 1980년대부터 그 분의 저서 곳곳에서 풍수지리 패러다임의 현대적 재구성과 활용을 강조하였다. “수천 년 내려온 풍수사상을 깊이 알아 몸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들 서양인들의 생명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흉내내어 산천의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결국은 인간도 함께 동타지옥(同墮地獄)하자는 것이 큰 잘못이다.” “동북아 생명공동체, 자연 생태계와의 화해를 근본적으로 실현시키지 위해 새로운 과학적 풍수체계를 탐색해야 한다. 이것은 동북아에 에코 시티, 에코 타운의 건설 등 대안적 생명공동체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다.” 김지하 선생께서 필자에게 요구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풍수는 분명 동북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담론이 될 수 있는 여러 원형들을 갖고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 철학이 지금까지 서구철학의 다양한 토대가 되듯, 풍수 역시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아쉬운 것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이에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일부 특수대학원에 풍수전공이 있으나 대부분 짜증스러운 묘지 풍수잡술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묘지풍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풍수잡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왜 조선 풍수학인이 일본 풍수를 논하는가? 필자가 처음으로 풍수서를 출간한 때는 1993년이었다(《집터와 일터》). 이후 지금까지 《한국풍수의 허와 실》, 《우리 땅 우리 풍수》,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명산론 역해》, 《지리신법 역해》, 《권력과 풍수》, 《우리 풍수 이야기》, 《복을 부르는 풍수기행》, 《한반도 풍수학 사전》, 《논두렁 밭두렁에도 명당은 있다》, 《13마리의 용의 비밀》, 《풍수강의》, 《감룡경, 의룡경 교감 및 역주》 등을 출간하였다. 풍수고전 번역, 기행문, 풍수사전, 풍수학 개론 등 풍수의 모든 분야에 관한 저술이었다. 출판을 위한 출판이 아니라 한반도 풍수를 정리하고 그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풍수적 삶의 과정이었다. 미래 한반도 풍수학 전개의 토대가 되고자 한 것이었다. 나 혼자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선배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와 암묵적 동의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기초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한반도 풍수학자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김석환(당시 총리실 공보) 수석을 만났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났지만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대한 그 분의 분석과 판단력은 날카롭고도 정확하다. 김 전 수석은 나에게 “조선 풍수학인의 눈으로 일본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우리 땅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필자로 하여금 세계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자 새로운 과제의 부여였다. 그 분의 조언을 듣고 ‘그래, 이제는 고향을 떠나자’고 결심하였다. 고향을 떠나지 않는 자, 고향을 돌아올 수 없다. 지금까지 한반도라는 풍수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제 고향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귀향을 이미 전제한다. 돌아와서 바라보는 고향은 이전의 고향과 다를 것이다. 나그네가 첫 번째 여행지로 결정한 곳은 일본이었다. 왜 첫 번째 여행지가 일본인가? 일본의 풍수 수용은 우리와 처음부터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풍수의 일본화(日本化)라고나 할까? 이 책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 난 길을 가는 심정으로 쓴, ‘조선 풍수의 시각으로 본 日本, 日本文化’에 대한 보고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