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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0장 너무 이른 자서전 1장 어떤 속셈 (2018/9/모일) 2장 이다바시에서 (2018/10/1) 3장 연재 개시 4장 가구라자카에서 5장 이치카와 세이코의 충고 6장 언덕 위의 이웃 사람 7장 여자의 정체 2부 8장 사형수의 아내 9장 내추럴 본 킬러스 10장 질투 11장 재앙신 12장 궁지에 몰려서 13장 언덕 위의 빨간 지붕 3부 14장 진상 마지막 장 (2018/12/19) 회고 (2014/4/1) 참고 자료 옮긴이의 말 |
Yukiko Mari,まり ゆきこ,眞梨 幸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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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원고는 너무 ‘고상’했어. 그렇다기보다 소꿉놀이하는 수준이었지. 그래서는 저급한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없어. 좀 더 질척질척한 피 냄새가 풍겨야지.”
전채 요리를 가져온 웨이터가 동그래진 눈으로 가사하라 도모코를 보았다. […] “그 원고의 저자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아무것도 몰라. 사건에 관해서는 물론, 우리 사회와 인간에 관해서도. 그 사람, 몇 살이야? 어차피 젊겠지. 젊은 사람 중에 흔한 유형이야. 기껏해야 이십몇 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 난 그런 인간이 정말 싫어. 아니, 싫다는 감정도 품고 싶지 않을 만큼 무시하고 경멸해.” --- pp.43-44 가사하라 도모코라는 이 여자가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해서? 분명 이름난 편집자다. 하지만 그것도 ‘도도로키쇼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혼자서는 하찮은 엑스트라인 주제에.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착각에 취해 있다. 그렇게 속으로 욕을 퍼붓는 나 또한 이 세상에서는 하찮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결국 우리는 ‘엑스트라’다. 엑스트라끼리 촌극을 벌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째선지 지금까지 느꼈던 긴장과 불안과 굴욕이 쑥 빠져나갔다. --- p.45 물론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법정 화가 일을 시작한 지 1년은 됐을 거예요. […] 그전에도 흉악한 사건을 몇 건 담당하긴 했지만, 이만큼 악질적이고 역겨운 사건은 없었어요. 일하기에 앞서 사건을 미리 예습하는데, 그때만큼은 자료를 다 못 읽었어요. 두세 장만 읽었는데도 위장이 찌릿찌릿 아프고 구역질이 날 정도였죠. 계속 읽다간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서 내팽개쳤답니다. […] 방청석에 앉아 있으니 어리석은 저 자신이 얼마나 밉던지. 가능하면 시간을 되돌려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거절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인물을 관찰해서 스케치해야 하다니……! --- p.53 네, 단언할게요. 그 사건은 아오타 사야코가 주도해서 일으킨 거예요. 오부치 히데유키는 아오타 사야코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공범이 된 것에 불과하고요. 오부치 히데유키에게도 잘못은 있겠죠. 하지만 그는 대중이 생각하는 만큼 ‘나쁜 인간’이 아닙니다. […] 네?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건. ……다 알고서 오늘 연락하신 것 아닌가요? 저는 오부치 히데유키와 옥중 결혼했어요. 네, 저는 그의 아내예요. --- pp.58-59 아오타 사야코는 정말로 필사적이었습니다. 오부치 히데유키의 마음에 들고 싶고 다른 여자들을 제치고 싶다는 열의가 강하게 느껴졌죠. 왜, 별것 아닌 남자라도 경쟁자가 많으면 투쟁심이 불타오르잖아요. 바로 그런 심리 상태 아니었을까요? “그 녀석은 ‘날라리’를 좋아해. 그것도 금발 날라리.” 제가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그길로 미용실에 달려가 금색으로 염색하고 올 정도였다니까요! 투쟁심이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 활활 타오른 거겠죠. --- p.63 하지만 오부치 히데유키는 달랐지. 그는 매상을 올려야 한다는 초조함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손님을 접대해.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살갑게. 그야말로 속정 깊은 새침데기처럼. 난 그 기술에 완전히 사로잡혔어. 그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물건을 사다 바쳤지. 그런데 뭐라는지 알아? “나, 이렇게 비싼 건…… 흥미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나 같은 걸 위해서 돈을 쓸 바에야 자신을 위해서 쓰는 편이 나아요” 그러는 거야. 성질 나지? 그래놓고 내가 준 물건을 늘 가지고 다녀. ‘난 네 거야’라고 말하듯 목을 골골대며 응석을 부리지. 나 원 참. 대체 어디서 그런 기술을 익힌 걸까. ……아니야, 타고난 거겠지. 오부치 히데유키는 여자를 후리는 데 타고난 녀석이야. --- pp.88-89 “술도 괜찮을까?” 하시모토 씨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바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와인이든 맥주든 좋아하는 걸로 드시죠.” “그럼 하이네켄, 괜찮아?” “네, 그럼요, 그럼요.” “술만 마시면 속이 놀랄 테니 안주도 시켜도 될까?” “그럼요, 물론이죠.” 몇 분 후. 작은 테이블에 병맥주를 비롯해 키슈, 모둠 치즈, 마리네가 빽빽하게 놓였다. 해가 꽤 기운 것 같았다. 창문으로 석양이 비쳐서 이치카와 세이코의 표정이 더 안 보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만큼은 여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커피가 담긴 컵을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뭘까. 견디기 힘든 이 기분은. --- p.99 “플라토닉한 관계지만 마음은 아주 깊이 연결돼 있어. 어떤 의미에서 플라토닉은 궁극의 성관계가 아닐까.” 그런 소리나 떠들고 다녔지. 정말 등신 같아. 정말 등신 같아! 아아아, 이런 등신! 생각만 해도 악을 쓰고 싶어져! 멍청한 년! 멍청한 년! 멍청한 년! 아아, 미안해. 이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 p.108 당신들은 될 수 있어? 못 되겠지. 당신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니까. 애물단지인 쥐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오로지 쥐가 달아나기를 기다리는 겁쟁이. 하지만 난 달라.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사형수, 그의 아내야. 사형수의 아내라고! --- p.200 질투?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런 감정은 있다. 레이코는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오타 사야코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그야. 그야 ‘살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오부치 히데유키와 함께 저질렀으니까. 이제는 서로 아무리 미워할지라도 평생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셈이다. 나도 그런 인연을 맺고 싶다. ‘인연’은 ‘굴레’이기도 하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럴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인연을 맺어보고 싶다. ……그래, 오부치 히데유키와. --- p.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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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서 좀 더 질척질척한 피 냄새가 풍겨야지.
그렇게 고상해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없어. 빈집털이처럼 남의 내면에 성큼성큼 들어가서 뭔가 좋은 소재가 없는지 닥치는 대로 뒤지는 게 우리 일이야.’ 아무 잘못도 없고 인격자로 평판이 높았던 의사 부부가 자택 근처 맨션 건설 현장에서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온몸을 난도질당한 뒤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그 통에 담가진 것. 수사 결과 한 핏줄인 딸 아오타 사야코와 그 연인 오부치 히데유키가 범인이었고 법원은 아오타 사야코에게 무기징역을, 오부치 히데유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18년 뒤 한 주간지에 이 일명 ‘분쿄구 부모 강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신인문학상 수상 뒤 이렇다 할 작품을 못 쓰고 있던 한 젊은 작가가 이 소설 기획을 대형 출판사인 도도로키쇼보 문예부 편집자 하시모토에게 들고 온 것. 그러나 글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도도로키쇼보 출판사의 데스크에 의해 정해지고, 힘없는 편집자는 그보다 훨씬 더 힘없는 작가에게 집필을 위한 인터뷰 취재를 지시하는 동시에 데스크에게서 하달받은 집필 방향을 작가에게 강요한다. 젊은 작가는 속으로 애써 울분을 진정시키며 이 서열 구조에 동참하여 글을 써나간다. 다시 쓰기와 고쳐 쓰기를 몸이 상하도록 반복하면서, 이 전대미문의 살인자들 주변 인물을 하나하나 인터뷰하는 와중에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충격적인 사실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사건 기록을 위해 재판을 참관했던 법정 화가 레이코는 아오타 사야코가 주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단언하며 자신이 오부치 히데유키의 사형이 확정되기 전 그와 옥중 결혼했다고 밝힌다. 오부치 히데유키가 고등학생 때부터 일하던 이벤트 회사 사장은 그가 소행이 안 좋긴 헀지만 그렇게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 같다며 아오타 사야코가 그의 마음에 들려고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사건을 파고들수록 점점 더 혼란에 빠져드는 작가에게 편집자는 말한다. “독자의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수수께끼’가 부족해. 그야 그렇겠지? 소설의 모티브인 ‘분쿄구 부모 강도 살인 사건’은 대중들이 보기에 이미 해결된 사건이니까. 아무리 잔인한 사건이라도 ‘해결’되면 대중의 흥미는 식는 법이야.” (69-70쪽) 독자가 감정 이입할 시점을 어떻게 설정하고, 독자가 가슴 졸일 수수께끼를 어느 지점에서 만들어야 할까? 오부치 히데유키의 전 애인이자 도도로키쇼보의 편집자였던 이치카와 세이코는 오부치 히데유키가 천성적으로 여자를 후리는 데 타고났다며 그가 아오타 사야코를 어떻게 만나기 시작했는지 격한 흥분에 휩싸여 얘기한다. 또한 사건 현장인 ‘언덕 위의 빨간 지붕’ 집 이웃 오가타는 사야코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사건 당일 밤에 그 집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설명하다가, 얼마 전 교도소에서 사야코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고 덧붙이는데……. 제삼자들의 말로만 전해 듣던 사야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구를 주범으로 설정하여 소설을 이끌어갈 것인가? 대체 누가 진짜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작가, 편집자, 증인, 피의자 모두는 각자 원하는 바를 달성할 것인가? 복선과 반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작가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잠시 멈춰야 할지 모른다. 철저히 투명 인간으로 살아오길 30여 년. 가족과 레이코 사이에 생긴 골은 회복 불가능할 만큼 깊어졌고, 블랙홀 같은 절망만 매일 생겨났다. […] 계속 투명 인간으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활해서 ‘레이코, 미안해! 외로웠지’ 하고 끌어안아주지 않을까.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30년 넘게 지나서야 그런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298-29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