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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지난날 그 시절을 다시 걷는 기분으로
? 신문에 실린 첫 미술전 단평 ? 『민국일보』에서 처음 미술기자가 되다 ? 4ㆍ19혁명과 5ㆍ16군사정변, 변화한 미술계 ? 4ㆍ19위령탑에 얽힌 비화 ? 이승만 동상의 수난 ? 격동기의 미술계 한복판에서 ? 파리에 갔던 화가들, 새 작품의 국제성 ? 세계 첨단예술의 동향을 연재 기사로 ? 이응노와 윤이상 그리고 백남준 ? 미술전문기자로 이끌어 준 만남들 ? 근대한국미술사 조사와 기록 ? ‘국전여화’ 연재 기사 ? 박수근의 국전 낙선, 그 고통을 지켜보다 ? 글ㆍ그림의 여름철 기획기사, ‘관동 스케치 ’ ? 혼자, 미니 잡지 『미술』 간행 ? 첫 저작, 이당 김은호 평전 『화단일경』 ? 두 번째 저작, 『한국근대미술산고』 ? 숙원의 국립현대미술관 발족, 첫 기획전 ‘한국근대미술60년전’ ? 나의 사회적 스승, 청명 임창순 선생 ? 오사카 만국박람회,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취재 ? ‘동양화 6대가전’ 기획, 진행 ? 세 번째 저작,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다 ? 네 번째 책, 『한국문화재비화』* 30년 전에 쓴 『한국문화재비화』의 구실 ? 기자 생활 마감, 새로운 출발 * 나와 『대한일보』, 그날 ‘분노의 대자보’ 덧붙이는 글 ? 미술기자 15년, 기사 목록 ? 나의 회고 ? 나의 사설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추천의 글 | 나의 멘토, 미술기자 이구열_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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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기록자로, 연구자로
한국미술사의 한 시대를 맡았던 기자 이구열 신문 지면에 이구열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59년 신조형파 제3회전에 관한 관람평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사 뒤에 늘 ‘거북 구(龜)’ 자를 이니셜 삼아 적어넣었고, 그로 인해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거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기자 생활을 시작하던 1959년은 공교롭게도 한국미술의 ‘현대’의 기점과 맞물려 있다. 전쟁을 치른 뒤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의 상흔을 딛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변혁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언론계에 입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국내외 문화계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구열이 새로운 미술계 동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서울 시내 안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전시장을 직접 다니기 시작했고, 지면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많은 전시의 단평과 시평 보도를 게재했다. 그는 또한 꾸준히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신문과 잡지, 단행본 등을 탐독하며 국제적인 예술계의 동향을 국내 독자들에게 알리는 데도 누구보다 열의를 보였다. 지금처럼 온갖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미군 부대 도서실에서 흘러나온 잡다한 영문 잡지, 노변 판매장, 일본 서적 전문점 등을 다니며 그 나름의 지식을 쌓았고, 그때만 해도 독자들의 눈에 낯설었을 세계적인 ‘첨단예술’의 동향을 연재 기사로 기획, 게재하기도 했다. 그렇게 국내외의 미술계와 문화계 전반의 현상과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가 기사를 쓰는 것에서 나아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기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세기 개화기 이후 우리 나름의 근대적 미술계의 움직임 또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나 조사 기록 등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몹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 안타까움은 푸념으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추적해보자는 의욕을 불태우게 했다. 그는 확보할 수 있는 옛 신문들의 창간호부터 열독을 해나가기 시작, 『한성순보』『동아일보』『매일신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대한민보』 등을 대부분 구해 읽었고, 그 신문 속에 등장하는 문화예술계 관련 기록들을 일일이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노트는 훗날 그의 이름으로 펴낸 여러 권의 저서로 거듭났고, 이후 근대미술 연구자로서 그의 활동에 밑바탕이 되어 주었으며 나아가 우리 근현대 미술사 연구의 귀한 근간이 되어주고 있다. 그는 기록을 정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문기사 외에 새로운 기록을 생산하는 데도 앞장 섰다. 미술계를 위한 전문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편집 계획에서부터 디자인, 교정, 제작까지 오직 혼자의 힘으로 꾸린 미니 잡지『미술』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도 하고, 이당 김은호 선생의 일대기와 함께 우리의 근대전통화단사를 정리한 『화단일경』, 앞서 언급한 수많은 노트와 기록을 모은『한국근대미술산고』,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은 물론 우리 문화재와 관련한 100회 연재 기사를 모아 펴낸 『한국문화재비화』(『한국문화재수난사』로 개정, 출간) 등 여러 권의 유의미한 단행본을 꾸준히 펴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기획전시인 ‘한국근대미술60년전’ 등의 기획에도 관여했는데, 이 전시 이후 우리 근대미술은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 민간 화랑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중섭, 이인성 등의 유작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 전시들에 이구열이 참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또한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한 ‘동양화6대가전’ 등의 전시를 기획, 총괄 진행하기도 했다. 기자를 그만 둔 이후에는 근대미술연구소를 직접 열고 한국 근대미술 관련 다양한 연구와 기록물 발행을 출간해왔다. 팔순의 미술기자가 한 권의 책으로 건넨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 관한 애정의 고백이자 자부심의 토로 칠순 무렵 시작한 이 기록은 약 1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저자 이구열은 기록을 정리하며 마치 옛 시절로 돌아가 두 번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척박한 사회 현실 속에 안주하거나 한계 안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고, 항상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기자였다. 그가 기자로 보낸 시절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곤궁했고, 정치적으로는 격변의 나날이었다.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열정과 발품이 전부였다. 그렇게 15년여를 기자로 사는 동안 미술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났고, 온갖 이야기들이 몰려들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시절을 거치며 그는 꾸준히 같은 자리를 지켰고, 자신이 지켰던 ‘땅의 이야기’를 개인의 기억 속에만 보관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기록 덕분에 우리는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우리 미술사의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과 컴퓨터에 온갖 ‘데이터’가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그런 차갑고 정확한 데이터 대신 이구열 기자는 자신이 살아온 시절과 더불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온기가 깊게 배어 있는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여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내민 이 기록은 한 사람의 직업인이 자신의 업에 대해 가졌던 애정의 고백이자 팔십의 인생을 산 한 사람이 자신의 평생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의 토로라 할 수 있다. 그가 목격하고, 만나고 더불어 시절을 살았던 수많은 화가와 예술가들, 선배와 동료 연구자들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그는 모두 떠난 텅 빈 거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리는 비어 있지 않고, 1975년 불혹 무렵 시작한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여전히 그 문이 열려 있으며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출퇴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오래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기자로 보낸 15년, 근대미술연구자로 보낸 40여 년. 그는 여전히 현역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록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이자 우리가 그의 기록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