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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뿌리 / 8
꾀꼬리 / 31
시루봉 / 54
고향집 / 78
태조산개나리꽃 / 126
백제 왕릉 / 153
당산바느질 / 206
불화살 / 232
참외 / 257
용구새 / 282
고구마와 호박죽 / 308
쌍무지개 / 331
얘기꾼의 발자국 / 358

[부록] 소설가 이광복(李光馥) 연보

저자 소개 1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논산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에 장막희곡이 입선하였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에 당선되었으며, 1976년 [현대문학] 소설 부문에서 초회 추천되며, 1977년 [현대문학]에 소설 추천이 완료되었다.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되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월간문학], [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사)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사)한국소설가협회 이사, (사)한국문예학술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논산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에 장막희곡이 입선하였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에 당선되었으며, 1976년 [현대문학] 소설 부문에서 초회 추천되며, 1977년 [현대문학]에 소설 추천이 완료되었다.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되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월간문학], [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사)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사)한국소설가협회 이사, (사)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이사, (재)나누리장학문화재단 이사로 활동중이다.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제19대~제23대), (사)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 (사)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회장(제24대),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제25대~제26대^상임이사 겸임), (사)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사)한국소설가협회 감사,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 문화정책위원장,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 사무처장, (사)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제10대^제13대~제14대), (사)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교수,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표창(1987), 제7회 동포문학상, 제2회 시와시론문학상,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대통령표창(1995), 제1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 예술문화상(공로상), 노동부장관 표창, 제28회 PEN문학상, 제14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 예술문화대상, 제3회 익재문학상, 제9회 정과정문학상, 제3회 한국지역연합방송(KNBS)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화려한 밀실』, 『사육제』, 『겨울여행』, 『먼 길』, 『동행』, 『만물박사(전3권)』,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 『폭설』, 『열망』, 『술래잡기』, 『겨울무지개』, 『바람잡기』, 『송주임』, 『이혼시대(전3권)』『삼국지(전8권)』,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사랑과 운명』『불멸의 혼-계백』, 『구름잡기』, 『안개의 계절』, 『황금의 후예』, 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 『슈퍼맨』, 전래동화 『에밀레종』, 교양서적 『태평양을 마당처럼』, 『세계는 없다』,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문학과 행복』, 시나리오 『시련과 영광』, 『아, 대한민국』, 수필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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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0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152*225*30mm
ISBN13
9791192828978

책 속으로

나는 세 살 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로 출계했다. 종가인 큰집에 종통을 계대해야 할 후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가의 무후. 그 절박한 마당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일생일대의 중대 결단을 내렸다. 친가 부모님은 둘째딸을 큰집으로 보낸 데 이어 나까지 어머니 젖을 떼자마자 입후, 즉 양자로 바친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졸지에 종가의 종손이 되어 누대 선조님의 제사를 모셔야 할 사손으로 자리매김했다.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철모르는 코흘리개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생이별이었다.

나는 유년 시절 (큰)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고,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너덧 살 때 한글을 깨치고 천자문을 떼었다. (큰)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에게 틈만 났다 하면 세보를 꺼내 놓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때부터 위선과 보학과 집안 내력에 처음으로 눈뜬 셈이었다. 어느 날인가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한산이가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우리는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 되시는 목은 할아버지 자손으로 양경공파 후손이여.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뿌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니가 조금만 더 크면 목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 선조님들이 얼마나 위대하신 어른들이신가를 저절로 알게 될 겨. 내 말 잊지 말거라.”
--- 「뿌리」 중에서

작년 여름이었다. 다시 원증산을 찾았다. 윗집 집터는 누군가가 왕창 밀어다 붙인 흙무더기로 뒤덮인 채 완전히 땅에 파묻혔고, 내가 부엌 모퉁이에 심었던 은행나무만 거목으로 자라 흙무더기 경계 지점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마다 은행 열매가 포도 알처럼 다글다글 맺혀 있었고, 저 밑 수랑논에서부터 도라무텡이를 지나 채종말과 고추골에 이르는 용보들에는 거름을 듬뿍 머금은 벼가 거무룩하게 자라고 있었다.

내가 말랭이에 서서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시루봉 정상 쪽으로부터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온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허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치솟는 듯 하더니 은행나무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만감이 뒤죽박죽으로 교차하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꾀꼴 꾀꼴 꾀꾀꼴 꾀꼴 큰 소리로 무정한 노래를 불렀다. 때마침 당산 쪽에서는 산비둘기가 애절하게 울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마련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우들이 경천동지할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시루메, 즉 원증산은 몽매에도 잊지 못할 영원한 내 고향이었다.
--- 「꾀꼬리」 중에서

나는 그동안 향수에 젖을 때마다 줄곧 윗집이든 아랫집이든 사진 한 장 똑바로 촬영해 놓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아쉬워했다. 하기야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내가 고향에 살 때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식구들은 사진 촬영보다 입에 풀칠하기가 더 다급했다. 사진을 확보해 놓았더라면 나중에라도 누군가 우리 후손이 아랫집과 윗집을 복원할 때 가장 근사하게 참고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자못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사실인즉 (큰)어머니와 누님과 내가 윗집 마당에 나란히 서서 촬영한, 노랗게 빛바랜 명함판 크기의 작은 사진이 딱 한 장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여성지 기자가 내 일대기를 기사화할 때 곧바로 돌려준다면서 그걸 챙겨가더니 그만 흐지부지 분실하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 없으면 비행기 안에서도 독사 물린다는 말이 있지만, 무책임한 기자를 철석같이 믿고 희귀 자료를 내주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참화를 입었다. 나중에 듣자하니 그 기자 녀석은 자기네 집 족보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사진이나 영화를 관람하듯 꼼꼼히 회상하건대 우리 윗집의 구조는 아주 단조로웠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딸린 맞배지붕의 말집이었다. 추녀를 집 전체에 삥 둘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부엌 쪽에만 추녀를 두르고 방 쪽에는 추녀를 두르지 않아 가옥 모양이 비대칭으로 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외견상 궁색이 졸졸 넘쳐흘렀다.

그나마 부엌 쪽에 애써 천막처럼 추녀를 두른 것은 농기구와 그 밖의 잡다한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헛간이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 추녀 밑 뒤쪽에는 눈비를 맞아서는 안 될 지게를 비롯하여 장작 고주박이 솔가리 깻대 콩깍지 등 바싹 마른 땔나무들이 쌓여 있었고, 그 앞쪽에는 수시로 꺼내 써야 하는 삼태기 키[箕] 메꾸리와 호미 낫 갈퀴 삽 쇠스랑 괭이 곡괭이 도끼 가래 넉가래 도리깨 홀태 따위의 몇몇 농기구들이 있었다.
--- 「개나리꽃」 중에서

나는 국민학교 재학 중 줄곧 교복 가슴에 기성품 비닐 명찰과 제비꼬리 모양의 리본을 패용했다. 그것은 차부집에서 산 것이었다. 명찰도 그렇고 리본도 그렇고 비닐 창에 성명과 문안을 끼워 넣도록 제작돼 있었다. 명찰에는 연필로 이름을 써서 비닐 창 안으로 밀어 넣었고, 리본 안의 접지에는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이외에도 ‘불조심’ ‘교통안전’ ‘반공 방첩’‘준법정신 앙양’ ‘구강 위생 보건 주간’ ‘국산품 애용’ ‘기생충 박멸’ ‘쥐잡기 주간’ 등 여러 경축일과 표어와 경구들이 골고루 인쇄돼 있었다. 그걸 시의에 맞게끔 그때그때 적절히 뒤집고 잦히고 다시 접어서 갈아 끼우면 되는 것이었다.

4학년 때의 담임은 정진후 선생님으로 미혼 꽃미남이었다. 선생님은 칠이옥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선생님은 남학생과 여학생을 1:1로 짝지어 좌석을 배치했다. 내 짝꿍은 남옥혜였다.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예쁜 아이와 나란히 앉게 되어 기분이 썩 좋았다. 걔는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1학년 때부터 급우들 사이에 ‘공부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험을 쳤다 하면 거의 만점으로 질주했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모범생으로 공인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교장 선생님의 딸인 남옥혜를 특별 배려한 나머지 내 짝꿍으로 앉혀준 것이었다. 나는 입학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학년말이 되면 꼬박꼬박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까지 받았다.
--- 「백제 왕릉」 중에서

이렇듯 흘러간 세월의 길이에 비례하여 애환의 부피도 솜뭉치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날 입때껏 단 하루도 네 분 부모님을 잊은 적이 없었다. 송창근 선생님도 그리웠다. 과거 열차 편으로 논산역을 거쳐 고향에 오르내릴 때마다 두계역, 아니 계룡역을 지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했다. 연산역을 지날 때에는 당연히 저쪽 여우고개 쪽을 바라보며 보도골에서의 투병 생활을 반추했다. 그러나 천안 논산 간 고속 도로가 개통된 뒤로는 논산행 열차보다는 주로 부여행 고속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엊그제였다. 책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큰)어머니 유품 한 점을 발견했다. 충청남도에서 제작 보급한, (큰)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소지했던 노인 우대증 지갑이었다. 밤색 표지의 군청색 글자들이 희미하게 퇴색돼 있었고, 지갑 안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경로우대증’과 부여군수 명의의 ‘유의사항’ 이외에 당신의 ‘사망진단서’ 두 통이 들어 있었다. 경로우대증과 유의사항은 원본이었고, 당신께서 돌아가신 이후 내가 네 겹으로 접어 끼워 놓은 미농지 사망진단서는 사본이었다.

경로우대증에 부착된 (큰)어머니의 사진을 뵙는 순간 사지가 벌벌 떨리는 미증유의 전율과 함께 왈칵 피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바느질의 전설이자 신화이신 당신과 이렇게 재회했다. 누군가가 내 폐부를 바늘로 쪼아대는 듯했다. 나를 위해 인생의 전부를 희생했던 (큰)어머니. 하지만 나는 당신의 ‘미친놈’ ‘헛소리’ 등등 거칠고 자극적인 말씀에 앙심을 품고는 뻔뻔하게도 오늘 여기까지 살아왔다.
--- 「불화살」 중에서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객지로 나온 이후 오늘날까지 입신양명 금의환향을 목표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영광과 환희와 성취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한평생 내가 걸어온 길에는 입신과 양명과 금의와 환향이 아닌, 얘기책 속의 그 어떤 얘기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파란만장한 실의와 좌절과 절망과 슬픔과 불행의 역경 속에 피눈물로 얼룩진 발자국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시절 인연으로 만났던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한몸 죽는 날까지 변상할 수 없을 만큼 막심한 폐를 끼쳤다.

그런 업보 때문이었을까, 십자가는 무겁고 고해는 험난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날 입때까지 부모님께 짊어진 부채를 상환하지 못했고, 동기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으며, 아내와 아이들 3남매에게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나는 불효자, 못난 동생, 못난 형, 못난 오빠, 못난 남편, 못난 애비일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종통을 이어받은 종손으로서 문중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한 채 뼈아픈 회한만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싯적 이래 오늘날까지 초지일관 얘기책 쓰는 얘기꾼으로 살아왔다. 본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부득불 위기 모면 차원에서 잠깐잠깐 직장에 한쪽 발을 담그고 밥벌이를 했을 따름이었다.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뭔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다 보면 세태에 찌든 영혼이 청정한 시냇물처럼 말끔히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았다. 나의 얘기는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뒤집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 「얘기꾼의 발자국」 중에서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고향이 그리웠다. 조상님과 부모님께서 살았던, 우리 동기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탯줄을 묻고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내 인생의 원점이었다.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개인에게는 개인사가 있고, 가족 간에는 가족사가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나에게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생사가 참 많았다. 그 숱한 사연들을 단순한 기록이 아닌, 오래 기억할 만한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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