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임나연 하루 8
레몬 나무 26 세상의 모든 사랑은 아름답다 38 김진현 비정 59 박주원 다시 시작하는 마음 115 김제헌 사랑에도 교과서가 있다면 130 해서 여름날 우리 (1부) 183 채석강아지씨 맑음의 바다 205 우서윤 물망초 225 |
|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하루는 감기에 걸려버렸다. 올해 첫눈이 내리는 날이 마침 어제였다. 하루가 눈을 반짝거리며 마당을 계속 쳐다보길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밖을 나갔다. 따뜻한 패딩에 털모자, 털목도리, 털장갑을 끼우고 따뜻한 장화까지 신겼는데, 그 방어를 뚫고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영원은 헐레벌떡 움직이며 어린이 약을 사 오고 죽도 사왔다. 끙끙 앓으며 누워있는 하루를 일으켜 죽을 먹이고 약을 먹였더니, 그 모습을 구경하던 하루가 그렇게 말했다. “나 귀찮으면 혼자 냅둬도 돼. 그래도 이젠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영원은 기가 차서 답도 안 하고 같이 침대에 올라가 하루를 껴안았다. 하루는 뜨거운 숨을 쌕쌕거리면서도 영원을 밀어내지 않았다. 어느새 잠든 하루를 토닥이며 영원은 다시 한번 전 주인에 대한 앙심을 불태웠다. ‘이런 착한 애를 혼자 놔두다니. 지옥에나 떨어져라, 망할 놈.’ ---p.21 임나연 소설 「하루」 중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느라, 목소리가 많이 떨리는 것을 나도 느꼈다. 이 감정을 막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 몰아쳐 오는 감정을 막을 수 없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에, 막아줄 댐이나, 제방은 없다. 단, 내 의지로 지어두면 어느 정도 시간은 벌어둘 수 있다. 그러길 바랄 뿐이다. “이제 와서 묻는 건 좀 갑작스럽긴 한데, 나 어떻게 생각해?” 억지로 막아두고 있던 감정을 뒤흔드는 말. 당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흔들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갑작스러운 걸 아는지, 머리를 긁적이듯 무안하면서도,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순수한 궁금증이 올라와 나에게 물은 당신의 말에, 도저히 거짓을 더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순수한 말투로 무안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사람 앞에서 거짓을 고할 정도로, 그러고도 버텨낼 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닌 나니까. 지금도 그대에게 그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 미소가 미처 지어지지 않는다. 진심을 전할 때마저, 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익숙하니까. ---p.108 김진현 소설 「비정」 중에서 “소년이여, 그 언덕에 간다면… 무얼 하고 싶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돌멩이를 하나 들어 달빛 속에 비춰 보았다. “그냥, 그 아이가 왜 우는지 알고 싶어요.” 그 대답에 이야기꾼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좋네. 그렇다면 내가 자네와 함께 가주겠네.” 소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요? 아저씨도 그 언덕을 알아요?” “나도 예전에 그 언덕을 본 적이 있네. 다만, 나는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이지.”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거기엔 뭐가 있었어요?” ---p.119 박주원 소설 「다시 시작하는 마음」 중에서 “그만 울어, 바보야.” 유나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단단했다. “나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야. 일어나.” “유… 유나야, 미안해. 정말 내가 다 잘못했어. 나 앞으로 잘할게. 한 번만, 단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줘.” 내 얼굴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그 경계가 흐릿했다. 유나는 그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 알겠으니까 그만 매달려. 알겠으면… 앞으로 잘하고. 알겠어?”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응! 진짜로 잘할게. 앞으로는 유나 너한테 부담스러울 만큼 매달릴 거야. 그 정도로, 정말로 잘할게.”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살짝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았다. 그 움직임이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하고 있었다. ---p.119 김제현 소설 「사랑에도 교과서가 있다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였다. 동그랗게 눈이 커지고,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빛에 반짝였다. 나는 손에 든 것들을 조금 흔들며 너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혹시 이것들 너가 올려둔 거야?” …혹시 너일까? 개인적으로 난 네가 해둔 거였으면 좋겠는데. 너는 눈을 살짝 굴리며 여러 번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다가도 금세 또 눈을 또르르 굴렸다. ‘왜 대답을 안 해줄까? 이러면 정말 내가 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데?’ 허리를 살짝 숙여 너를 바라보았다. “아… 그냥 아침에 너한테 받은 것도 있고, 아까 연습하던 거 봐서….” 너의 말 마디마디에 자꾸만 미소가 짙어진다. “고마워, 잘 마실게.” 너는 또 입을 가리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p.198 해서 소설 「여름날 우리(1부)」 중에서 “삼이야… 내가 꼭, 너만은 지켜줄게.” 그러나 그 속에는 다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기도했다. 이 다짐이 끝을 맺을 수 있도록. 삼이가 깨어 있는지 자고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곧 멀어지게 될 운명이니까.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온통 빨간색 필름을 덧붙인 양 붉게 빛나고 있었다. 공기는 싸늘하고 온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팔과 다리는 점점 감각이 무뎌지며 가슴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듯 꿈틀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끝을 낼 수 있다. 몇 년간의 죄책감을 끝낼 수 있는 생각에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삼아, 일어나.” 내 목소리는 갈라져 쇳소리처럼 날카로웠지만 삼이는 눈을 비비며 해맑게 고개를 들었다. ---p.218 채석강아지씨 소설 「맑음의 바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닿지않는 거리에 있는 핸드폰을 잡으려 손을 휘적휘적 거렸지만 당연하게도 잡히지 않는 핸드폰에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알림을 끄게되었다. 화면을 보았다. ‘2025년 12월 24일 오전 10시 2분’ 12시에 엄마와 약속이 있기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마지막 정돈까지 하니 금방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 앞에 서 신발을 신기 시작한 순간, 눈 앞에 천으로 덮여있는 사진이 보였다. 천을 걷어내니 햇살이와 나였다. 햇살이를 품에 안아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내일이면 햇살이 기일이지….’ ---p.228 우서윤 소설 「물망초」 중에서 |
|
놀랍다, 시험공부에 시달릴 학생들이 예리한 감성으로 이런 작품들을 쓰다니!
소설은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사람들이 사는 시기마다 내부와 외부로부터 오는 두려움이 다르다. 두려움을 털어내려는 ‘알타미라의 동굴벽화’가 진화하여 숫자와 문자를 만들었듯 삶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얻은 기억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하여 형상화된 서사가 오롯이 사람살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거울이다. 발표된 작품마다 감정의 온도와 세상을 살피는 각도가 다른 것은 당연할 터.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타인을 끄집어내는 발상이 엿보인다. 나를 남처럼-타인을 나처럼, 바꾸어 만든 서사는 타인에 대한 공감으부터 시작된다. 인물 창조의 기술은, 폭 넓고 깊이 있는 독서와 부조리한 세상의 바다에 첨벙 빠져 헤엄쳐 나갈 때 획득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그릇에 담길 음식의 조리는, 기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달라질 것. 몇 편은, 주제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소재를 잘 녹여 결말로 이끌어가는 힘이 보인다. 거칠고 다소 생소함에도 나는, 이들의 미래를 열어두고 싶다. 진일보할 가능성이 뚜렷하기에! - 최성배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