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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사랑이다
최문희
도서출판도화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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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프롤로그
린의 혼잣말
친구야, 그건 아니지
아버지와 딸
오지랖의 변주
비가 내리고
그땐 그랬다
잠시 멈춰 서서…
그런 날들
알프스에 걸린 램프
불편한 손님
사소한 것들의 변죽
숨 쉬는 죽음
살과 뼈에 스민 냄새
괜찮지 않아
무엇에도 불구하고
옮긴이(번역 작가)
정화의 방
허공에 꽃씨 뿌리고
에필로그

해설
전혜린의 주체화 과정과 그 좌절

저자 소개 1

경남 산청군 남사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지리교육학과 졸업했다. 1988년 ?돌무지?로 『월간문학』으로 등단했고 1995년 『서로가 침묵할 때』로 국민일보 문학상, 같은 해 『율리시즈의 초상』으로 『작가세계』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크리스털 속의 도요새』 『백년보다 긴 하루』 『나비 눈물』 출간. 에세이집 『내 인생에 부끄럽지 않도록』 출간. 2011년 장편소설 『난설헌』 혼불 문학상 받다. 2013년 장편소설 『이중섭(계와 아이들과 황소 1.2권)』 2017년 장편소설 『정약용의 여인들』 2025년 『열여섯 번의 팔월』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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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66쪽 | 140*210*30mm
ISBN13
9791124052112

책 속으로

에스프레소를 처음 맛본 건 슈바빙의 노천 카페테라스였다. 9월인데도 햇볕은 엷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가지들이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린은 그때 혼자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차양 아래 마련된 철제걸상에 앉았다. 그늘이 깊어 서늘했다. 검정 앞치마를 걸친 길고 가느다란 남자가 2인용 원탁에 찻잔을 놓았다. 하얀 종지에 8부쯤 담긴 까만 액체. 서울에서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인스턴트 모카커피를 마셨다. 작은 컵을 두 손에 감싸 쥐고 입으로 들고 가던 순간 린은 등받이에 기댄 허리를 곧추세웠다. 흡, 코로 스미는 커피 향, 사향의 냄새가 그러할까? 첼로의 가장 깊은 저음에서 울리는 깊고 서늘한 숨, 에스프레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자신의 안에 자라지 못한 문학소녀가 있어, 제멋대로 방방 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의해 일그러지고 억압되었던 미성숙아가 아직도 두 발을 버둥거리며 착지를 못 하고 있다. 모든 동작이 완벽했는데도 불안정한 착지 때문에 1순위를 놓친 체조선수처럼. 서른 나이에 살짝 구겨진 미간의 주름을 보면 린은 화가 난다. 격한 발언, 막말의 프레임에 갇혀 버둥댄다. 자신의 커리어에 치명적이라는 자각에도 간단하게 수정 보완이 안 되는 자신의 뭉그적거림에 린은 화가 난다. 가벼운 동작, 예측불가능한 감정의 회로 그 모든 것의 귀결은 미숙함에 있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는데도 어떤 결정 어떤 선택 앞에 서면 미적거린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지성인다운 냉정하고 단호한 행동은 뒷전이다. 날 벼린 감성이 앞질러 결정을 흐리게 만들었고 그릇된 선택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반성해, 자제해, 자중해, 그 단어들이 모래알같이 입안에서 서걱댄다.

샘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의 물을 퍼 올린다. 그런 린의 멍 때리는 몇 초를 수는 센티멘털의 지병이라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린은 소스라치듯 몸을 돌려 주방으로 나간다. 금방 준비할게. 두 사람의 하루 일정은 비슷하다. 만원버스를 타고 출근해서 몇 시간 강의를 해야 한다. 같은 공간, 강의 받는 학생들도 같은 얼굴이다. 그런데도 아내라는 위치가 수행해야 하는 밥상 차리기는 거울 앞에 앉아 외모를 고르는 시간을 뭉개버린다. 허둥댄다. 청탁받은 원고 쓰기로 날밤을 새우는 날이 많다. 그런 날 아침이면 천근이나 무거운 몸을 끌고 밥을 짓고 밥상을 차려야 한다. 친정에서 얻어온 반찬이지만, 덜어내 데우고 남은 반찬은 단단히 봉해서 창턱이나 그늘 깊은 장소에 옮겨 둬야 한다. 그딴 원고는 뭐 하러 써?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수는 통박 지른다. 몇 푼이나 받는다고? 원고료 때문에 쓰는 거 아니잖아. 린은 텅 뚫린 것 같은 심장의 동공을 메워주는 그 작업만큼은 사절할 수가 없다. 이제 유통기한이 넘어선 모양이다. 요즘 들어 입안에서 곱씹는 말이다. 예쁜 모습보다 눈에 거슬리는 밉상이 도드라지는 모양이다. 대책 없는 익숙함이 만들어 내는 부부간의 간극이다.

린이 무슨 열렬한 페미니즘이어서가 아니다.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공적인 자리이든 사적인 자리이든 그녀의 화두는 독립된 자아이다. 자신만의 작업, 일하는 자신, 내 몫을 한다는 의지가 일상의 밑그림에 그려져야 한다고. 그래야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고. 자아가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삶은 자유에 반하는 행위라고, 명문대학 졸업장이 상품 가치의 라벨만으로 그 역할이 끝나는 건 비생산적이다.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강의시간마다 하는 이야기이다. 뒷줄에 앉은 수강생들은 눈을 내리깔고 볼펜으로 책상을 팍팍 내지른다.

교수님 벨 울렸는데요.

또 있다. 번역을 하는 내내 이게 내 인생의 전업이 될지도 몰라,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끓어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 글을 써야지, 왜 이딴 것에 시간을 죽여? 반발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눈 뜨는 아침마다 아니 매순간, 린의 내부에서 들끓는다. 내 글은 어디 갔지? 너무 절박해서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 같다. 누가 강요한 게 아닌데도 그녀의 안에서 투덜거린다. 수가 해보라고 했잖아. 그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는 잘 몰랐다. 어차피 활자하고 동행할 인생이라면 번역작업도 유익하다고 위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하는 내내 몇 번이나 펜을 집어 던졌다. 가볍게 시작한 일이 책의 중반에 이르면 펜대에 돌을 매단 듯 진도가 더뎠다. 독어 사전을 뒤적거리고 적절한 단어를 고르면서 원고지에 한글로 번안하는 작업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구청 직원이 검지로 가리킨다. 여기 날인하세요. 린은 얼굴에 열꽃이 피는 것같이 따끔거렸고, 도장을 쥔 손끝은 와삭거렸고,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도장을 찍는다. 어렵게 쌓아올린 8년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절차는 순식간에 마감된다. 인주 묻은 손가락을 휴지로 닦으면서 그녀가 그를 쳐다본다. 그의 시선이 초점 없이 굴러다닌다. 마주치지 않으려는 외면의 갈피에는 신세졌어, 하지만 작별을 조장한 당사자는 너야. 변명과 자기 비호적인 민망함이 내비친다. 미안해하지 마, 자길 여기까지 밀어 올린 장본인은 우리 부친이지 내가 아니잖아. 린은 돌아선다. 한두 발 내딛다가 린은 불시에 뒤돌아본다. 그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어깨 위에 얹혀 있던 침착성이 흔들리는 것 같다. 후줄근하다. 와이셔츠 소매 끝에 때가 절어 있고 느슨하게 풀려 있는 감색 체크무늬 넥타이는 슈트의 색상과 무관하게 그가 늘 애용했던 넥타이다. 참 엉뚱하다. 종이 한 장으로 분리되는 순간 타인이 된 그 사람의 차림새에 눈길을 빼앗기는 심리적 변이는 무엇일까? 진심인지 위선인지, 회한인지 모를 일이다. 모든 단어들이 두 팔이 되어 흔들린다. 서로를 외면한 채 뒷덜미에 꽂히는 시선을 압정처럼 달고 쫓기듯 그곳을 나간다. 그는 빠르게 층계를 내려가면서도 습관처럼 주위를 살핀다. 허둥거리는 모습이 평소 그답지 않다. 그 흔들림이 조금은 안쓰럽게 다가온다. 미안해하지 마, 열심히 사위 노릇 하느라고 애썼어. 입안에서 말을 굴린다.

생각이라는 마수는 뿌리 깊은 종양이다. 이 도착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혹사시킨 뇌와 뼈의 마디들이 아우성을 친다. 너 잘하고 있는 거야? 죽음이 깔끔한 마침표가 아니란 거 알아, 몰라? 늦지 않았어. 꺼졌다고 여겼던 잿더미에서 불티가 인다. 소진되지 못한 욕망의 그루터기다. 몸에 걸치고 다녔던 허접한 옷가지들을 태울 때 내장에 묻은 오욕칠정까지 비우고 태우고 재가 된 줄 알았다. 그분이 조탁한 천재라는 황금관, 그것에 준하는 결핍도 한아름 안겨 주었다. 그것이 빌미였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천재라는 착각을 난도질했을 것이다. 그 한마디에 딸은 꼼짝달싹 못했다. 그것은 어린 딸애의 영혼을 유린했고 성장을 망가뜨렸으며 기억을 쟁인 뇌마저 허접쓰레기 통으로 만들었다. 딸애는 그가 조정했던 꼭두각시다. 눈발이 스친 얼굴에 물기가 홍건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열려 있거나 벙싯대던 문고리는 죄다 여민다. 24인치의 허리가 더 작게 졸아든다. 지구를 반 바퀴나 휘돌아 여기에 와 머물 줄은 몰랐다. 미미한 온기로 얼어붙은 흙살을 녹일 수 있을지, 하나의 목숨이 지나간 이 자리에 다시 봄은 오고 새싹은 피어나겠지. 1965년 1월 9일. ‘타인은 지옥이다. 남은 나에게 남이고, 자신은 남에게 타인이다. 서로는 자신에게 자신이면서 서로에게는 남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소소한 일에도 자신을 투사해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면사같이 부드러운 어둠의 미립자들이 허공중에 가득하다. 말할 수 없는 이 아득함, 환불할 수 없는 지극한 평온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최문희 작가의 신작장편 『이별은 사랑이다』는 크게 ‘린’의 이혼과 관련된 서사, 뭰헨의 유핚시절 남편으로 지칭되는 ‘수’와의 슈바빙의 신혼 시절 서사, 이혼 후의 근황과 ‘린’의 의식세계를 다루고 있다. 작품의 도입부는 전혜린이 죽기 전 단계, 즉 ‘린’이 남편 ‘수’와 이혼하기 전 어떻게 가십화 과정을 거쳐서 실제 이혼으로 귀결되었는가를 조밀하게 보여준다. 린과 수는 독일에서 귀국, 두 사람이 나란히 서울대학교의 헌법 강사와 독일어 강사로 발령받는다. 린은 이미 그 당시 청춘이라면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인,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파비안』 헤르만 헤세 『데미안』 루이제 린저 『생의 한 가운데』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사강 『어떤 미소』 등을 번역한 작가였다. 번역 책으로도 ‘린’은 이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원칙과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활 속의 상식을 삶의 준거로 삼는 ‘수’와 형식을 싫어하고 낭만적 정서와 자유를 갈망하는 ‘린’, 두 사람의 정반대 성향의 결혼 생활은 대중들의 관심사였다.

이처럼 소설의 서두와 중반은 린의 인물들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세부적 전개가 생생히 살아있다. 결혼은 린에게서 가장 중요한 자유를 앗아갔고, 수와는 영혼의 교감이 없는 벽도 천장도 없는 황무지로 인식하고 있다. 아내를 가부장적 다스림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학생처럼 가르치고 지도하고 교정하려는 수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결국 잡지『여자의 향기』이혼기사로 그들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혼하게 된다. 작품의 후반부는 린의 자살 전 의식세계, 혼몽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고 있다. 고독을 뼛속까지 맛본 린은 공포에 떨면서 순간순간 괴로워했고 자신의 외롭고도 무서운 실존을 견디기 위해 의식이 피투성이 되도록 몸부림친다. 귀여운 딸 정화가 있는데도 늘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은 그녀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소설 쓰기를 하기도 전에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는다. ‘린’은 매일 대학 강의에 지치는 일상이지만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소설 창작을 하고 싶어 했고, 그 욕망은 박경리 작가에 대한 경외심으로 드러난다. 수와의 이혼으로 그렇게 욕망하던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갈망하는 소설 쓰기를 구체화하는 일만 남았고, 성균관 대학 조교수 발령으로 생존에 허덕일 필요도 없는 상황이 찾아왔지만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택한다.

민낯을 보이며 눈물 글썽이는 린, 강함 속에 연약함을, 무거움 속에 가벼움을, 경박함이 상식화된 사회질서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전진도 후회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여야 했다. 아버지로부터 길들여진 복종과 암기의 반복이 린의 일상에 착시와 환각과 불시착을 만들었다.(분문 중에서)

최문희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자유, 고독과 죽음에 대한 전혜린 개인의 고백을 인간 일반의 문제로 확대하고 있다. 소설 곳곳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전헤린의 삶에 대한 간절함과 피로가 동시에 스며있다, 그런 모습을 통해 자신을 구하려 했고, 사유를 통해 생을 유지하려 한 그녀의 상황을 정확히 보여준다, 또한 지적 긴장 상태로 늘 소진되어가는 여성 지식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대적 한계를 명확히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을 끝내 해소하지 못한 그녀의 삶을 애도하고 있다.

최문희 작가는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오래 남을 질문을 남긴 전혜린의 지적 열정과 고독을 차가운 문장 속 뜨거운 사유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삶에서 사랑이 없으면 이별도 없다면서, 나란하게 달리는 철마처럼 어떤 간격과 어떤 절제는 더 큰 상처로 가슴에 파이는 이별이라는 웅덩이를 만들고, 새끼처럼 꼬인 작별의 그림자는 지상의 삶을 연명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전혜린, 그가 살아냈던 서른 몇 해,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 나날이 아니었을까? 막말 프레임에 갇혀 그는 단 하루도 편안하지 못했다. 때로는 수긍했고 때로는 격한 반응으로 곁을 뿌리치기도 했다. 솔직 명쾌한 그의 성품을 두고 세상은 꼬고 비틀었다. 그래서 주저앉은 건 아니다.
그가 건재했다면 올해 25년 1월, 92세 생일을 맞이했을 것을. 서른셋의 요절은 억울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그의 삶이 헛발질로 마감된 건 아니다.
문화 불모지였던 이 땅의 젊은이들 가슴에 자명종을 울려준 젊은 지성, 그의 고요한 외침을 담아낸 몇 편의 서사가 아직도 우리들 책꽂이에 건재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마침표를 찍으면서 저자는 그의 부랑하는 영혼에 부쳐 한마디를 당부한다.
부디 평안하소서. 그대는 꺼지지 않은 촛불이요.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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