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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홀로코스트'라는 기억
1장 콜로코스트의 이용 생존자들의 침묵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 홀로코스트 산업의 출현 그들은 과연 희생자인가? 2장 사기꾼과 장사치 그리고 역사 홀로코스트의 신성화 홀로코스트 문학의 사기행각 유대인만이 희생자인가 3장 이중의 갈취 홀로코스트의 '막대한 이권' 홀로코스트 산업의 사기행각 결론. 미국 유대인 단체들의 홀로코스트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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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산업의 막대한 이권과 사기 행각 : 독일 정부가 지급한 배상금 갈취
1950년대 초에 독일은 유대인 단체들과 교섭에 들어가 배상 협정을 맺었다. 외부적 압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대략 600억 달러의 배상금이 정해졌다. 독일 정부는 1952년에 조인된 세 가지 각각의 협정을 가지고 유대인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을 모색했다. 개인 청구인들은 배상 법률에 의거하여 배상금을 지급받았다. 이스라엘과 맺어진 각각의 협정은 수십만 유대인 난민들의 동화와 재건에 필요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동시에 독일 정부는 또한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물질적보상청구연맹(Conference on Jewish Material Claims Against Germany) ― 미국유대인위원회(AJC), 미국유대인회의, 브나이 브리스(Bnai Brith), 공공분배위원회 등과 같은 각종 주요 유대인 단체들의 보호 기구―과 재정적인 조정안을 협의했다. 독일 정부는 보상청구연맹을 통해 보상 과정에서 기회를 얻은 나치 박해의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12년 동안 매년 1천만 달러, 지금의 가치로 대략 10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강제수용소와 강제노동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저자, 핀켈슈타인의 어머니가 독일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단돈 3,500달러였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들(실제로 희생자가 아니었던)은 모두 합치면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평생 연금을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다. 연맹은 협정규정과 정신을 명백히 위반하면서 보상금을 유대인 희생자들이 아닌 유대인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사용했다. 또한 보상청구연맹의 지침은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배분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랍비들과 저명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는 예외 조항을 적용시켜 개인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오랫동안 보상청구연맹의 사무총장을 지낸 사울 케이건의 연봉은 10만 5천 달러였다. 케이건은 연맹의 할당액이 뉴욕의 한 은행으로 전달되는 와중에 33건의 자금 및 예금 오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미국을 등에 업은 유대인 단체의 스위스 은행 협박 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하면서 1995년 5월 스위스 대통령은 나치 홀로코스트 기간에 유대인 난민을 거부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엇비슷한 시기에 전쟁을 전후하여 스위스 은행에 예치됐던 유대인 재산에 대한 해묵은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1995년 말 세계유대인회의(WJC) 회장이자 유대인 보상청구연맹 소속 관리의 아들인 에드가 브론프만과 WJC 사무총장이자 부동산 거물인 랍비 이스라엘 싱어는 스위스 은행가들과 만났다. 스위스 은행가들은 청구되지 않은 775개의 유면계좌에서 총 3,200만 달러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WJC와의 교섭을 기준으로 이 금액을 제시했다. 그러나 WJC는 그 금액이 부정확하다며 제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미국의 모든 정치적 기관들을 동원했다. 클린턴 대통령을 위시하여 상·하원과 11개 연방정부 관청들, 전국 각지의 주정부와 지방자치정부들이 일제히 불성실한 스위스 은행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위스 은행가들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예금을 사취하고, 자신들의 오점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주요 기록을 파기했으며, 오직 유대인만이 온갖 가증스런 행위의 피해자라는 주장이 제기 되는 등 다양한 비방이 이어졌으며 이러한 반 스위스 운동은 곧 스위스 국민에 대한 비방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스위스 은행들은 미국을 등에 업은 WJC에 굴복, 1998년 12억 5천만 달러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교훈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에 의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자신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핀켈슈타인은 말한다. 그렇다고 그 끔찍했던 반인륜적 행위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가 홀로코스트로부터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을 위한 가장 고결한 태도는 그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을 편히 잠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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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 혹은 <피아니스트>를 보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유대인 대량학살이 주는 순교자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주변 아랍국가와의 전쟁, 수천년을 떠돌다가 결국 자신의 땅을 찾게 된 이스라엘의 건국 신화와 더불어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뒤에 홀로코스트를 빙자한 유대인 엘리트들의 자기 몫 챙기기와 배상금을 둘러싼 미국과 유대인 단체들의 사기극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이 책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홀로코스트 신화의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선정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한 이 책은 나치의 인종학살 피해자중 일부였던 유대인들의 희생을 빌미로 돈벌이에 나섰던 유대인 이익단체들과 미국의 파렴치한 행각―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배정된 스위스 은행 배상금에 대한 절도 행위, 그리고 배상과정에서 행한 미국의 파렴치한 눈속임 등―을 명명백백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들이야말로 홀로코스트를 돈벌이로 전락시킨 홀로코스트 장사치 즉, 홀로코스트 산업 Holocaust Industry 이 아니냐고,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사실들, 그것은 과연 진실인가? 라고 '홀로코스트 산업'과 홀로코스트의 신성화 : 유대인만이 유일한 희생자인가?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매체에 익숙한 우리는 보통 나치에 의한 유대인 희생이야말로 유일한 홀로코스트(대량학살)로 생각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전문가로서 존경받던 위셀(Wiesel, Elie, 미국의 유대계 작가)은 유대인 희생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결코 이해되거나 전달될 수 없으며 오직 생존자의 사제들(오직 위셀)만이 홀로코스트의 신비를 신성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홀로코스트를 다른 고통과 비교하는 것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배신 행위라고 역설한다.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홀로코스트는 오직 하나뿐이다....." 대량학살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의 학살이라는 고유명사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유일성은 이스라엘의 최고 핑곗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달리 실제 나치에 의한 최초의 정치적 희생자는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최초의 대량학살 희생자도 유대인이 아니라 장애인들이었다. 나치는 50만의 집시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했다. 비율로 따지자면 이는 유대인 대량학살과 엇비슷한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대량학살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미국 내에 건립된 <홀로코스트기념관>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집시 대량학살의 인정은 곧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인의 독점적 특권의 손실과 이에 상응하는 유대인의 윤리적 자본(moral capital)의 손실을 뜻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른 고통과 비교하는 것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배신 행위라고 역설한 위셀은 2만5천달러의 기본 급료와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을 제공받으며 강연을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이교도의 끊임없는 증오의 산물인가? 이러한 논리는 결국 유대인 국가의 필요성과 이스라엘을 향한 적대감을 해명하는 데 기여했다. 유대인 국가는 향후 필연적으로 발생할 잔인한 반유대주의에 대한 보호막이었다. 거꾸로 해석하면, 유대인 국가에 반대하는 모든 공격과 방어 전략의 배후에는 잔인한 반유대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이스라엘에 부여한 완전한 특권이다. 유대인들에게 전면적인 면죄부를 제공함으로써 건국과정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비난을 피하게 해준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 당시 다비드 밴 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수상)은 "70만의 유대인이 2,700만의 아랍인들―1대 40―에 대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그 지역에서의 무기 수출 금지에 동참하고 있었고 아랍군은 무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AJC(미국유대인회의)는 "아랍 국가들이 히틀러 추종자인 무프티(이슬람 통치자)를 무장시키고 있는 반면 미국은 무기 수출금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러한 논리는 결국 중동지역 내 이스라엘의 역할을 이용하고자 했던 미국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면서 지속적인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