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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독을 훔치는 유혈목이
1. 구층암 모과나무 2. 산사의 여름 3. 발 달린 미꾸라지 4. 허공이 듣는다 5. 법난 6. 능파각 건너 피안으로 7. 산수유 마을 8. 수처작주(隨處作主) 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10. 장난감 집 11. 어머니 같은 여자 12. 다시 만행 길에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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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조각 하나까지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텃밭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지만 거센 불길에는 저절로 큰 바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밭을 일구는 것처럼 땅을 뒤집어놓고도 성을 쌓는 것처럼 두렁을 만들어 어떤 경우에도 불길이 번져나가지 않게 했다. 늘 장갑을 끼고 일했는데도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밤마다 바늘로 따내지만 다음날이면 또 그 자리에 그만한 물집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바늘로 찌를 때보다 손톱으로 눌러 짜낼 때마다 작은 통증이 느껴진다. 문득 밭 가운데 둥그렇게 쌓아올리고 있는 나뭇단이 떠오른다. 다비를 위한 것이니 다비단(茶毘壇)이 맞겠지만 이번 생(今生)에서 다음 생(來生)으로 건너가는 다비단에 그럴 듯한 이름 하나쯤 붙여도 좋을 것 같다.
능파대(凌波臺)! 태안사 산문으로 들어서는 누각다리를 능파각이라고 한다. 불태워질 나뭇단에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은 끝내 이판(理判)이 아니라 사판(事判)일 수밖에 없는 자의 버릇이겠지만 스스로 혼자서 누릴 수밖에 없는 호사라면 그리 나쁠 것도 없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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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각’은 작가가 밝히는 대로 여백이 많은 동양화처럼 고추장 없는 비빔밥 같은 소설이다. 작가는 구도소설―求道보다는 救援으로 써야겠지만 기독교의 구원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므로―을 염두에 두기도 했을 것이지만 작중 인물 그 누구도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한말씀 듣거나 이런저런 선문답禪問答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절집을 드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헤맨 한 보살을 통해 스님들 역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인간에게 과연 구원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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