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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해 쓰기
Ⅰ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터널과 터널 /우체국에 가려면 /직육면체 /동쪽과 서쪽 /접힌 하루 /잠깐 /일요일 아침의 창문 /정글짐이 있는 곳 /개와 늑대의 시간 /저녁의 감자수프 /일월의 발 /읽는 동안 /오늘 /저녁으로 가야겠다 Ⅱ 형식을 내놔 형식 /모더니스트의 발 /핫케이크 열다섯 장 /의자의 뿔 /밤 /파랑 /분홍 /친구의 친구들 /부등식 /가련해지는 이야기 /끝의 성격 /거짓말 /먼지의 도리 /집의 크기 /낙엽들의 방 Ⅲ 돌고래라니 매끄럽고 보드라운 검정 /돌고래라니 /내일에서 돌아온다 Ⅳ #문단_내_성폭력 참고문헌 없음 /단일한 겨울 /망명지 /걷는다 빛났다 /손가락과 흰콩 /약속 /홀과 힐 /쳇, 절뚝 /#문단_내_성폭력 /단어의 삶 /크래커처럼 /캐비닛 시간표 /밤과 밤 /부분과 연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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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
끝없이 흔들리는 내면의 초상 나는 돌의 몸이 되었다가#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운동 이후 씌어진 시에서 화자는 “돌의 몸”에서 “까마귀”로 거기서 다시 “희미한 경고음”이 되었다가, 결국엔 “침묵”에 이른다. 딱딱하게 굳은 상태의 몸이었다가 모든 이에게 다 들리도록 울어대는 새였다가, 결국은 분노를 품은 채 침묵하는 방식으로 몸의 형태와 발화의 방식을 여러 차례 바꾼다. 이뿐만이 아니다. 압축적으로 간결한 장면들을 만들어내던 그간의 창작법을 멀리 둔 채 “좋아하던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한 믿음이 부서졌다. 어떤 비유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며 “입이 사라졌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문단_내_성폭력」)라고 산문의 문법을 빌려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성미의 시가 변하려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말한다. “저는 방향이 제일 어렵습니다”. 오래 믿어왔던 것이 산산이 부서졌을 때 누구나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겪곤 한다.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배열”(「부분과 연결」)을 만들기 위해서 시인의 방황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너무 많은 단어들을 잃어”(「손가락과 흰콩」)버렸을 때엔 다시 단어들을 찾아낼 만큼의 시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이성미의 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2016년 10월 이후 문단 전체의 숙제로 남겨진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진행 중일 시인의 고민의 흔적이다. 계속되는 ‘오늘’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화자 오늘을 사는 사람의 작고 단단한 안부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우리는 앞서 이 시집에서 드러난 시적 화자의 고민과 혼란에 대해 얘기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이성미가 유지해오던 시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다수의 시편에서 시인이 오래 고민해온 추상적인 것들의 물질화, 특히 시간을 형체가 있는 물체로 다루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우체국에 가려면」에서 화자는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라고 다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체국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어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지나면 우체국도 “하루만큼 더 먼 쪽으로” 이동한다. 내 하루의 길이만큼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딱 그 정도의 거리만큼 이동하는 것이 우체국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우체국을 ‘내일’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에서 하루가 더 지난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내일이니 말이다. 바로 여기서 시적 화자가 느끼는 낯설고 납득하기 어려운 느낌이 배가된다. ‘내일’을 ‘우체국’처럼 공간성을 가진 특정한 자리라고 본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내일’이라는 자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위치하는 자리는 늘 ‘오늘’ 이곳이다. 하루가 지났으면 내가 기대하던 ‘내일’이라는 곳에 도착해야 하는데, 여전히 나는 ‘오늘’에 머문다. 여기서 ‘오늘’이 계속해서 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허망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들이 차례차례 덧붙어 “긴 피리”처럼 이어지는 것, 좀더 멀리 길어지는 “투명한 길”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향한 지나친 낙관을 지운 채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부터 오늘의 나를 살아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성미의 지난 시집 『칠 일이 지나고 오늘』에서 시인은 ‘파란 바통’이라고 이름 붙인 ‘오늘’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보내는 ‘이어달리기’의 형태로 이미지화해낸 바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시 「부분과 연결」에서 다시 한번 이 이어달리기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손에서 손으로” ‘오늘’이라는 바통을 전한다. 이번엔 “붉고 작고 단단한 안부”와 함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