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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연월일(年月日) 옮긴이의 말 |
Yan Lianke,閻連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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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일흔두 살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처럼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 p.21 “영원히 죽지 않는 해야. 착한 개의 두 눈을 멀게 하다니, 넌 정말 지독하게 잔인하고 못된 놈이야!” 개가 눈이 멀게 된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셴 할아버지는 무언가에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개를 품에 껴안고 두 눈을 어루만졌다. 뜻밖에도 개의 눈물은 샘물처럼 할아버지의 손을 적셨다. --- p.32 고요한 밤에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는 가늘고 파릇파릇했다. 깊이 잠든 아기의 숨소리 같았다. 그럴 때면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옥수수 줄기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땅을 파느라 지친 몸을 쉬면서 옥수수의 호흡에 귀를 기울였다. --- p.43 셴 할아버지는 이 황무하고 인적 없는 산맥에 옥수수 종자를 파종하는 풍경을 상상했다. 수확한 옥수수 가운데 한 그릇 정도를 종자로 남겼다가 가뭄이 물러가고 비가 내려 세상 밖으로 나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면 계절에 계절을 이어가며 옥수수씨를 뿌려 이 산맥이 또다시 왕성하게 성장한 옥수수의 푸른 세계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죽은 뒤에 마을 사람들이 무덤 앞에 공덕비를 세워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셴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정말 공덕이 무량한 사람이야.” --- p.62 눈먼 개는 갈대 돗자리 위에 한 무더기 부드러운 진흙처럼 엎드려 있었다. 셴 할아버지가 개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안아보았다. 개의 뱃가죽이 늑골에 걸려 있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튀어나온 늑골이 칼처럼 할아버지의 손을 찔렀다. --- p.80 셴 할아버지는 혼자 산등성이로 올라가 저울로 나날이 늘어나는 햇빛의 무게를 잰 다음, 혼자 산꼭대기에 서서 날카롭고 잔인한 햇빛을 바라보며 문득 한 가닥 가느다란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싹이 트자마자 삽시간에 거대한 수풀을 이루었고, 이내 온 천지를 뒤덮을 정도로 창궐했다. --- p.142 “죽고 사는 건 운명에 맡기자꾸나. 내가 이 동전을 하늘에 던지마. 동전이 땅에 떨어졌을 때 글자가 있는 거친 면이 나오면 네가 나를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고 그림이 있는 면이 나오면 내가 널 이 무덤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는 걸로 하자꾸나.” --- p.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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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개는 서로의 목숨을 의지하는
따스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인과 눈먼 개 그리고 옥수수 씨앗 하나로 일궈낸 인간과 자연, 생명이 어우러진 소우주적 세계 『연월일』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한 노인과 눈먼 개의 생존과 인내를 다룬 강력한 우화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난 척박한 땅에서 하나 남은 옥수수 이삭을 지키며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견뎌낸다. 특히 혼자 남은 셴 할아버지 곁을 끝까지 지키는 눈먼 개의 사연은 이 작품의 비극성을 한층 더한다. 비를 기원하는 제단에 묶인 채 하늘을 향해 보름 동안 울부짖다 끝내 두 눈이 멀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해야. 착한 개의 두 눈을 멀게 하다니, 넌 정말 지독하게 잔인하고 못된 놈이야!” (32쪽) 그렇게 셴 노인과 눈먼 개는 가뭄이 물러가고 비가 내려 세상 밖으로 떠났던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면 “계절에 계절을 이어가며 옥수수씨를 뿌려 이 산맥이 또다시 왕성하게 성장한 옥수수의 푸른 세계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62쪽)하며, 그 무엇보다도 연약한 옥수수 이삭을 지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재난에 맞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투쟁을 그리거나 그 결과로서의 승패를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옌롄커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 김애란의 공동 인터뷰에서 “결국 인간이 이기기는 하지만, 크게 이기는 게 아니라 바둑으로 치면 딱 반집으로 이기는 모습이 감동적이다”(김애란 소설가)라고 말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가 자신들보다 더 무력한 옥수수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어쩌면 자기가 먼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비극적인 운명마저도 받아들이는 숭고한 태도에 있다. 이처럼 셴 노인과 눈먼 개가 이루는 세계는 인간과 자연,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진 작은 우주이며, 그들이 끝내 지켜내고자 하는 옥수수 이삭은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상징한다. 일곱 알만이 하늘의 별처럼 드문드문 잿빛으로 바짝 마른 알갱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눈부시게 푸르른 별 일곱 개가 떠 있는 것 같았다. (175쪽) “산맥이 또다시 왕성하게 성장한 옥수수의 푸른 세계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다움의 조건을 묻는 지금 다시 읽혀야 할 이야기 “노인 하나와 눈먼 개 한 마리, 옥수수 한 그루가 주인공이 되어 소설의 시작과 끝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창조력이자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김태성, 「옮긴이의 말」)라는 찬사처럼, 이 작품은 단순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의미의 확장과 깊이만큼은 어떤 대작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연월일』은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옌롄커 문학 세계의 핵심적 특징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환상적 요소, 그리고 그 허구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해내는 작가 특유의 상징과 시적이라 할 만큼 은유적이고 리듬감 있는 문체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자연재해, 감염병, 전쟁 등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일상화된 시대에,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연월일』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적 우화라 할 수 있다. 감동과 위로를 넘어 삶의 태도까지 변화시키는 이 작품은, 단연 강렬한 울림을 전한다. 작가의 말 인류의 종말이 다가와 이 세상에 사람 하나와 씨앗 한 알만 남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바로 그 순간, 나는 황혼의 햇빛 속에서 옥수수밭 끝이 해를 향해 환하게 밝아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빛은 춤을 추듯이 움직이며 세상 전체를 달콤함에 빠지게 했다. 세상이 빨간 비단과 파란 비단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