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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PART + 01 흙냄새 나는 소년의 꿈 진저리 나도록 그리운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아카시아 향기 속으로 5원짜리 도화지 한 장 검정 고무신과 중학교 첫날의 기억 그 가을, 월출산으로의 행군 야간 수업, 별빛 고백, 그리고 한 뼘 늦은 사랑 자취방 담 너머 선생님, 그리고 우리들의 짧은 방황 사춘기, 그리고 떠들썩한 진실 장날의 기억, 아버지의 유산 말이 없어 더 깊은 사이, 우리 형제 이야기 술 한 잔의 철학 PART + 02 군복 입은 청춘 양구에서 시작된 나의 인생 계획표 짜장면이 된 사나이 편지로 사랑을 부치다 면장 파일 20권의 사랑 이야기 공부에 대한 목마른 외침 동틀 무렵, 거짓 전쟁은 사라졌다 내 청춘의 훈장, 군 복무의 보람 권금성에 들려온 청춘 이야기 슬레이트 지붕 아래 따뜻한 봄 PART + 03 공직의 길, 시민을 섬기다 몰랐지만 달렸다, 그리고 붙었다 물이 흐르듯, 마음도 흐른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어느 날 어떤 공무원이 싫은가 아름다운 시간,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 그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비서, 그곳은 또 다른 전선이었다 수박주를 아시나요 6년 만의 6급, 그 치열했던 나의 도전기 눈 오는 날, 술 마신 그녀 인생은 건강이 허락한 만큼만 펼쳐진다 나를 돌아보게 한 6개월, 그리고 그 이후 공평한 빗자루, 균형을 쓸다 맨땅에 헤딩, 그 끝엔 도시가 숨 쉬었다 승진의 언저리에서 남항 황무지에 피운 꽃길 조용한 호수 아래, 흐르던 것들 유배지에서 피어난 생각 중간에 선 사람의 고백 공무원의 그림자 제약 속에서도, 나만의 길을 걷다 새벽을 삼킨 사람, 그리고 그날의 포옹 마음을 여는 데는 나이도 벽도 없었다 귀 기울이는 리더 유달동의 숨은 별 웃음이 지붕처럼 덮이던 곳 인사국장이 되던 날 PART + 04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승진, … 책임의 무게를 늘리는 것 계단 앞에 선 나, 그리고 우리 간과 쓸개는 냉장고에 두고 결재란 방향을 정하는 일 보고는 마음을 담는 기술이 보고서 위에 피어난 한숨 한 줄기 5초짜리 보고서의 힘 중간 관리자의 자리에서, 나는 묻는다 조용해지는 저녁, 화기애애해지는 점심 자기 관리, 공무원의 가장 강력한 무기 배움, 의무가 아닌 축복 여권 속의 배움, 세계 속의 공무원 “책임이요? 그거 제 담당 아니에요.”라는 유혹 술은 참 좋은데, 가끔 무섭다 책상보다 현장이 더 잘 맞는다는 고백 겸손이라는 이름의 거울 앞에서 마음이 먼저 일을 만든다 기록의 무게, 나의 시간들 부러움이 지나간 자리 바람은 불지만, 나는 선다 아침 루틴, 건강한 삶 9급에서 4급 서기관까지 34년 공무원 인생을 돌아보며 PART + 05 내일을 향한 씨앗 이제 난 자연인입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 끝엔, 가족이 함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가 건강하게 시작해서, 건강하게 마무리 인생은 정년이 없다. 오늘도 다시 출근한다 관계에서 시작되어, 관계로 완성되는 삶 인생 2막, 함께 걷는 친구 그리고 되돌려 주는 삶 사람 냄새, 그리운 후배들 두 바퀴 위의 사색 사람 속에서 나를 만나다 그림자처럼, 너의 뒤에서 나는 자랑스러운 딸 바보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붙잡아야 할 사람들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시민의 공복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복도통신, 그리고 인사 인사이동이라는 이름의 계절 공직, 거대한 산속에서 나를 세우다 세 번의 이사, 세 대의 자동차 나를 키워 준 사람들 은퇴 후, 또 다른 시작을 위해 가난으로부터 배우다 비 오는 날 이사 가면 잘 산대 후배들에게 전하는 격려의 말 공무원 조직에서 지켜야 할 기본 에티켓 후배들에게 전하는 술자리 3계명 사람 사이, 조직이라는 숲에서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 우리의 공동체 말 없는 사랑의 경륜 ‘적당히’의 미학 밥 한 끼, 술 한 잔의 무게 민선의 이름으로 피어난 그림자 정치가 흔들어도, 행정이 지켜야 한다 신뢰라는 이름의 무게 부록 사진으로 보는 나의 공직 인생 고지를 넘으며, 나를 위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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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돌이켜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놀이나 친구가 아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책가방을 내려놓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집안일에 매달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참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버겁고 서운했던지. 내 또래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맘껏 놀았다.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숨바꼭질을 했다. 세상이 온통 놀이터였던 그 시절, 나는 그런 풍경을 멀리서 바라만 보곤 했다. 우리 집은 항상 일이 넘쳐났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소 꼴베기, 밭매기, 논매기… 어려서부터 농사일이 곧 내 삶의 일부였다. 손에 호미가 익숙했고, 발에 흙이 묻는 건 당연했다. 비 오면 비 맞으며 논두렁을 걸었고, 가뭄이 들면 두레박으로 물을 날랐다. 참 많이도 일했다. 그래서일까? ‘농사’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진저리가 난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농기구만 보면 어린 시절의 고된 기억이 되살아난다.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묵묵히 일했을까?” 아마도 그건, 힘들다고 말할 겨를도 없었던 삶이었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고, 그게 곧 ‘살아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리라. 어린 마음에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언제부턴가 내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렸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삶의 한 고개를 넘어 ‘퇴직’이라는 또 다른 이정표 앞에 선 지금, 그 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은 다른 색깔로 떠오른다. 그때는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리운 풍경으로 느껴진다. 흙 묻은 손, 땀으로 젖은 옷, 논두렁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던 그 눈빛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단단한 밑거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힘들었지만 소중했던 시절. 진저리 나던 그 기억들이 어느덧 마음 한구석에서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 「진저리 나도록 그리운 어린 시절」 중에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지금 돌아봐도 유난히 애틋하다. 가방 하나 없이 책보를 들고 학교를 오가던 그 시절.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친구들처럼 새 옷을 입는 건 사치였고, 운동화 대신 해어진 고무신을 꿰매 신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만은 늘 풍성했다. 가난했지만 초라하지 않았고, 없는 게 많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매일 아침 작은 가슴에 결심을 품고 학교로 향했다.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라는 어린 마음의 의지로 6년 내내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고, 우등상도 꾸준히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상장을 품에 안고 들어갈 때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세상 어떤 보석보다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꼭 안아 주시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부는 내게 생존이었고, 어머니께는 희망이었다. 얼마 전에 방여되었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자꾸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도, 그 시절의 내가 그 속에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의 아이들처럼 나도 웃고, 참았고, 가끔은 울었다. 가난이라는 단어는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불평 대신 책임을 배웠고, 포기 대신 꾸준함을 익혔다. ---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중에서 5월은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 불린다. 바람은 부드럽고, 햇살은 따뜻하며, 자연은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나에게 있어 5월은 그저 아름다운 계절을 넘어, 어린 시절의 향기와 추억이 깃든 시간이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는 이맘때면 산과 들에 아까시꽃이 흐드러지게 피곤 했다. 하얀 꽃잎이 가지마다 수북이 매달리고, 어디서든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들판을 뛰놀며 아까시꽃을 따 먹기도 했고, 꽃잎을 손에 모아 바람에 날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향기를 맡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도시화된 풍경 속에서 아까시 나무도, 사람들의 맑은 웃음도 사라져 버린 듯하다. 가끔은 그 향기가 그리워 일부러 산책길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어린 날의 그 감동은 쉽게 다시 오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그리움은 나이 들어간다는 자연스러운 신호일 것이다. 흐르는 세월에 삶이 닳아 갈수록, 사람은 본능적으로 따뜻했던 기억을 더 자주 꺼내 본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그때의 세상을 애틋하게 떠올리게 된다. 아카시아 향기는 내 유년 시절의 배경 음악과도 같았다. 그 향기를 맡으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그리움 속에는 웃음도, 눈물도, 순수했던 마음도 모두 함께 담겨 있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향기만큼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5월이면 어김없이 내 안에서 아카시아의 기억이 피어난다. 그 향기를 따라 오늘도 조용히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간다. --- 「아카시아 향기 속으로」 중에서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나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가끔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조심하게 만드는 일종의 그늘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돈의 가치는 지금과 달랐다. 1원, 5원, 10원짜리 동전이 짤랑거리며 사람들 손을 오가던 시절.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그 동전의 무게가,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술 시간은 나에게 늘 난감한 시간이었다. 스케치북은 꿈이었고, 도화지 한 장도 사치였다. 크레파스는 교실 친구들만의 물건이었다. 늘 연필 하나로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려 애썼다. 어느 날, 선생님이 “다음 시간엔 도화지를 꼭 가져오라.” 하셨다. 그날 밤, “엄마, 내일 도화지 사야 해요. 5원만 주세요.”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그 5원을 빌리기 위해 이웃집 문을 두드리셨고, 얼마 후, 어머니는 손에 작은 동전을 쥔 채 돌아오셨다. 그 손엔 세상의 모든 무게가 실려 있는 듯했다. 그 손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세상은 너무도 풍족해졌다. 아이들은 스케치북도, 크레파스도, 색연필도 넘치도록 가진다. 하지만 가끔 그 5원짜리 도화지 한 장을 떠올린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그림 재료였다. 가난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문을 두드리던 어머니의 용기, 그 따뜻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도화지였으니까. --- 「5원짜리 도화지 한 장」 중에서 나는 열 명의 형제 중 일곱째였다. 누나들은 학교 대신 논밭으로 갔고, 형들은 책 대신 삽을 들었다. 그 속에서 나만은, 뭔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싶다가도 아니, 그냥 학교라도 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었다. 그전까지는 검정 고무신, 비 오면 안에 물이 고이고, 흙길을 걸으면 발바닥에 감촉이 생생했던 신발을 신었다. 그걸 벗고 운동화를 신었다는 건… 나에겐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머리는 마치 절간에서 갓 나온 스님 같았고, 교복은 동네 형이 입던 걸 물려받아서 엄마가 밤새 수선해 주신 ‘맞지 않는 맞춤복’이었다. 하지만 그날, 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중학생이었다. 눈빛은 누구보다 반짝였고, 심장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두근두근 설레기도 했다. ‘내가 공부란 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나도 교실에 앉아 이름 불릴 수 있나?’ 그런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춤을 췄다. 분명 가난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왜냐고?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검정 고무신과 중학교 첫날의 기억」 중에서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가을 소풍을 떠났다. 그러나 사실은 ‘행군’이란 말이 어울렸다. 아마도 장거리를 걸어야 했던 데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지 않고, 두 다리로 월출산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던 우리. 그날의 하늘은 어찌나 높고 푸르렀던지, 청춘의 마음도 그만큼 벅찼다. 남녀 합반이었던 우리 반은 다른 반 친구들에게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도시락을 나눠 먹고, 콜라 한 모금에도 박수가 터지고, 노래자랑과 장기자랑 시간에는 춤 잘 추는 친구들이 디스코를 췄다. 그 당시 유행하던 김완선, 소방차, 조용필 음악이 그날 우리를 뜨겁게 달궜다. 참, 그 시절이 그립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작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한 여학생 친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다리를 접질렸다. 걷기는커녕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 요즘 같으면 119에 바로 전화했겠지만, 그때는 우리에겐 ‘우정’과 ‘등판’이 있었다. 몇몇 남학생들이 돌아가며 그 친구를 등에 업고 학교까지 걸어왔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처음 업었을 땐 살짝 당황했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 이상하게 어깨가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고, 나는 땀범벅이 된 채 뒤뚱뒤뚱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 체중이 얼마쯤 되었을까? ‘등에선 마음보다 무게가 더 컸던 것 같지는 않다.’ --- 「그 가을, 월출산으로의 행군」 중에서 고등학교 시절, 아직 세상이란 단어를 가슴에 품기에도 버거운, 그런 나이였다. 그날 밤, 교정 위로 별빛이 쏟아졌고, 교실 안은 야간 자율 학습의 지루함으로 숨이 죽어 있었다. 그녀가 나를 부른 건 그때였다. 그건 창문을 두드리는 봄날의 밤바람처럼 조심스럽고 간절한 신호였다. “잠깐 나와 줄래?” 그 목소리 하나에 심장이 이유 없이 뛰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편,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녀는 조심스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너 좋아해. 우리 사귈래?” 그 순간, 세상이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손끝은 얼어붙은 듯 떨렸다. 하지만 어른인 척, 어설프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 아직 어리잖아. 대학 가고, 어른이 된 다음에... 그때 만나자.” 그녀는 잠시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살짝 스친 서운함을, 너무 어렸기에, 너무 겁이 많았기에, 제대로 품어 주지 못했다. 세월은 흘렀고, 그날 밤의 고백은 시간이란 파도에 씻겨 멀어졌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때 그녀의 눈빛이, 가로등 불빛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그리고 혼자서, 웃으며 중얼거린다. ‘에이... 그때 그냥 사귀자고 할걸.’ 별들은 아무 말 없이, 내 웃음소리에 수줍게 반짝인다. --- 「야간 수업, 별빛 고백, 그리고 한 뼘 늦은 사랑」 중에서 고등학교 3학년. ‘미래’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던 그 해,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진학이라는 꿈을 품고, 어린 마음으로 스스로를 고단한 생활 속에 밀어 넣은 첫 독립의 시도였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가난이라는 두 글자는 꿈보다 무거웠기에, 나는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좁은 자취방은 쓸쓸했지만, 그래도 곁에 함께 숨 쉬던 친구들이 있었다. 어깨를 맞부딪치며 장난스레 웃고, 밤마다 서로의 꿈과 불안을 나누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자취방 옆에는 우리 담임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 거의 CCTV 수준의 감시자처럼, “공부 안 하냐?”라는 무언의 눈빛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보내셨다. 어느 날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지만, 머릿속은 숫자 대신 공허한 한숨만 가득했다. 그 틈을 비집고, 함께 자취하던 친구들이 몰래 술을 꺼내 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 잠깐만! 선생님 계시는데...” 속삭였지만 이미 늦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선, 선생님의 눈빛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이게 공부하라고 보낸 놈들이 이 꼴이냐!” 그날, 우리는 술 냄새 가득한 자취방에서 잔소리보다 더 따끔한 ‘진심 어린 걱정’을 배웠다. 눈물로 얼룩진 꾸지람 뒤에 남은 것은 부끄러움과 고마움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날의 창피함과 우정이, 훗날 얼마나 소중한 자양분이 될 지를... --- 「자취방 담 너머 선생님, 그리고 우리들의 짧은 방황」 중에서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남녀합반이었다. 같은 교실에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그 교실에서 내 사춘기는 아주 요란하게 지나갔다. 그 시절 나는 나름 공부 좀 한다라는 말을 들었고, 운 좋게 반장까지 맡게 됐다. 여자애들과 같이 공부하면 학급 분위기가 조용할 줄 알았다. 여학생들은 순한 양처럼 조용하고 다소곳하고 친절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근데 현실은? “선생님! 동호가 오늘도 자기만 잘난 척해요!” “ㅋㅋㅋ 야, 동호야 너 진짜 웃긴다!” 남자애들보다 더 시끄러웠다. 농담도 빵빵 터뜨리고, 그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교실 천장까지 뚫을 기세였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남자나 여자나 똑같구나. 사람 사는 거, 결국 다 비슷비슷하구나.” 근데 그 떠들썩한 소란 속에서, 인간관계를 배우고, 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그게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사춘기였지만 유치하지 않았고, 설렘이 있었지만 무르익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맑은 계절 중 하나였던 것 같다. --- 「사춘기, 그리고 떠들썩한 진실」 중에서 시골 장날은 5일 만에 정확히 돌아왔다. 우리 동네 근처, ‘독천장’. 매월 뒤 자리수가 4일과 9일이면 마을이 들썩이고, 골목마다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가마솥에서 부글부글 끓는 국밥 냄새, 지게에 짐을 진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 돼지 한 마리 팔고 돌아가는 아저씨의 함박웃음, 장터는 삶의 향기로 가득했다. 그 시절, 중·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장터에 서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생선 가게 일을 도우셨다. 남의 가게였고, 일당은 얼마 안 되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생선을 다듬고 나르고, 그 하루 품삯을 쥐고 저녁 무렵 귀가하셨다. 대부분의 장날,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한 채 집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불러 앉혔다. 조금은 무서운 얼굴이었고, 때로는 화난 채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안다. “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그래선 안 된다. 배워야 산다. 그래야 사람 구실하고, 이 가난을 이긴다.” 그것은 술기운에서 나온 휘청이는 말이 아니라 가슴 속에 품은 진심, 가난을 이겨 내지 못한 한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담은 단단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왜 그 말씀을 반복했고, 우리는 그게 왜 그렇게 거칠고 무겁게 느껴졌는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버지가 바랐던 건 큰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단지 ‘내 자식들만은 나보다 나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더 강해졌고, 더 독하게 세상을 버텨 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훈육은 책이 아닌 장터에서 배운 인생 철학이었고, 막걸리 잔에 녹아 있던 가르침이었다. 지금도 ‘독천장’은 열린다. 그 장터의 바람결엔, ‘배워야 산다’는 아버지의 거칠고도 단호한 훈육의 목소리가 잔잔히 부유하고 있다. --- 「장날의 기억, 아버지의 유산-“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그래선 안 된다.”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