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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의 근대 -연관된 아이러니의 세계
2장.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3장. 식민지 근대와 대중사회의 등장 4장. 연대와 배제 - 동아시아민족주의와 지식인 5장. 국체와 국민의 거리 - 탈식민 시기의 '식민주의' 6장. 대중독재론과 한국 민주주의 7장. 교차와 대립 - 박헌영 사상의 위상 8장. 친일과 반일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 일러두기 미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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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론은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식민지의 ‘근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제국주의 지배의 ‘수탈’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식민 지배를 통한 근대화를 부정하는 것도 수탈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근대화도 수탈도 부분적으로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근대 논의의 본질적 의도가 두 논의를 절충하는 데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식민지 근대론은 제국과 식민지를 보는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식민지가 일국적이고 자족적인 정치·경제·사회적인 단위가 아니라 제국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 제국과 식민지는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연관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의 한 축으로 삼는다. 다른 하나의 축은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를 구성한다거나 ‘친일파’를 ‘청산’한다고 해서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식민지 근대가 탈식민 시대에도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식민지가 지금까지도 ‘현재’ 속에 살아 있다면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p. 6 책머리에에서 이는 식민지는 말 그대로 제국에 종속된 ‘식민지’이지, 하나의 독립적인 정치적ㆍ경제적 단위로 사고하거나 분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지 조선이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지시하는 정책적 슬로건은 많다. 그것을 세 가지 수준에서 나열해보자. 먼저 식민 본국 일본과 조선의 상호연관을 보여주는 슬로건으로는 내선융화(內鮮融化), 내선융합(內鮮融合),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있다. 두 번째로 일본과 조선을 포함하여 여타 식민지를 포괄하는 것으로는 일선만(日鮮滿) 블록,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등의 슬로건이 있다. 세 번째로는 식민지 간의 연관을 표현하는 것으로 선만일체(鮮滿一體), 선만지일체(鮮滿支一體), 만몽일여(滿蒙一如) 등이 있다. 이들 슬로건은 주로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장되면서 제기된 정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식민지 조선이 제국 또는 식민지 상호 간의 연관된 세계의 일환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드러내준다. ---p. 34, 나의 근대-연관된 아이러니의 세계에서 해방 이후 남한의 대통령 중 두 사람이 만주국에서 군인과 관료로 일했던 사람이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 장교로 근무한 박정희와 만주국 관리양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으로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던 최규하가 바로 그들이다. 비단 박정희와 최규하만이 아니라, 한국의 관료ㆍ군부ㆍ재계ㆍ학계 등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다수가 만주국 출신이 아니던가? 대개 그들의 공식적인 이력 가운데에는 만주국에서의 활동경력이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남한을 이끌었던 지도층과 남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만주(또는 만주국) 경험을 연관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총동원 체제하의 조선에서든 계획경제가 추진되었던 만주에서든, 그 속에서 전쟁 시기를 보낸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통제’와 ‘계획’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었을 터이다. 1950년대의 전후 부흥의 과정에서든 1960년대 경제성장의 과정에서든, 그들이 ‘통제를 통한 계획경제’라는 성장정책의 원형을 과거의 경험에서 떠올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주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제국과 식민지가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라는 일방적 관계만을 맺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제국은 식민지에 그리고 식민지는 제국에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하나의 식민지와 다른 하나의 식민지도 상호 연관된 세계로 묶여 있었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는 잡종성(hybrid)으로 표현되며, ‘식민지 근대’가 잡종화할 운명은 ‘제국주의 근대’(일본)의 잡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 근대’의 잡종성은 근대의 역사적 특성을 구성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를 새롭게 구성해야만 역사 연구에서의 민족주의적 단순구도와 제국주의적 단순구도를 상호 해방할 수 있지 않을까? ---p. 35~36, 나의 근대-연관된 아이러니의 세계에서 일제 지배 하의 ‘수탈’이란 무엇인가? 근대화와 차별화가 동시적으로 발현하는 상황을 수탈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바로 ‘규율권력’의 이중성을 말한다. 식민지배 하에서 미시적인 생체권력은 지속적으로 작동하였다. 이는 욕망과 규율화의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국민국가의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대상으로서 교육과 징병은 일제하 조선에서도 잘 작동하고 있었다. 식민지 회색지대가 근거하는 지점은 바로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곳이다. 식민지 회색지대라는 개념은 이항대립의 도식 속에서 말소되어 버린 식민지배 하의 일상생활이 작동하는 광범한 지대를 복구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지, 말 그대로 생활의 회색지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식민지 공공성’이란 개념은 식민지기 저항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근대 사회가 분화하면서 근대적 ‘공공영역’이라는 문제 영역이 부상한다. 그 이유는 공공성의 체현자로서의 국가의 공권력이 사적 영역을 장악해가는 과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권력에 의해 회수되지 않는 ‘공적영역’의 존재는 중요하다. 식민지배하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공적 영역’이 존재하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식민지기 저항의 의미를 새로이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p.53~56,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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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글 「나의 근대 -연관된 아이러니의 세계」는 식민지 근대에 관한 지은이의 상념을 자연스레 풀어쓴 에세이이다. 이 글을 통하여 책 전체의 문제의식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장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는 부산대학교 곽차섭 교수가 주도하는 ‘담론모임’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아 행한 강연이다. 《식민지의 회색지대》에서 전개한 문제 의식을 집약하고 이를 식민지 근대라는 새로운 전망과 연결한 글이다. 식민지 근대라는 문제의식은 2000년 ‘비판과 연대를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이라는 한일 지식인 연대 기구에 참가하면서부터 계발되었다. 3장 「식민지 근대와 대중사회의 등장」은 동아시아역사포럼에서 발표한 것으로, 식민지 근대에 관한 문제의식을 집약한 글이다. 4장 「연대와 배제 - 동아시아민족주의와 지식인」은 동아시아 차원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던가를 지식인을 매개로 살펴본 글이다. 식민지 근대가 동아시아를 관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5장 「국체와 국민의 거리」는 19세기 후반 일본 천황제국가 수립을 위한 교육 장전으로 기능하였던 ‘교육칙어’와 박정희 정권기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을 비교ㆍ분석한 글인데, 역사문제연구소 심포지엄에서 2005년 발표한 것이다. 6장 「대중독재론과 한국 민주주의」는 대중독재를 주제로 한 한양대학교의 심포지엄에서 2006년 발표한 글이다. 박정희의 독재는 한국 자유주의의 실패를 기반으로 삼아 민주주의를 볼모로 성립하였다고 본다. 5장과 6장은 식민지 근대의 통시적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장 「교차와 대립 - 박헌영 사상의 위상」은 ‘한국 근대 사상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시도이다. 좌파의 사상을 한국 근대 사상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박헌영의 사회주의 사상을 부르주아민족주의 사상과의 ‘교차’와 ‘대립’이라는 두 개의 매개항을 통해 해석한 글이다. 8장 「친일과 반일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 역시 ‘한국 근대 사상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시도이다. 식민지기의 친일ㆍ협력 행위를 ‘책임’이라는 덕목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친일-반일이라는 이항대립의 도덕적 단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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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란 무엇인가
윤해동의 문제의식은 식민지 근대 논의의 본질은 근대화나 수탈의 개념으로는 더 이상 식민지배의 성격과 피식민 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식민지 근대론은 제국과 식민지를 보는 대안적 시각을 제시한다. 그것은 식민지가 일국적이고 자족적인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단위가 아니라 제국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제국과 식민지는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연관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의 한 축으로 삼는다. 이는 식민지 근대가 제국과 식민지를 관통하는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식민지 이해의 ‘횡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의 축은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를 구성한다거나 ‘친일파’를 ‘청산’한다고 해서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둔다. 이는 식민지 근대가 탈식민시대에도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를 식민지 이해의 ‘종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가 지금까지도 ‘현재’ 속에 살아있다면,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식민 지배를 통해 형성된 ‘근대’를 보는 시각이 현재적 삶을 구성하고 있다면, 그런 시각을 벗어나는 길만이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식민지 인식에서의 ‘회색지대’와 ‘식민지 공공성’ 식민지 근대를 향한 출발은 식민지 인식의 ‘회색지대’와 ‘식민지 공공성’론이다. 이는 수탈과 저항, 지배와 개발로 대표되는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적 기반이 처한 궁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궁지로부터의 탈출은 이른바 ‘친일파 청산’ 논의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민족’ 또는 ‘근대민족주의’ 이해와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 역사학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둘러싼 위기국면에서 서구 근대 역사학을 수용함으로써 체계화되기 시작하였고, 해방 후에 식민사학의 극복을 내세운 ‘내재적 발전론’으로 그 논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적 대상 시기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 논리를 구체화한다. 식민지시기에는 이른바 ‘수탈론’으로 그 논리적 외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의 대항논리로 제시된 ‘식민지 근대화론’은 수탈론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으로 비판되어 왔지만, 오히려 그 논리적 기반의 동질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추구되는 ‘발전의 논리’라는 점이다.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 근대의 잡종성 윤해동은 한국에서 식민지 근대가 드러나는 면모를 공시적인 측면과 통시적인 측면으로 나눈다. 식민지 근대의 공시적 측면은 제국과 식민지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연관이라는 점을 통해 살피고, 통시적 측면은 식민지배 효과의 연속성이라는 점을 통해 접근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동일화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슬로건은 ‘내지연장’(內地延長)이었다. 내지연장이라는 정책적 기조는 기본적으로 내지(곧 제국주의 본국인 일본)에서 실험된 근대화 정책들을 식민지에서도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근대의 세례를 전면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물론 헛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으로부터 근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근대가 어떤 근대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 근대화는 자본주의 산업화의 달성, 근대국가의 건설, 제국주의의 실현이었다. 이를 이용하여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를 수행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해명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두 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식민지에 ‘내지’의 정책이 연장될 때 그 정책이 그대로 식민지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근대적 정책에 대한 식민지의 저항도 문제가 되지만, 식민지는 일본과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서의 정책은 실험적 성격을 가진다. 식민지에 적용해서 효과를 본 정책은 일본으로 역수출되기도 했다. 따라서 제국과 식민지는 내지연장을 매개로 상호 작용하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실험실로서 ‘만주’를 주목하다 그는 ‘만주’를 주목했다. 최근 만주국의 국가적 자율성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제국주의와 냉전으로 형성된 이른바 위성국가(satellite state)보다도 만주국의 국가 자율성이 높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만주국의 괴뢰국가로서의 성격도 간단히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는 실제로 각종 정책의 실험실이 되었다. 만철(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사회경제 정책을 개발했던 좌파 이데올로그들뿐만 아니라,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관료들이 만주국으로 파견되어 각종 사회정책의 ‘실험’에 종사하게 되었다. 만주에서의 경제 실험은 전후 일본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런 점에서 만주는 실험실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었던 것이다. 만주 붐은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도 실현되었다. 조선인들은 만주국으로 진출하여 한몫을 ‘챙기고자’ 하였다. 조선인 자본가들에게 만주국은 매우 매력적인 시장으로 떠올랐다. 오족협화(五族協和) 곧 만주인, 한인(漢人), 몽골인, 일본인, 조선인의 협화(協和)를 내세웠던 만주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다음의 ‘이등국민’(二等國民)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다수의 조선인들은 만주국의 군인·경찰·관료로 근무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조선인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