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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도리사 여정을 시작하며 신라 최초의 우리 절, 태조산 도리사 9경 1장. 잠든 1,600년을 깨우다: 신라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 도리사 신이한 꿈으로 찾아낸 통일신라의 아름다움_세존사리탑과 금동사리기 신라불교 1,600년 역사를 세상에 다시 드러내다_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 한량없는 티끌 세계 참 진리가 관통하네_태조선원 • 고통에서 깨달음을 키운 분 이야기는 모여 의미가 되고_옛글이 전하는 아도 화상과 도리사 잊혀진 독립운동가_김경환 스님 •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불교입니다 2장. 복숭아꽃 속에 깃든 천년의 시작: 신라와 불교 인연 고구려 스님, 신라불교를 일으키다_아도 화상 아도와 묵호자를 환대한 그 사람_모례 부처님 법의 물결이 오래도록 흐를 땅_경주로 전해진 불교 • ‘온몸’으로 ‘동시’에 3장. 낙동강 물길 따라 피어난 미소: 구미와 불교 인연 수려한 산세, 빛나는 자취_금오산의 불교 통일신라의 불국토를 증언하다_구미의 탑 천 개의 강을 비추는 달빛처럼 왕건, 후삼국을 통일하다_일리천 전투 불교와 벗했던 백이숙제_야은 길재 • 도로 아미타불 부록 절대 고독을 위로하는 따뜻한 공간_도리사 시민치유선센터 도리사의 주말, 좋지 아니한가?_도리사 템플스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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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가여래의 사리 봉안 용기인 금동사리기(金銅舍利器)다. 도리사 금동사리기는 1743년에 건립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안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1977년에 이 탑을 이운하는 과정에서 수습되었다.
--- p.33 진신사리는 석가여래 열반 이후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불교의 중국 전래와 함께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 건립은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불교를 수용한 모든 국가에서 중요시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 스님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울주 태화사 탑 등 세 곳에 나누어 안치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통도사 금강계단의 진신사리다. 도리사 금동사리기 안에 전래되어 온 진신사리는 발견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 p.37 “당시 주지스님이 진신사리가 모셔졌던 부도를 경내로 옮기기로 했는데, 사리가 출토하는 현몽을 꾸었어요. 내심 기대를 하며 부도를 옮기기 시작했는데, 사리탑 밑에 구멍은 보이는데 비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낙심하던 차, 석공이 구멍 안에서 소리가 울린다고 소리치는 거예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던 거죠. 그곳에서 금동사리함이 쑥 빠졌습니다.” --- p.47 태조선원은 단순한 선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성철 스님이 8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파계사 성전암(聖殿庵), ‘1,000명이 도(道)를 얻을 곳[千人得道地]’이라는 비슬산 도성암(道成庵), 흘러가는 ‘상서로운 구름’처럼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은해사 운부암(雲浮庵)과 함께 ‘영남 4대 도량’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중에도 태조선원에 붙여진 ‘제일도리(第一桃李)’라는 특별한 별칭은 이곳이 수행 환경은 물론 스승과 제자 등 모든 대중이 수승했던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 p.57 1930~40년대 태조선원의 일과는 매우 엄격했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예불을 올리고, 좌선에 들어갔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참선과 함께 행선(行禪), 운력(雲力) 등이 이어졌다. 특히 안거 기간 중에는 더욱 엄격한 청규가 적용되어, 묵언을 기본으로 하고 외출도 금지되었다. --- p.58 조선시대의 문신 김윤안(金允安, 1562~1620)은 「도리사시동유제군(桃李寺示同遊諸君)」이라는 시를 지었다. 아마도 김윤안은 여러 벗들과 함께 도리사를 방문했던 모양이다. 이 시에서 그는 도리사를 신선이 노니는 선계(仙界)에 비유한다. --- p.81 일제강점기에 불교계가 추진했던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김경환은 3・1운동에 이어 독립 전쟁으로 노선을 전환해 나갔던 불교계 독립운동의 사례를 보여 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김경환이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불교계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장했고, 그럼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을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p.91 우리는 모두 인드라망과 같은 이 끝없는 연기의 그물을 이루는 매듭입니다. 이 그물 안에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은 남김없이 인과(因果)의 파동이 되어 그물 전체로 퍼져 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듭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불교는 결국 내가 내 삶의 주인인 동시에 세계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이 광대무변한 인연의 밭을 정성스럽게 일구는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93 아도 화상이 신라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의 신령함과 기이함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무렵 신라의 공주가 병에 걸리자 왕은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의원을 수소문하게 했다. 이에 한 관리가 “우리 집에 한 화상이 있는데 도를 알고 신통하며 못하는 것이 없다”는 모례의 말을 들은 후 그 이야기를 왕에게 전했다. 왕이 그 화상, 즉 아도 화상을 청하여 병의 증세에 대해 말했고, 아도는 병을 치료한 후 자신에게 천경림(天鏡林)을 달라고 했다. --- p.112 모례는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아도, 아두, 혹은 묵호자로 불리는 고구려 전법승을 맞이하여 숨겨 주었다. 모례의 집에서 지냈던 아도의 흔적은 ‘양천골’과 ‘소천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는데, 이 지명들은 아도가 모례의 집에 머슴으로 위장하여 살면서 천 마리의 양과 소를 돌보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모례의 집은 신라불교의 초전지이자 포교의 중심 무대였다. --- p.125 신라에 불교를 전하고자 했던 이들은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坵玼)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나 묵호자, 아도, 아두 등이 모례의 집에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는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구미에서 시작된 신라불교는 마침내 경주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p.127 산 중턱에 자리한 해운사까지는 케이블카를 타도 좋고 걸어서 갈 수도 있다. 산새 소리를 들으며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사찰 터의 지형을 고려하여 세운 해운사 일주문의 모습이 정겹다. 여기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신발 끈을 고쳐 맨다. 남은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 p.146 탑을 벗어나 탑 뒤편에 자리 잡은 대웅전 앞으로 간다. 그곳에서 탑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깜짝 놀란다. 절 앞으로 마을이 이어지고, 마을 앞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며, 산이 들판을 감싸안았다. 탑과 절은 사람들의 삶터를 지켜보는 곳에, 마을과 이어지는 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삶터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탑을 보며 부처님이 늘 자신을 살펴보고 보호해 준다고 믿지 않았을까? 많은 것이 사라져도 탑은 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 p.166 후삼국 사이에 있었던 최후의 결전은 936년에 있었던 태조 왕건과 후백제 신검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의 배경이 된 곳은 고려와 후백제의 중심부가 아니라 신라의 서울 경주로 들어가는 경로에 있던 구미의 일리천이었다. --- p.179 길재는 1386년에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으나, 고려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이미 기울었음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길재는 38세였던 1390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 72현’과 일부는 은둔을 통해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했는데, 길재도 그중 한 명이었다. --- p.190 첫 만남을 의식한 스님은 자신이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RM과 함께 김천 직지사에서 2박 3일 템플스테이를 했다고 소개했다. 그제야 엄마, 아빠와 아이들 입에서 “와!” 하고 감탄사가 나왔다. 어색한 분위기를 단박에 깬 스님은 자연스럽게 명상으로 안내했다. --- p.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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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욕망의 시대에 찾는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규정하는 요소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어떻게 이식되고 퍼져 나갔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삼국시대를 다루는 1차 사료가 많지 않고, 불교 전래에 대해 알려주는 몇 안 되는 기사들 역시 대개 그 내용이 간략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불교가 전래되던 시기의 이야기가 그나마 더 많이 전해지는 나라는 신라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던 이차돈의 순교는 그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인의 마음을 규정하는 요소로서의 불교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불교는 대개 신라불교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 설화의 주인공들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 대사, 사랑에 빠진 선묘 낭자가 죽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의상 대사,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여인을 자신의 암자에 받아 준 노힐부득, 한 여인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꿈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조신, 눈먼 아이가 다시 빛을 보기를 바라면서 분황사 천수관음보살에게 기도했던 희명(希明) 등이 그들이다. 알고 보면 이들은 모두 신라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남긴 신비롭고 때로는 슬픈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의 마음에 스며들었고, 결국 우리의 마음 그 자체가 되었다. 아도 화상이 창건한 도리사와 그 인근 지역은 이런 신라불교가 싹을 틔웠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은 한국인의 마음이라는 유장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도리사와 그 인근 지역을 그러한 마음의 고향으로서 살펴보는 인문 교양서다. 신라에서 현대까지, 이곳에서 피고 진 불법(佛法)의 꽃들을 살피고 어루만지며, 그 안에 숨 쉬었고 또 숨 쉬고 있는 뜻을 살려 담았다. 「신라불교의 첫 새벽, 도리사」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잠든 1,600년을 깨우다’에서는 도리사에 대해 살펴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던 도리사 금동사리기와 그 금동사리기를 모셨던 세존사리탑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으로, 도리사를 한국의 손꼽히는 수행처로 만들었던 태조선원과 옛글이 전하는 도리사의 모습을 되짚어 본다. 도리사 승려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김경환 스님도 흥미롭게 재조명한다. 2부 ‘복숭아꽃 속에 깃든 천년의 시작’은 아도 화상과 모례, 경주를 무대로 하는 불교 전래기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며 신라불교의 첫 모습을 추적해 본다. 3부 ‘낙동강 물길 따라 피어난 미소’에서는 오늘날의 구미시에 남아 있는 불교 유적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본다. 구미시는 신라시대에는 일선군(一善郡)이라 불렸고, 얼마 전까지는 선산군(善山郡)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모례가 살았고, 아도 화상이 거쳐 갔으며, 도리사를 안고 있는 구미시는 신라불교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금오산에 남아 있는 여러 사찰과 불교 유적, 죽장리 오층석탑과 낙산리 삼층석탑과 주륵사지 폐탑, 사방(砂防) 공사 중에 출토된 금동불상 세 구, 후삼국통일을 마무리 지은 일리천 전투, 고려 말의 충신으로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깊은 교분을 유지했던 야은 길재 등을 통해 구미시와 불교의 깊은 인연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강은 물길을 따라 흘러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강은 주변의 들판을 적시고 또 적시며 언제나 오늘의 생명으로 부활한다. 강만 그런 것일까? 과거의 사람과 이야기도 시간을 따라 흘러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사람과 이야기 역시 우리를 어르고 가르치며 언제나 오늘의 얼로 부활한다. 그 소박하지만 명료한 이치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