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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문화접변이론을 통해 본 화이론(華夷論)과 한화론(漢化論)의 구조와 전략 I. 머리말 II. 문화접변이론: 발생, 과정, 저항 및 전략 1. 문화변화와 문화접변이론의 발생 2. 문화접변의 과정과 저항 3. 문화접변의 결과와 전략 III. 중국식 문화접변이론으로서의 화이론의 구조와 전략 1. 화이론의 발생과 구조: 화이지변(華夷之辨, 夷夏之變) 2. 화이론(이하지변) 관계구조의 분화 1) 이하지방(夷夏之防, 夷夏大防) 2) 이하지변(夷夏之變) 3. 이하지변(夷夏之變)의 실천론으로서의 한화론(漢化論)의 한계와 호화론(胡化論)의 진실 IV. 문화접변이론과 화이론 전략의 비교 및 대비 V. 맺음말: 역사의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fig leaf) 제2부 금대의 문화접변: 여진족의 한화(漢化)인가 한족의 호화(胡化)인가 I. 머리말 1. 문제의식과 연구 목적 2. 연구 동향과 필요성 3. 관련 이론과 접근법 II. 금 시조의 출신과 종족 1. 금 시조 함보 출신에 대한 기존 기록과 연구 2. 금 시조 함보의 종족과 성씨 문제 3. 금 시조 함보 후손 이동로와 금조 발상지 III. 여진족 금조의 한족문화 수용과 저항 1. 태조(太祖)·태종(太宗)의 이원제도(dual institutions) 시기(1115~1135) 2. 희종(熙宗)·해릉왕(海陵王)의 중앙집권(centralization) 시기(1135~1161) 3. 세종(世宗)·장종(章宗)의 토착주의 저항(nativistic reaction) 시기(1161~1208) 4. 위소왕(衛紹王)·선종(宣宗)·애종(哀宗)의 금조 멸망 시기(1208~1234) IV. 여진-한의 문화요소별 문화접변 전략과 결과(내용) 1. 화이론, 문화접변이론 및 중국 학계(한화론자)의 문화요소 분류 및 종류 1) 화이론의 문화요소 분류 및 종류 2) 문화접변이론의 문화요소 분류 및 종류 3) 중국 학계(한화론자)의 문화요소 분류 및 종류 2. 문화접변이론과 여진족 금조의 문화접변 전략 선택 3. 문화요소별 여진-한 문화접변 내용과 전략 1) 표층 문화요소 문화접변 (1) 두발과 복식의 원형 유지와 한인 복식의 여진화: 통합(공생 및 제3문화) (2) 음식 습속 원형 유지와 한인 음차 습속 확산: 통합(공생) (3) 여진족 주택 난방 방식과 한인 주택의 융합: 통합(제3문화) 2) 중층 문화요소 문화접변 (1) 여진문자 창제와 한자(유교) 경전 번역: 통합(공생과 제3문화: 호화(胡化) 한어(漢 語)) (2) 여진 예절의 원형 유지와 한인(漢人)의 호화(胡化): 통합(제3문화) (3) 여진 전통 절일(節日) 습속 유지와 한인 절기 수용: 통합(공생) (4) 천지(天地) 교사(郊祀)와 명산대천 책봉(冊封)의 한제(漢制) 차용: 통합(공생) (5) 공묘(孔廟) 석전(釋奠)과 한족 제왕 합제(合祭): 동화[全盤漢化] (6) 혼인 습속의 다양성과 여진-한 통혼(通婚): 통합(공생) (7) 여진족의 한성(漢姓) 개성(改姓)과 한인에 대한 여진 성씨(姓氏) 사성(賜姓): 통합(공 생) (8) 국가 이데올로기 상징으로서의 덕운(德運) 제정: 동화(미완의 한화) (9) 여진 군사·생산·행정 조직 맹안모극(猛安謀克)의 존속: 분리 (10) 여진 최고 의사결정 기구의 설치와 변화: 통합(제3문화) (11) 이원화 한족 선관제(選官制)에서 탈종족 과거제로의 변화: 통합(제3문화) (12) 여진 관습법과 한족 성문법을 결합한 법령 제정: 통합(제3문화) (13) 여진 교육기관 설치와 한인 고전 사서 여진어 번역본 교육: 격리와 통합 (14) 역법 제정: 통합(제3의 역법) (15) 경제제도의 변화: 통합 (16) 이민정책: 통합, 동화(부분 한화) 및 주변화 병발(竝發) 3) 심층 문화요소 문화접변 (1) 전통 신앙 유지와 한족 신앙 수용: 통합(공생) (2) 전통 음악과 당·발해·송·요 음악: 통합(공존과 제3문화) (3) 속악(俗樂), 산곡(散曲) 및 제궁조(諸宮調) 언어의 변화: 통합(제3문화) V. 여진-한의 문화접변 평가와 실상 1. 금조 한화에 대한 고금의 평가와 그 한계 2. 여진-한의 문화접변의 실체: 고구마 덩굴 현상, 제3문화, 그리고 금조 수명 3. 여진-한의 역문화접변: 한족의 호화(胡化) VI. 맺음말 제3부 현대 중국의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 중국화[漢化]인가 러시아화[俄化]인가 I. 머리말 II. 청말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 1.1860~1890년대 양무론(洋務論)·조기개량론(早期改良論)·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1) 양무론(洋務論) 2) 조기개량론(早期改良論) 3)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2. 1890년대 유신변법 시기의 변법론(變法論) III. 민국 시대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 1. 변법 이후 1900년대~신해혁명 전후의 혁명론과 국수주의 1) 변법파(變法派)의 변화 2) 혁명론(革命論) 3) 국수주의(國粹主義) 2. 1910년대 중반~1920년대의 서화론·동방문화론·공산주의 1) 서화론(西化論) 2) 동방문화론(東方文化論) 3) 공산주의(共産主義) 3. 1920~1930년대의 문화론: 중국본위문화론과 전반서화론 1) 중국본위문화론(中國本位文化論) 2) 전반서화론(全盤西化論) 4. 1930~1940년대의 문화론: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론과 중국식 현대화론 1)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론(中國化論) 2) 중국식(中國式) 현대화론 IV. 인민공화국 시대의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 V.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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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접변 과정의 저항 중 중요한 것은 수용에 대한 저항(유형 I, III)이다. 재래 토착문화의 요소는 문화의 위기에 처한 문화접변으로 상실된 문화의 독립성과 민족적 특성을 재확립하는 데 적격이다. 문화접변에서 수용자 측 문화의 저항이 저항운동이 될 때 그 운동은 외래 문화요소를 버리고 재래 토착의 문화요소를 활성화시켜(부흥시켜) 재이용하는 운동이 된다(히라노 겐이치로, 2004: 137). 이러한 저항운동은 토착주의 운동(nativistic movements)이라 불린다. 복고주의 또는 재활성화(revivalism)의 저항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이나 고립주의 경향에도 토착주의 운동의 성격이 존재한다(히라노 겐이치로, 2004: 137).
--- pp.35-36 한화론에서 한족문화 요소로 제시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가 사상 또는 유학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유가 사상의 어느 내용이, 유가 누구의 사상이, 어느 경전이 중심이고 핵심인지 밝히지 않았다. 유가 사상은 시대에 따라 본질이 변질되었다. 진한 시대의 유학은 음양오행설을 흡수하였고, 송대 유학인 성리학은 불교를 흡수하여 원형을 잃었다. 유가 사상을 한족문화 또는 중화문화(화하문화) 개념으로 확대한다 해도 어느 시대의 한족문화 또는 중화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중략) 진 이래 중화문화라는 것도 조대를 거듭할수록 북방민족문화의 영향으로 호화(胡化)를 거듭하였고, 마지막 왕조의 문화도 북방민족 만주족 문화에 의해 변질된 문화였을 뿐이다. 현대 중국의 표준 한어, 즉 보통화(普通話)는 북경 옛말[老話]에 만주 기인(旗人)의 말이 결합해 만주화된 Mandarin(滿大人)이며, 현재 중공의 문화는 지나(支那) 문화가 만주화된 뒤 다시 러시아문화에 의해 아화(俄化, 러시아화)된 문화이다. --- pp.68-69 당대(當代) 중국 학자들은 금조 시조 함보(函普)의 출신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중략) 나계암(羅繼岩)·신시대(辛時代)는 함보가 흑수말갈인이라 보았으며(羅繼岩·辛時代, 2015: 137), 몽골족 출신 요녕사범대학 교수 도흥지(都興智, 1950~)는 『금사』 권135 「외국열전하: 고려」(外國列傳下: 高麗)의 ‘찬왈’(贊曰)에 근거해 함보가 신라나 고려 정권에 의부(依附)했던 여진인이라고 주장했다(都興智, 2017: 153). 이같이 현대 중국 학자 대부분은 함보 신라인 설을 부정하고 말갈인 또는 여진인이라 주장했다. 제3의 설로 하얼빈사범대학 교수 왕구우(王久宇, 1969~)는 고려에 의탁했던 발해인이라고 보았다(王久宇, 2015b: 100). --- pp.122-124 금조 복식 변화의 추세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백의(白衣)·좌임(左袵) 등 전통복식을 유지하면서 지배층에서는 한(漢)·당(唐)을 모방한 조복·공복·제복을 부분 도입하였고 민간의 사치스런 한복 착용을 금지하는 반한화(反漢化) 정책을 시행했다. 동시에 여진 복식의 한화 정도를 능가하는 한인 복식의 여진화라는 역문화접변도 발생하였다. 금조에는 통합 전략에 따라 두 종족 복식이 공존하였고, 또 송대 복식에 여진식 장식이 결합한 제3의 복식문화도 발생했다. 또한 북송에 대한 공격 이래 점령지에 시행한 변발령으로 금조 지배하의 한인의 헤어스타일을 전반호화(全盤胡化)했으며, 여진인은 한족 헤어스타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 pp.206-207 남송인은 여진인의 역연혼(逆緣婚, levirate) 제도, 즉 부부 중 남편이 죽으면 남편 가족 중 다른 남성이 상부(喪夫)한 여성과 혼인 관계를 맺는 제도를 개돼지나 다름없는 제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등 동이족 및 흉노족의 공통 습속이었다. 『사기』 「흉노전」의 분석과 같이 역연혼은 종족성의 유지, 재산 축소의 방지 등에서 일정한 기능을 지녔다. 이와 다른 한족 혼인제는 오히려 친속(親屬) 간 소원화와 역성(易姓)이란 폐단이 있기에 각 종족(민족) 간 혼인제의 우열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역연혼 제도는 제5대 세종대에 이르러 한인과 발해인에게도 널리 퍼져 나갔다. (중략) 발해(渤海) 이씨(李氏)인 세종 모친 정의황후(貞懿皇后, 1094~1161)가 역연혼을 거부하고 출가한 기록 등을 보면 금대 후기에 이 혼속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진족의 역연혼은 15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지속하였다. --- pp.284-185 금조는 인구학적 비중과 분포에서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금조 수명의 절반을 넘은 대정(大定) 23년(1183) 인구 구성은 여진족이 약 10%, 한족이 약 80%, 거란 등 기타가 약 10%를 점하고 있었다(張博泉·武玉環, 1989: 135). (중략) 금조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 원인은 막강한 대몽고국(大蒙古國)과 남송의 군사적인 협공 때문이었으며 문화접변에 따른 한화와는 관련이 없었다. (중략) 중원지방으로 이주했던 여진족은 금조 말기 한족의 잔인한 복수로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며 일부는 한족으로 통합되었다. 극소수만이 고향으로 복귀하였다. 금조가 정식 멸망하기 전인 1215년 금 장령 포선만노(蒲鮮萬奴, 完顏萬奴, ?~1233)가 여진 고토에 대진(大眞)을 세웠다가 1217년에는 동하(東夏)로 개칭하였고 1233년 몽골의 번속이 되었다. 이렇게 고토에 계속 거주하던 여진족은 ‘문화의 섬’(cultural island)을 유지하면서 원대와 명대 380여 년간 숨을 고르다가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해서여진(海西女眞)을 거쳐 1616년에 후금(後金)으로 부활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중원과 동아시아를 점령해 대청제국을 건설하였다. --- pp.344-345 민국 시대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1910년대 중반 이전에는 주로 ‘체’(體)를 전제로 ‘용’(用)의 층차(물질·제도)에서 서양문화 수용 여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에 이르자 과거의 관심과 실천의 실패 문제를 깊이 인식하면서 주의력을 ‘체’의 건설 문제로 전환하였다. 이에 중서지쟁(中西之爭)과 고금지쟁(古今之爭)을 동일시하고 시대의 진화로 서방 문명이 중국 옛 문명을 철저히 이길 것이라는 관점에서 서방본위론(西方本位論, 서화론(西化論))과 전반서화론(全盤西化論)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서지쟁과 고금지쟁은 다르며 중국문화 자체의 독특한 발전 방향이 있다는 관점에서 동방문화론(東方文化論)이 등장했다. --- p.407 1980년대 중후반의 문화논쟁은 중공 정권이 4개 기본 원칙(사회주의 도로 견지, 인민민주(무산계급) 전정 견지, 공산당 영도 견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 견지), 즉 새로운 ‘흠정중체’(欽定中體)로 전반서화론을 탄압함으로써 1990년대 초에 진정되었다. 이 논쟁들은 결국 ‘중국 특색을 지닌’, ‘중국식의’, ‘중국화된’, ‘중국 국정에 맞는’ 사회주의 현대화 및 문화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지도사상·이론틀·기본모델·개념 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은 부족했다. 중공의 현대화는 표층구조(4개현대화)의 현대화에 주력하고 중층구조(정치·경제체제)의 현대화에는 미온적이며 심층구조(사상·이데올로기)의 현대화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즉 3개 층차 현대화가 보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 pp.448-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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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족) 중심주의 역사관을 넘어
동아시아 문화 변동의 역동성을 새롭게 조명하는 대작 화이론(華夷論)과 한화론(漢化論)은 오랫동안 중국사에서 발생한 민족 간 문화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민족 간 문화변동의 실제 과정과 내용 및 결과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며, 때로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로 작용해 왔다. 이 책은 문화인류학·비교문화심리학·민족학 분야에서 발전한 문화접변이론을 도입하여 한족과 북방민족 사이의 문화변동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저자는 한화(漢化)뿐 아니라 호화(胡化), 문화저항, 문화통합, 제3문화의 형성 등 다양한 문화접변 유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금대 여진족의 문화접변 사례를 중심으로 중국문화의 역사는 일반적인 이해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상호적인 과정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한족의 문화가 주변 민족을 변화시킨 것만큼이나 주변 민족 역시 중국 한족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켰으며, 때로는 독보적인 제3문화를 창출하기도 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학(漢學), 역사학, 문화인류학, 민족학 등의 성과를 종합한 이 책은 한족 중심 중국사 서술을 재검토하고 전통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새로운 해석 틀을 제시하였다. “혐중(嫌中)은 지양하되 사실에 근거한 해중(解中), 변중(辨中) 등을 통해, 학문과 생존을 위한 한국 특색의 중국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족은 주변 북방민족들을 모두 동화시켰는가? 동아시아 역사를 둘러싼 가장 오래된 질문에 방대한 1차 사료로 답하다 역사는 지배민족의 일방적인 동화(同化)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 간의 접촉과 충돌, 적응과 변형의 과정이다. 한족과 북방민족, 피정복와 정복, 중심과 주변이라는 익숙한 구도를 넘어 두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융합되는 역동적 과정을 방대한 1차 사료를 근거로 추적하는 이 책은 중국사를 바라보아왔던 우리의 낡고 고루한 시각을 허물고 새롭고 참신한 시각을 제공한다. 중국 한족 중심주의 역사관의 오랜 통념에 도전하는 이 책은 중국사와 동아시아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지적 자극과 충격을 줄 것이다. 그만큼 중국사와 동아시아사에 입문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 책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진한 이래 중국 땅에 나타났던 60여 개 왕조(정권) 중 한족이 세운 것은 20여 개가 안 된다. 나머지 왕조 시대는 한족의 피식민 피지배 시대였다.” 이 책의 제1부(문화접변이론을 통해 본 화이론(華夷論)과 한화론(漢化論)의 구조와 전략)는 춘추 시대부터 청대까지의 화이론과 한화론을 다루었다. 화이론과 한화론의 이해에 문화접변이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론화한 제1부는, 화이론은 이론적으로 문화접변의 쌍방향성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한족이 북방민족이나 소수민족을 일방적으로 한화했다는 한화론(漢化論)은 일방적인 희망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제2부(금대의 문화접변: 여진족의 한화(漢化)인가 한족의 호화(胡化)인가)는 여진족 금조의 한화와 금조 치하 한족의 호화를 다루었다. 금조와 여진족의 혈연적 및 지연적 유래를 신라나 고려보다는 발해와 고구려에서 찾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여진족의 문화 계승과 문화접변의 양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서 더욱 자연스러운 접근법으로 작용했다. 또한 금대 여진족은 전반한화(全盤漢化, eventual assimilation by the Chinese civilization), 즉 한족문화에 동화(同化)되기보다는 두 문화의 통합에 따른 ‘제3의 문화’(third culture)를 창조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아울러 역사의 절반 이상을 북방민족에 의한 피식민지 시대를 거쳐온 한족과 한족문화는 오랜 문화접변의 결과 상당 부분 호화(胡化)되어 순수 한족과 한족문화를 찾기 어렵게 되었음을 논증해냈다. 제3부(현대 중국의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 중국화[漢化]인가 러시아화[俄化]인가)는 19세기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현대 중국의 문화모델 선택과 현대화론을 다루었다. 대청제국과 이를 이은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은 개방과 현대화를 강요당하면서 현대화모델, 즉 문화모델 선택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을 전개하였다. 점진적인 현대화를 주장하는 흐름은 양무론·조기개량주의·중체서용론·국수보황론(國粹保皇論)·동방문화론·중국본위문화론 등으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흐름은 변법론·혁명론·서화론·전반서화론·아화론·마르크스주의중국화론 등으로 이어졌다. 1919년 5·4 이래 중국 현대화 과정에서는 서화(西化)와 소화(蘇化, 러시아화[俄化])가 연합하면서 일시적으로 반전통과 민주과학을 옹호했고, 그 후 소화와 전통의 연합이 자유주의를 반대하며 확산되었다. 중국 전통과 서화는 조합·결합·타협이 가장 어려운 대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