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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남아 있는 시간 지우 신우 멈춘 집 두 겹 닫힌 집 다시 사이 다른 방식 2부 비탈진 시간 장례식 기억 그 후 돌아갈 곳 놀이터 문 앞 약속 3부 신우네 집 완벽한 방향 느티나무 누나 닫히지 않는 밤 금지선 선을 지키는 밤 4부 다시 걷는 시간 질서 하루 어긋남 파동 준비 정차 에필로그 작가의 말 |
마시멜로 스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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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판을 옆으로 밀어두고 문제집을 펼쳤다. 제육볶음의 강한 양념이 감각을 찔렀지만 시선은 책 위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점심시간 끝나기까지 남은 분량을 눈으로 훑으며 그 뒤에 해야 할 일까지 함께 계산했다. 필요한 시간과 공부량. 그것 말고도 내게는 추가로 챙길 숫자들이 있었다. 학원비, 교재값, 스터디카페 요금…. 숫자들은 늘 나보다 먼저 내 마음속을 지배했다. 숫자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날엔 세워놓은 하루의 순서도 흐트러지곤 했다. 나에게 공부는 목표였지만 한편으론 계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계산의 맨 앞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오빠 지석이었다.
--- p.15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나를 보며 멈춰 있었다. 무표정도 웃음도 아닌 상태. 잠깐, 아주 잠깐이었지만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또는 들킬까 봐 신경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짧은 정지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각인됐다. --- p.17 “봤지?” 나는 결국 내 속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에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말투는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어.” 무심히 돌아온 그 대답에 다시 잠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설명도 의미도 덧붙이지 않은 답변. 그 단순함이 이상하게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잠깐의 간격 뒤 그 애는 덧붙였다. “티 안 냈어. 아무도 몰라.” 송지우가 그렇게 떠난 뒤에도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손끝은 여전히 굳은 채로였다. 그 마지막 말이 나를 그 자리에 꽁꽁 가둬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 pp.28-29 “방학하잖아. 그 전에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 일이 과학실만의 상황은 아니라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해부실험 장면이 이상하긴 했지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설명할 일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는 지금 자기 쪽의 균열을 어떻게든 봉합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박신우가 집착하고 있는 건 분명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것 같았다. --- pp.37-38 ‘학생 아니었으면 이 아이도 위험했어요.’ 그 말이 귓가에서 반복됐다. 왠지 모르게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방, 멈춰 있는 시간. 그리고 지금 구급차에 실리는 송지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나는 감동도 기적이라는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멀어지는 구급차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바다는 여전히 같은 소리를 냈고, 해는 막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잊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p.7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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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상처와 충격. 그럼에도 스스로의 존엄을 찾아가는 청소년들의 서사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모양과 두께를 가진 상처와 마주한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세상이 권하는 처방은 대개 빨리 잊으라는 재촉성이거나 일회성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소설 〈신우네 지우〉는 그 경계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매일의 일상을 강박적으로 유지해 내는 아이들의 ‘멈춤과 정차’의 시간에 주목한다.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친절한 박신우'라는 가면과 집안의 암묵적인 질서 뒤로 숨어버린 소년 신우,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을 소모시키는 방식으로부터 스스로 물러서고자 정해진 선을 거부하는 소녀 지우. 소설은 이 두 인물의 시점을 팽팽한 대칭 구조로 교차시키며, 인물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파동을 집요하고도 서정적인 필치로 묘사한다. 작품 속에서 신우가 구축한 정돈된 세계와 지우가 메고 온 오빠의 낡은 운동화가 담긴 가방은 끊임없이 부딪힌다. 그러나 지우는 그 금지선을 자극적으로 부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하게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제자리에 정렬된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지금의 질서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소모시키고 있는지"를 묵묵히 질문하는 지우의 태도는 마침내 신우에게도 도망치지 않고 자신과 마주할 용기를 건넨다. 신우의 누나 신희가 던지는 단 한마디, "살았잖아"라는 말 앞에 지우가 흘리는 눈물은 이 소설의 주제와도 잇닿아 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본능이자 고통이었던 아이들은, 마침내 새 학기의 폭설 속에서 각자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빚을 서로에게 덜어내 준다. 이 소설은 진정한 연대는 서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냥 나 자신'으로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곁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 역시도 새로운 힘은 자신의 자각과 의지를 회복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지막이 일깨워준다. 한여름을 지나 겨울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깊고 조용한 잠을 자고 일어나 각자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 아이의 성장은 이 시대 모든 남겨진 이들의 시린 마음을 단단하게 위로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