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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늦지않기를
그림 그리다 글쓰기 기다림 나의 몫 낮과 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늦지 않기를 바람이 분다 새로운 시작 손님 초대 약점 열정과 아름다움 이야기가 있는 집 지난 후에 보이는 것들 책상 창조 필사 허물을 벗는다 2부 엄마와 딸 강한 여자가 좋다 엄마의 골동품 이야기 노을의 새무리 돌보는 마음 그네 밥상너머 변명같은 이야기 삶의 시선 엄마와 딸 오래된 많은 것들 전기가 나갔다 좋은 사람 진심 음악 3부 또 떠난다 돌아와 나의 자리에 앉으면 달리기 또 떠난다 반창고 반환점 비를 기다린다 오래 전 이야기 유행가 덕수궁에서 만난 장욱진 짧은 여행길에서 한강 다리 위에서 함께하는 마음 반 고흐를 만나다 해설 글과 그림으로 다듬어진 예술적 정체 _김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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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모자라는 마음으로 애쓰며 버틴다. 그러나 감춰진 마음의 두께는 얇고 잘 찢어져, 여기저기 새로 얻은 분홍빛 상처를 하얀 반창고로 슬그머니 덮어둔다. 그런 자국들을 서투르고 엉성하지만 나름 깁고 꿰매고 붙여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어느 날에는 누군가에게 내가 꿰매놓은 마음속 바느질 자국을 보여주고 칭찬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날은 비가 올 것 같은 어두운 회색빛 차가운 날씨와 정겹고 따뜻한 말 두드림에 잔뜩 취해버려, 그만 다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자존감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을 열어서 보여주지 못하는 어느 구석진 곳에 숨어 웅크리고 있는 자리 - 약점이 있다. 열어놓지를 못하니까 그곳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초록빛 곰팡이와 뿌연 먼지는 쌓여간다. 가끔은 잠겨진 문을 열어 먼지를 털고 햇빛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짜릿한 유혹을 받지만, 은밀하게 절대로 열지 않는 약속은 지킨다. 그곳은 제일 마지막 아래의 바닥일 것이다.
---pp.34-35 「약점」 중에서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며 상상 속에서 만든 이미지를 편한 형태와 색상으로 표현하려 하고, 글 속에는 진심으로 꺼내 놓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p.39 「이야기가 있는 집」 중에서 허허벌판 돌개바람 불어오는 세상에 엄마 없이 살아온 세월이 10년을 넘겼다. 엄마의 생일이나 어머니날이나 또 돌아가신 날이 가까워지면, 몸 안 제일 밑바닥에 꽁꽁 덮고 싸매고 막아놓은 구멍 너머로 헛헛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일 년에 겨우 몇 번이지만 되도록이면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나름 애쓴다. 오래전에 엄마가 외할머니 돌아가신 날에 보았던 유난스레 붉은빛의 맨드라미 이야기를 하시면서 “싫다 밉다하였는데 온통 세상이 다 빈 거 같았다” 하셨다. 내게도 세상이 비어 있고 다시 5월의 어머니날이 돌아왔다. 이제는 예전의 엄마 번호로 더 이상 전화하지 않는다. 아마 엄마 전화번호를 가진 새 주인이 몇 년 동안 누군가가 실없이 전화하고서는 아무런 말 없이 끊어버린 것을, 이제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pp.74-75 「엄마와 딸」 중에서 닫힌 나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열고 싶은 마음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책을 펼치고 읽었다. 새벽의 차갑고 한산한공항 의자에서, 4시간의 비행기 안에서 심지어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가만히 즐기며 시간을 줄여갔다. “우연히 마주친 책의 한 구절, 시 한 소절, 얼핏 떠오른 생각 하나, 사랑의 말 한마디” 이 모든 것들을 만났고, 마음에 품었고 또 헤어졌다. 그러면서 읽고 있는 책 속의 우연한 글귀 하나에 마음이 파르르하지만 그래도 손끝에 잡혀있는 책 하나로 다정하다. 늘 그렇듯이 집으로 돌아오면 여행에서의 많은 것들과 덧없이 이별하고 무심하게 잊어버린다. 그래도 서둘러 단어 몇개로 겨우 붙잡아 놓는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그때가, 다시금 둥그러니 떨어져 있는 단어들에게 이야기를 붙여가며 문장을 만들고 글을 이어간다. 시간으로 멀어진 여행과 다시금 만나는 것이다. 늘 곁에 머무는 무덤덤함과 무관심한 마음이, 멀리 떠난 낯선 곳에서는 스스로 다가오며 긴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덥석 손을 잡는다. ---pp.110-111 「짧은 여행길에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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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 미안함과 고마움의 기록
2부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엄마의 골동품 이야기」나 「엄마와 딸」 같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글들이다. 이만큼 사모곡(思母曲)에 진심인 딸을 목도하기란 쉽지 않다. “왜 엄마는 내게 그렇게 엄하고 야단만 치고 늘 만족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묻자, 엄마가 “언젠가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어. 미안하다” 하셨다. - 「엄마와 딸」 중에서 담도암 마지막 단계, 병실에 둘만 남은 긴 시간에 이르러서야 오간 이 대화에서 엄마가 남긴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는, 작가의 생애를 관류하는 위안의 힘을 공여했다. 아침마다 부모의 사진 앞에 서서 “오래되어 심하게 굳어버리고 딱딱해진 미안함”을 조금씩 녹여 내는 작가의 마음은 미안함과 고마움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선량한 본성에 연동된 것이며, 작가는 그 힘으로 세상사에 대한 순방향의 친화력을 얻었다. 3부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그 속에서 촉발하는 세상사의 이치, 그리고 새 삶의 의욕 같은 것들을 담았다. 태어난 곳을 떠나 “영원한 여행객”으로 살아가는 이방인의 자리,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커다란 가방과 끝내지 못하는 뿌리내림의 숙제(「또 떠난다」)를 지나, 겨울이 되어야만 비가 내리는 캘리포니아 ‘신기루의 땅’에서 작가는 “지금처럼 기꺼이 애쓰며 살아갈 것”(「비를 기다린다」)이라 다짐한다. 일상의 장면과 감정을 관찰하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삶의 질서와 아이러니를 글로 풀어낸 결과로, 현지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에게는 가슴 벅찬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에 열화와 같은 예술혼을 지니고 있으되,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차분하고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성품이지만, 결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인격자다. 그와 같은 품성의 주인이기에, 그의 글과 그림은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고 제 몫의 예술성을 발양한다”며, 세계관의 깊이와 응집력, 예술과 삶의 일치로 인한 신뢰, 시대 변화에 함몰되지 않는 독창성이야말로 이제까지의 김해연을 지탱해 온 덕목이라고 평한다. 보석 같은 삶의 결정(結晶)을 담은 산문집 『이야기가 있는 집』이, 더 진전되고 더 활달한 김해연 예술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작가의 말 약속 약속을 지키려 마음이 서둔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은 어깨를 강하게 누르며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다. 책상 앞에 앉으면 늘 나의 이야기만 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지, 벗어날 생각도 못 하고 동그라미 안에서 맴돌아 다닌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을 잘 아니 전혀 모른다. 나도 나를 몰라 약속으로 꽁꽁 묶어 가두어 두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대상을 무엇으로 표현하여야 하는지 어렵고 모자란다. 그냥 무언가를 쓰고 싶어지는 그대로 머릿속에서 손가락으로 옮겨지는 글자들을 모으는 단순한 기쁨만으로, 더없이 행복해지고 시간을 잊는다.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포만감으로 굳이 가진 만큼보다 더 큰 욕심은 부리지 않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은 안다. 욕심을 한껏 포장하면서, 그렇지만 끝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ㄱㄴㄷ을 모아 문장을 만들고 글을 쓸 것이라는 예감은 덫에 걸려 있다. 그렇게 앞으로 늘 하는 그대로의 똑같은, 새로운 약속을 지킨다. 2026년 여름 김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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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연의 예술적 의식과 세계관은 그대로 하나의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한결같은 삶과 예술의 형식은 하나의 강점이면서 단처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한 유형이 갖는 장점은 세계관의 깊이와 응집력, 예술과 삶의 일치로 인한 신뢰, 고유한 예술성의 형성, 시대 변화에 함몰되지 않는 독창성 등을 발양한다. 그러한 측면들이 이제까지의 김해연을 지탱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동어 반복의 위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등의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 우리는 김해연이 세 번째 단행본을 출간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의 명암에 대해 깊이 있게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건넬 수 있는 최상의 충언일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가 더 진전되고 더 활달한 김해연 예술 세계의 목격자요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김종회 (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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