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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금
무한 스크롤 오감도 알림제1호 지주회사 명경 매칭 종생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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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 이상의 작품을 오늘 다시 쓴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예수금』은 새로운 미래를 발명하는 대신, 이상의 작품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던 관계를 오늘날 실제로 수행하는 장치를 찾아 그 자리에 놓는다. 「날개」에서 화자를 잠재우던 아달린은 구독형 인공지능이 되고, 「권태」의 웅덩이는 무한 스크롤이 된다. 「거울」 속 뒤집힌 자아는 보정된 프로필로, 「봉별기」의 사랑과 의심은 접속 기록과 추천 알고리즘으로 옮겨진다. 실시간 방송, 플랫폼 노동, 생성형 인공지능, 추모 계정이 등장하지만 이 책에서 기술은 장식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소외를 오늘의 방식으로 작동시키는 구조다. 표제작 「예수금」은 「날개」를 오늘의 노동과 인정 문제로 바꾼다. 화자의 문장과 코드와 시간은 여러 곳에서 사용되지만 그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을 받을 것이 남은 ‘미수금’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이미 받아 두고도 제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예수금(預受金)’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날개」의 마지막 동사도 달라진다. 이상은 날자고 썼다. 정무는 청구하자고 쓴다. 『예수금』은 알고리즘이나 인공지능을 간단한 악당으로 만들지 않는다. 플랫폼이 반복의 조건을 만들더라도 마지막 선택을 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이 책에서 더 무서운 것은 악의보다 구조이고, 폭력보다 빈칸이다. 동시에 이상의 말투와 형식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오래된 어미와 한자어 사이로 톤앤매너, 갓생, 디엠, 알고리즘 같은 말이 들어온다. 두 시대가 한 문장 안에서 일부러 어긋난다. 고전을 매끈하게 현대화하기보다 이미 한 번 죽은 문장을 오늘의 사람이 다시 입고 움직이게 하는 방식이다. 결국 『예수금』이 묻는 것은 백 년 동안 인간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가 아니다. 그토록 많은 기술과 제도를 만들고도 왜 어떤 장면들은 아직도 그대로 반복될 수 있는가. 백 년 전에는 기괴한 자의식과 과장된 비유였던 것 가운데 일부는 이제 서비스 기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