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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8
제 1 부 1. 박두병(朴斗秉) 회장의 비전 15 2. 면포(綿布, cotton) 거상(巨商) 박승직(朴承稷) 21 3. 꿈의 ‘박승직 상점(朴承稷商店)’ 개설 30 4. 일인상계(日人商界)의 도전과 그 대응 38 5. 박승직 상점(주)의 세대교체 (박승직에서 박두병으로) 44 6. 두산(斗山)그룹의 태동과 형성 58 7. 박승직 상점에서 두산(斗山)으로 74 8. 대망의 동양맥주(OB Beer) 인수 82 9. 맥주시장 숙명의 끈질긴 대결 91 10. 두산그룹 확장의 시대 105 11. 코카콜라와 환타(Fanta) 시대의 화려한 개막 112 12. 언론사 합동통신 인수(合同通信, Hapdong News Agency) 124 13. 박두병 회장, 소유와 경영분리 신념 실현 131 14. 새 세대 경영진의 시련과 도전 141 15. 동양맥주의 사세 확장(맥주, 위스키, 와인 생산) 155 16. 만보사(萬報社), 정공사, 한국유리 합병 물결 169 제 2 부 17. 3세(世) 박용곤(朴容昆)회장 등극 187 18. 다시 타오른 맥주 판매 전쟁 (네덜란드 하이네켄 맥주 등장) 197 19. 중동(中東, Middle East)으로 진출한 두산건설 210 20. 종합 기계 제작, 전자산업 소재, 포장용기 종합 메이커로 218 21. 연강(蓮崗) 학술재단 설립과 문화사업 전개 232 22. 대구 수원지 페놀(Phenol) 오염사고와 시련 239 23. 프로야구팀 OB 베어스(Bears) 창단(현 두산 베어스) 252 24. 연강 박두병의 진면목 261 25. 그룹 기업구조 대혁신 - OB맥주 매각과 한국중공업 인수 286 26. 박용곤(朴容昆) 회장의 시련과 고독한 결정 300 27. 두산 가스터빈(Gas Turbine)의 경쟁력 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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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병(朴斗秉) 회장의 비전
박두병 대한상의(大韓商議) 회장은 68년 4월 어느 날 소공동 소재 상의로 출근해보니 비서실에서 그날 일정을 보고하면서 매일경제신문 (현 매일경제) 백인호 경제부 기자가 상의 출입 기자가 되어 인사차 방문하게 되어있다고 알렸다. 대한상의는 대한상공회의소(大韓商工會議所, Korea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의 약칭이고 더러 상의(商議), 코참, KCCI 등으로 불린다. 대한상의는 법정(法定) 경제단체로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연합회, 한국경제인협회, 중소기업 중앙회까지 이른바 경제 5단체 중 다른 경제단체가 민간임의단체인 것과 비교된다. 대한상의 역사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1876년 조선과 일본간에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된 후 개항항(開港港)이 생겨 서양의 문물과 신식 상업방식이 도입되고 조선에 들어온 인본인 상인 등이 상업회의소 제도를 도입하자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상권 팽창을 견제,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하여 1882년에 첫 민족계 조직 ‘원산(元山) 상업회’를 세웠고 2년 후 ‘한성상업회의소’를 세웠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잠시 강화도 조약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으로 전개되는 조선의 상권(商權)의 역사와 변화, 두산그룹의 출현과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강화도조약은 1876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형식은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어졌지만, 일본의 강압적 위협 아래서 체결되었다. 일본은 1875년 9월 20일 군함 운요호(運揚號, 245톤)를 보내 조선 해양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양민학살과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운요호는 다시 강화도로 이동하여 조선 왕조에 무력시위를 하면서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물으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결국 조선 왕조는 1865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표방하면서도 부산, 원산, 제물포(인천) 등 세 항구 개항, 일본 화폐의 유통 허용, 치외법권 인정 등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조선 조정은 조약의 내용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짐작도 못하면서 사인했다. 일본은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면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조선 조정은 ‘자주국’이라는 말에 흡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이 조선을 청(靑)의 속국에서 분리시켜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집어넣으려는 일본의 음모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항구 개항도 일본인이 그 지역에서 거주하며 상행위를 허용토록 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 땅에서 살면서 돈을 버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조약 10조에서는 일본인이 조선 내에서 죄(범죄 행위)를 지어도 일본 관리가 심판하도록 정해 일본인에게 치외법권(治外法權, 다른 나라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할 권리)을 인정해주었다. 이 조약 부속 규칙으로 일본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무관세),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이 허용되도록 했다. 추후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제한 없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쌀 공출(供出)이라는 악명 높은 행위로 변했으며 조선 사람들을 배곯게 했다. 조선은 이 조약 체결 34년 후 일본에 먹히고 말았다. “백기자, 기자 몇 년 차인가?” 박두병 회장은 백 기자에게 차를 권하면서 첫 질문을 던졌다. “네, 이제 2년 차에 들어섰습니다. 저희 매일경제신문은 1966년 3월 24일 창간호를 낸 신생 언론사입니다.” “그렇군, 나도 언론사(합동통신)를 가지고 있고 언론계 흐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 경제신문 경제부에서도 상공업 발전사(史)를 공부하시나?” “금융, 재정 분야가 주입니다만 상공업 분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상공 분야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인 식견을 가지고 계시고 국제적 감각도 뛰어나시다는 평갑니다,” “백 기자, 내가 상공회의소 회장이지만 이 분야를 좀 더 전문적으로 이해하려면 길드(Guild)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길드는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도시를 중심으로 장인(匠人)이나 상인이 조직한 조합(組合)이야. 길드는 사업권 면허를 통해 해당 지역의 생산권이나 상권을 독점했지. 초기의 길드는 무역상의 동업자 조합 형태였으며 한 도시를 거점으로 단일 품목의 거래를 중재했지. 길드는 노동조합, 카르텔 또는 비밀 결사와 같은 형태를 취하기도 했어. 길드는 핵심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도시에서 재화와 용역의 판매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갖기도 했지. 길드는 길드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운 경쟁을 규제하거나 상품이나 품질기준을 마련하였고 도제(徒弟)고용의 심사를 통해 이주민이나 여성의 고용을 배제하기도 했지. 곳에 따라서는 비기독교인의 경제 활동을 가로막았는데 예를 들어 독일 지역에서는 유태인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교육 역시 마찬가지여서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1088년 설립된 볼로냐 대학교나 1096년 무렵 세워진 옥스퍼드 대학교, 1150년 시작된 파리 대학교 등은 애초에 길드로 출발한 것이지.” “이런 상공업 조합의 기원은 언제부터 인가요?” “길드와 유사한 상공업 조합은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콜레지엄(Collegium), 콜레지아(Collegia) 등으로 불리운 로마 상공업 조합은 상인들의 자발적 조합이었지.” “길드의 조직 형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길드는 크게 보아 상업 길드와 장인 길드로 구분할 수 있지. 그 외에도 다른 형태의 길드도 있지. 상공업과 관련이 없는 길드의 예로 잉글랜드에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는 성소(聖所)인 프리스(Frith)가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종교길드’가 있지” 박두병 회장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백기자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박 회장의 안색이 꽤 창백하고 야위어 보인다고 느꼈다. “회장님, 중세 유럽에서 중산계급, 근대사회에서 자본가계급에 속하는 사람, 부르주아(Bourgeois)계급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가요?” “부르주아는 원래 ‘성(城)안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중세시대에는 상인, 장인 등 도시의 중산층을 뜻했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소유한 지배 계급 (자본가 계급)을 의미하지.” “회장님 동양에서 상인(商人)계급은 어떻게 발전해왔습니까?” “동양에서는 백성을 사·농·공·상 네 부류로 나눈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계급적 의미를 내포했다고 볼 수는 없지. 모든 산업이 분업이 안 된 채로 한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보단 분업을 해서 각자가 각자의 일을 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낫다는 관점에서 네 분류로 나눴다고 보아야지. 한·중·일 동양 3국은 농업 국가였으므로 주곡을 생산하는 농민이 우선시 되었고 상인은 생산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유통 단계에서 이윤을 챙기는 계층이 된 것이지. 이조 시대에서는 유교 원리에 따라 상인들을 천시한 것도 사실이지.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상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상인계급이 생겨나고 상인(기업인)들이 우대받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지.” “회장님, 국제상공회의소(ICC,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는 언제 탄생했으며 역할은 무엇인가요?” “국제상공회의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기업 관련 국제기관으로 1920년 파리에 본부를 두고 발족했지. 130개국 이상 수만 명의 회원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각국 상공회의소나 실업가의 연락 내지 제휴 통상관계의 원활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지. 우리나라도 회원이지. 국제 상업회의소 국제 중재법원은 중재를 통해 국제적 상사분쟁의 합리적인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1923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산하 기관으로 두고 있지.” 박두병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으로 6년 동안 재임했다. 재임 중 그가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1969년 정부의 ‘무역 자유화’ 조치였다. 무역자유화란 국가 간의 무역에 대한 통제(관세, 수입 제한 등)를 줄이거나 철폐하여 자유로운 교역을 가능케 하는 것을 말한다. 박두병 회장은 무역 자유화로 수입무역 빗장이 풀리면 경쟁력이 없는 영세한 국내 중소기업들이 도산의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국 상공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상의회장은 국가의 무역 자유화 정책의 성공을 도우면서 경쟁력이 약한 산업 분야도 보호해야 했다. 박두병 회장은 1968년부터 정부, 기업, 국민의 삼위일체를 강력하게 역설하면서 무역 자유화의 충격을 이겨내려면 ‘산업합리화운동’을 전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합리화란 특정 산업의 구조 조정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박두병 회장은 1972년까지 5년 동안 이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마침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행 중인 정부의 정책 수립에 방향타 역학을 했다. “백 기자,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산업 고도화 단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화학, 철강, 기계공업 등 중화학 분야를 중점적으로 키워야 됩니다. 현재의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로는 선진국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내가 소속한 두산그룹도 현재의 식음료 위주에서 벗어나 중공업 구조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고 그 이상의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박두병 회장은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는 비전(Vision)을 내보였다. 박두병 회장은 1968년 5월 아시아 상공회의소 연합회를 서울에 유치해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1970년 5월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된 제3차 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아시아 상공회의소 연합회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연합하여 설립한 국제기구의 하나다. 회원국의 협력과 조정을 통한 상거래 조건의 개선과 무역 확대 및 경제 협력,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주기능이다. 박두병 회장은 ‘외자 유치’가 한국경제 성장의 사활이 걸린 때 폐쇄적인 일본 위주에서 벗어나 미국 자본 유치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고 캐나다, 중남미, 호주 및 뉴질랜드,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수출시장 확대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박두병 회장은 1973년 초 제5차 한·일 민간합동 경제위원회 단장으로 회의를 진행시켰다. 박 회장은 이때 건강에 이상을 느꼈다. 일본 측 단장 우에무라 고보로(植村早年郞)씨는 “박두병 단장은 이번 회의를 목숨을 걸고 진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한상의는 1973년 7월 4일 회장임기 만료를 앞두고 후임자를 물색하던 중 박두병 회장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를 8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백기자는 꽤 오랜시간 동안 박두병 회장과의 인터뷰를 마쳤다. 백기자는 박두병 회장의 상업사(史)에 대한 지식이 높은 수준임에 놀랐다. 면포(綿布, cotton) 거상(巨商) 박승직(朴承稷) (독자들이여, 앞으로 우리는 두산그룹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경로를 밟아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은 조선 후기 상업발달로 등장한 거상이었다. 거상이란 상업으로 큰 돈을 벌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상인을 말한다. 박승직은 1864년 6월 22일(음력)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炭筏里)에서 태어났다. 탄벌리는 숯가마골로 불렸다. 부친 문회(文會, 밀양 박 씨 부마공 파)와 모친 김해 김씨의 8남매 중 넷째, 다섯 아들 중 셋째였다. 박승직 가문의 뿌리인 부마공 파는 고려 충선왕 시대 밀성군의 8대손이 조선 2대왕 정종의 사위 즉 부마도위가 되면서 비롯되었다. 박 씨 일족은 이때부터 경기도 광주일대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박승직의 가문은 관록을 받으며 부귀를 누렸지만, 이 가문의 가세가 언제부터 기울게 되어 가난한 농부가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박승직의 부친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광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혈연을 이어온 것은 확실하다. 1대(代)가 30년인 것을 감안하면 약 150년 동안 농사가 주업이었던 것이다. 후일 박승직은 자신의 집안내력을 기록한 ‘심야중자필(深夜中自筆, 밤중에 스스로 쓴)’에서 “아버지 생시에 시골 광주 임의실 사실 때 농사를 지어 간신히 지냈는데 전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남의 위토(位土, 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일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를 자농하여 밥은 굶지 아니하였으나 재산이라고는 은(銀)일 푼도 없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곤궁한 형편이었다. 박승직이 이러한 형편으로 받은 교육은 10여 년간 서당에서 수학한 한문학습이 전부였다. 서당 문을 밟아 일자무식을 면한 것은 다행이었다. 당시 극소수의 사람에게 주어졌던 신학문에의 접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박승직의 소년 시절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가업인 농사를 돕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추후 상인(商人)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도 물려받은 재산을 밑천으로 삼은 일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과 닮았으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들과는 딴판이었다. 이 세분들은 부유한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등교육을 받았다. 박승직은 오로지 스스로 자기 앞날을 도모하고 개척했으며 자신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기운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후에 박승직은 ‘박승직 상점’을 운영하는 배오개(梨峴)의 거상이자 일본인과의 공동투자회사인 ‘공익사’의 대표로서, 소화기린 맥주 주주로서, 또한 유수의 상인단체들을 이끌어가는 상계(商界)의 리더로서, 고종(高宗), 순종(純宗) 인산시(장례식)의 상인봉도단장으로서, 경제계와 사회의 다방면에 걸쳐 그가 펼쳐 보인 지도자적 활동의 면면들은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상인(商人, Merchant)의 꿈 박승직이 태어난 해인 1864년은 고종(高宗) 원년이었다. 한반도에 풍운이 감도는 때였다. 그가 이상을 펼쳐 나간 시대는 어두운 시절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62년(철종 13년)에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이를 도화선으로 민란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양 열강들의 세력이 극동지역으로 밀려와 마침내 조선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어야 했으며 박승직이 12세 되던 해인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의 경제 침탈의 길을 허용했다. 국운이 풍전등화인데도 나라 안에서는 외척(外戚, 왕비친정)의 득세로 인한 권력투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런 틈새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의 발생,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의 한러통상조약(1884년),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발발 등은 이 땅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조선은 청·일·러 3국의 이권쟁탈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박승직이 상인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시기는 이처럼 험난한 때였다. 소년 박승직은 하루가 다르게 밖에서 들려오는 변화의 소리에 큰 충격에 휩싸였다. 평생을 힘든 농사에 뼈가 휘도록 고생해오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나 한 해 한 해 입에 풀칠이나 할 뿐인 대가족의 장래를 생각할 때 언제까지나 남의 위토나 경작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박승직을 흔들어 깨웠다. 평소 향리에서 20여리 송파(松坡, 현 송파구)장을 오가며 활기 띤 상거래 현장을 눈여겨보았던 박승직은 1880년대 초부터 과감하게 농업을 버리고 상인으로서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6세 때 일이다. 일대혁명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취급한 상품은 등잔용 석유와 피물(皮物, 짐승의 가죽 또는 그것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당시 등잔(燈盞)은 현대의 전기불로 등잔용 석유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을 돌아다녀야 하는 힘든 장사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서 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박승직이 장사를 시작할 무렵, 이런 일화(逸話)가 전해지고 있다. 박승직은 75냥(19세기 1냥의 구매력은 현재 화폐로 5만원 정도)을 어렵게 마련하여 서울 배오개(현 종로4가)로 갔다. 이 돈으로 등잔용 석유와 통, 지게, 석유 따르는 도구 등을 사서 짊어지고 망우리 고개를 넘어 한마을로 들어갔다. 체면 때문에 “석유 사세요.”하는 말을 외치지 못하고 그저 어정어정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거, 지게에 진 것이 뭐요?” “석유지요” “마침 석유가 떨어져 구하려던 참인데 잘됐소.” 곧 석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그가 지고 왔던 석유는 금방 동이 났고 115냥이 수중에 들어왔다. 본전을 제하고 40냥의 이윤이 남은 것이다. 뛸 듯이 기뻤다. 박승직은 다시 석유를 떼려고 고개를 넘어 오다가 발병이 나서 쩔쩔매고 있는 한 피물장사를 만났다. 피물 장수는 박승직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이 몸으로 도저히 장까지 갈 수 없으니 내 물건을 좀 사주시오” “그게 얼마요?” “120냥이요” “가진 돈이 115냥뿐인데 괜찮겠소?” “할 수 없지, 그거라도 주고 가져가시오” 박승직은 이 피물을 배오개 장으로 가져와서 팔았다. 마침 피물 값이 올라 500냥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박승직은 친구와 함께 우피(牛皮, 소가죽) 장사도 했다. 박승직이 좀 더 넓은 무대로 본격적인 상업의 길로 들어설 기회를 맞이한 것은 만 17세 되던 해(1881)의 일이다. 박승직 일가의 지주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안의 민영완(閔泳完)씨가 전남 해남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박승직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민영완은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아 평소 성실하고 의지가 남달리 강인한 승직이 장차 출중한 인물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승직의 부친 박문희는 기꺼이 찬성했다. 승직 역시 희망에 부풀어 새로운 세계로의 첫발을 내딛었다. 승직이 해남에 내려가 무슨 일을 했는지 공식자료는 없다. 초기 얼마동안은 군수인 민영완의 그늘에서 관직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승직은 이 생활을 곧 그만두고 상업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다. 박승직은 조선 총독부에서 도량형기 위탁 판매제를 실시하자 허가신청서를 내면서 이력서에 ‘명치 15년(1882)에 경성부 종로4정목(현 종로4가) 15번지에서 포목상을 개업’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 1882년은 그가 해남으로 떠난 이듬해다. 이때의 면포상을 박승직 자신이 좌처를 정하고 직접 운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20년 박승직 자신이 쓴 ‘심야중자필’에서 해남에서 엽전 삼백 냥을 모아 형(승완)에게 보냈고 형은 그 돈으로 포목장사를 시작했는데 3년 후 내가(승직) 와서 본 즉 그 돈이 ‘12돈이 물건에 잡혔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882년 면포상 개업은 자신이 보낸 돈으로 형이 면포상을 벌린 것일 수도 있다. 해남으로 가기 전에 이미 석유, 피륙 장사 경험이 있었던 박승직은 해남 타향에서 이 지역의 특산물을 타 지역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상업의 묘미를 터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전남의 해남, 강진은 ‘제주도산 갓’의 내륙 집산지였고 이 때문에 사상도고(私商都賈, 조선 후기 국가의 허가 없이 활동한 사상(私商)중 자본력과 상업조직을 바탕으로 상품을 매점매석하고 가격을 조작하던 독과점적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서 박승직은 어느 형태로든 직접 상행위에 관계 했을 것이며 그가 서울로 올라와 ‘박승직 상점’을 개업하기 전까지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로 무명면포를 하러 다니는 동안 전남일대가 활동무대였다. 물론 박승직의 활동범위는 전라도 지방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해남에서 고향으로 돌아와(1883) 약 2년 간 다시 농사일을 돕다가 환포상으로 나선 후에는 평안도, 경상도, 강원도 지역을 포함해 활동무대를 전국으로 넓혔다. 당시 박승직은 지방산지에서 백목(白木, 무명실로 짠 피륙) 한필(20자(尺 10m)을 양두돈(10전)에 구입해 서울에서는 양너돈(20전)에 팔았다. 노자를 제외하면 곱절이 남는 장사였다. 장차 거상을 꿈꾸며 서울에 확고한 좌처(坐處)를 마련하겠다는 열망으로 불탔던 청년 박승직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전무했던 당시 조랑말에 길마를 지워 한꺼번에 취급할 수 있는 물량은 30)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거친 산야와 좁은 길을 이동하는 일은 고행이었다. 좋은 물건을 만나 사느라고 노자까지 다 떨어진 날에는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쌀밥 대신 조밥을 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1886년 강원도 깊은 산골을 다닐 때는 두 달 동안 오직 감자만 먹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천부적인 건강 체질을 타고나 이런 행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박승직은 전라도의 나주, 강진, 경상도의 의성, 의령 등 오지에 속하는 곳을 선택해 다녔다. 그가 오지를 택한 것은 헐한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따라서 이윤 또한 그만큼 크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내 거상(巨商)의 기틀 마련 박승직의 환포상 10년은 박승직 가문에 대변혁을 가져왔고 장차 한국 상계(商界)가 일본 상인과 상권 장악을 놓고 한판승부를 걸 수 있는 저력을 마련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10년간 계속된 박승직의 환포상 외길은 그가 거상으로 발돋움 하는 ‘박승직 상점’ 설립까지의 치열하고도 의욕에 넘치는 자본축적 과정이었다. 이 기간 중인 1888년 박승직은 광주 대왕면(大旺面) 둔전리(屯田里, 현재 성남시 수정구 서부지역)에 30여 석을 추수할 수 있는 전답을 사서 임의실의 일가를 이주시켰다. 그의 나이 25세 때 일이다. 그가 농사꾼에서 상인으로 변신을 꾀한 지 8년여 만이다. 이는 소작농으로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던 그의 가문에 빛을 비추는 것과도 같은 일대사건이었다. 이어 이듬해인 1889년에는 광주 일대와 서울 청계천 부근을 전전하며 생활용품 장사를 하고 있던 맏형 승완과 힘을 합쳐 배오개(현 종로4가)에 두 채의 집을 마련했다. 그 뒤채를 쓰기로 한 박승직은 이곳으로 가족을 불러 올림으로써 대처인 서울에서 거상의 꿈을 펼칠 기본을 확보했다. 이 후 생활이 크게 안정되는 가운데 1896년 상점을 개설하기까지 장사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박승직이 이룩한 이 같은 성공은 그의 불굴의 투지와 개척 정신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가 선택한 당시 ‘환포상’이라는 업종이 호황을 구가한데에도 힘입은 바가 컸다. 우리나라의 직물생산은 전통적으로 자급자족, 물물교환의 범위 내에서 가내수공업 형태였으며 농한기에 부녀자의 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18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상업의 발달을 촉진했고 상업 발달은 화폐의 유통 범위를 넓히고 유통속도를 가속화 시켰다. 이에 따라 가내수공업에 의한 농촌의 직물 생산도 시장을 상대로 하는 산업화의 모양을 띠게 되었다. 이 재래 면포(토포)의 상품으로서의 유통은 개항(1876 강화도조약) 이후 급속히 유입된 값싸고 미려한 양포(수입 면직물)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1894) 무렵까지는 시장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는 토포의 주 소비층이 거친 노동에 종사하는 농민이나 어민으로 양포에 비해 투박하고 조잡하기는 했지만 내구성 면에서는 월등했기 때문이다. 한편 양포의 소비자는 도시의 중간계층이었으므로 그 유통시장이 개항장 인근의 도시 지역이었던 것에 비해 토포의 유통시장은 지방 특산물의 형태를 띠면서 경상도, 전라도로부터 강원도와 함경도 연해주지방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면포의 유통은 화폐에 의한 거래보다는 물물교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산군(면포 생산지)과 해읍(海邑)간에 상품교환 형태를 띠었는데 면포가 해산물과의 교역상품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승직은 바로 이 시기에 경상도, 전라도 지역의 토포를 서울에 모여드는 중간 상인들에게 공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중앙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박승직은 그때까지 양포의 세력이 토포를 압도하기 전의 ‘시차의 유리’함을 놓치지 않았고 부지런히 뛰는 만큼의 이익을 얻어 착실하게 힘을 길러 나갔다. 또한 그가 시종일관 서울까지만 유통을 맡았던 것은 서울에 좌처를 정하겠다는 숙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이 무렵 박승직에게 진취적인 인생관, 세계관을 다듬도록 해준 것이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였다. 그는 일찍이 스무 살 전후에 이제 막 한국 땅에 전파되던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940년 그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한 내용을 보면 그 계기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승직은 그 인터뷰에서 “지금부터 57년 전의 일입니다. 참으로 캄캄한 원시시대였지요. 오늘날과 같은 전등이나 수도나 전차, 전화는 꿈에도 생각 못한 때입니다. 몇 사람의 선교사가 와서 미국은 벽에서 물이 나오느니 편지가 줄을 타고 하루 동안 몇 백리를 가느니 하는 소리를 하면 미친놈이라고 하여 모두가 선교사를 ‘거짓말꾼’이라 하였습니다. 나도 믿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신기하면서도 구수하여 기독교에 애착을 부친 것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 계기가 되었지요.” 우리나라 개화 초기 신문물 수입은 주로 기독교 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당시 많은 선각자들이 신앙 차원 뿐 아니라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일환으로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박승직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그의 신앙심은 점차 깊어져서 그가 ‘박승직 상점’을 개설하기 2년 전인 1894년에는 그해 설립된 연동교회(連洞敎會, 선교사 모삼열(牟三悅, Moore, S.F.) 예배 처소용 천막을 전담해서 대여하는 등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연동교회 역대 목사 중에는 함태영(咸台永, 추후 부통령) 목사도 있었다. 교회의 설립과 발전을 돕는 것은 이 나라 근대화에 일조하는 일이기도 했다. 박승직은 기독교 입문을 계기로 유교 사상 뿌리 위에 박애, 봉사 정신, 그리고 서양의 진취성을 조화시킴으로써 한층 성숙한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