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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곳의 무엇을 지키란 말인가?”
눈앞에 펼쳐진 폐허를 바라보는 병욱의 머릿속에서 착잡함과 난감함이 뒤섞인 감정이 피어났다. 병욱은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삼각산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 덕에 더위를 조금이나마 떨쳐냈지만, 그의 머릿속을 채운 심란함을 쓸어내려면 일진광풍쯤은 몰아쳐야 할 터였다. 그 와중에도 초여름 땡볕은 경복궁의 맨땅과 경회루 연못의 연못물과 그 위를 덮은 연잎들을 데우고 있었다. 수문장(守門將)은 이 나라의 주인인 주상전하께서 기거하는 곳이자 만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푸는 곳인 궁궐을 지키는 중요한 직책이면서 병욱처럼 무관이 되겠다는 꿈을 꾸는 자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수문장으로 일해 보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해야 마땅하건만, 용맹무쌍한 장수의 기개를 한껏 뽐내며 궁궐을 굳건히 지키겠노라 다짐해야 옳건만 지금 병욱의 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지켜야 하는 곳이 먼 옛날 왜인들이 침략한 임진년에 불길에 휩싸여 폐허가 된 경복궁이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경복궁 옛터”라 불러야 옳지만 흔히들 “경복궁”이라고 부르는 그 궁궐 말이다. -5쪽 아영이 보인 관심에 팽곤은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태어나서 지금껏 잡은 소가 수천 마리는 될 겁니다. 그 많은 소를 잡다 보니 언젠가부터 생김새와 골격만 봐도 이놈은 어떤 땅에서 뒹굴며 무슨 일을 한 놈인지가 보이더군요. 발굽 모양을 보면 그놈이 돌아다닌 곳의 토질이 어땠는지 짐작이 되고요. 소의 몸뚱어리는 결국 뼈에 살이 붙은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뼈를 휘게도 만들고 연약하게도 만들고 때로는 통뼈로 만듭니다. 어느 힘줄은 두껍게 만들고 어느 힘줄은 뒤틀리게 만들고요.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읽은 양반님들은 바깥쪽 복숭아뼈에 흔적이 남고 붓을 잡는 엄지와 검지, 중지에는 굳은살이 박입죠. 대장간에서 평생 망치질을 한 자는 손과 팔뚝에 그 동작이 도장 찍히듯 박이고요. 살과 근육이 썩어 뼈만 남았더라도 그게 사내의 것인지 계집의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사내와 계집의 뼈는 다르니까요. 소인의 재주는 그런 흔적들을 제대로 살피고 짐작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유식하고 똑똑하신 포청 나리들은 그 쉬운 일이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정체 모를 시신만 나타나면 소인을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27쪽 병욱은 한때는 으리으리한 궐문(闕門)이던 광화문을 등지고는 천천히 경복궁 경내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둘러보는 곳이 200년 가까이 조선의 법궁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는 가로 450걸음에 세로 550걸음 길이의 공간을 에워싼 돌담이었다. 그러나 유력한 증거인 돌담조차도 담쟁이덩굴과 이끼에 점령당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초라한 모습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돌담에는 드문드문 기와가 얹어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돌담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탓에 이고 있던 기와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돌담이 위태롭게 지켜내고 있는 평평하게 다져진 땅에 남은 거라고는 시간이 흐르면서 쌓아놓은 더께에 덮인 탓에 간신히 존재를 드러내는 쓸쓸한 흔적들뿐이었다. 예전에는 중전마마가 기거하던 중궁전(中宮殿)과 세자마마의 거처인 동궁(東宮) 같은 전각들 사이를 갈라놓는 돌담들이 서 있었을 테지만 병욱의 눈앞에 있는 경복궁은 시야를 가로막는 담벼락 같은 건 없는 뻥 뚫린 공간이었다. 돌담들은 경복궁이 폐허가 될 때 무너졌거나 폐허가 된 이후로 경복궁에 침입한 자들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없애려고 일부러 무너뜨려 헐린 신세가 됐을 터였다. -39쪽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라고 거절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으나 후회막급이었다. ‘감당 못 할 큰 꿈을 꾼 게 잘못이었다.’ 그는 요즘 들어 틈날 때마다 해왔듯 자책을 시작했다. 그가 몇 년 전부터 꿔온 큰 꿈의 시작은 과거에 급제하는 거였다. 꿈은 북진에 부임해서는 국경을 넘어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가 꿔온 꿈의 내용은 손녀 아영이 쓸법한 패설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활약상과 비슷했다. 현실은 달랐다. 현실은 과거에 급제해 임금님께서 하사하시는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하는 꿈하고는 생판 달랐다. 그의 벼슬살이는 어전(御前)에 나아가 주상전하께서 내리시는 어사화를 받으며 시작되지 않았다. 수문장들이 소속된 관청인 수문장청을 찾아가 별도의 임명식을 치르게 될 거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광산군이 삼청동에서 건넨 임명장과 붉은 철릭을 받은 것이 경복궁을 지키는 종6품 수문장으로 임명된 그에게 베풀어진 예식의 전부였다. -71쪽 조정과 포청이 혼돈계의 존재를 감추려 애쓴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혼돈계가 극악한 짓을 벌이고 다니는데도 조정에서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바라만 보는 실정’이라는 인식이 퍼질 경우 가짜 혼돈계가 곳곳에서 준동할 거라는 걱정이 그거였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진짜 왈짜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드는 피라미 같은 놈들이 혼돈계를 자처하며 갖은 행패를 일삼는 바람에 민심은 나날이 흉흉해졌다. 혼돈계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내건 이름처럼 조선 팔도를 혼돈에 빠뜨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던 조정과 포청은 이제는 진짜 혼돈계가 벌인 짓과 가짜 혼돈계가 벌인 짓을 구분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91쪽 한생이 울타리 옆에서 가리킨 벌판 끝에는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이 몇 채 있었는데 그 앞에는 군기시(軍器寺)의 깃발이 펄럭였고 그 뒤로 사내 몇이 초가집과 수레 사이를 부산하게 오가며 짐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서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일꾼 둘이 수레를 몰고 나왔다. 말이 끄는 수레에는 볼록한 자루가 잔뜩 실려 있었다. “군기시로 화약을 납품하러 가는 모양이군요.” 익숙한 풍경이라는 투로 말한 한생이 고개를 돌려 벌판을 바라봤다. 벌판 한복판에 허리를 굽히고 땅을 다지는 장정이 있었다. 아담한 체구의 장정은 몸을 일으키더니 몇십 보 떨어진 목책으로 잰걸음으로 갔다. 한생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병욱을 보며 말했다. “놀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생은 빙긋 웃기만 했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병욱이 고개를 돌리자 장정이 멈춰 선 곳에서 피어난 불꽃이 벌판을 빠르게 가로지르더니 장정이 땅을 다진 곳에 다다르는 게 보였다. 다음 순간 벌판 한가운데에서 폭음과 함께 흙이 몇십 척이나 튀어 오르며 초여름의 청명한 하늘을 뿌옇게 가렸다. 멀리 숲에서 폭음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병욱도 날짐승들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말발굽 소리보다 요란하게 천지를 흔드는 폭음은 흔히 접하는 소리가 아니기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굉음에는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125쪽 며칠 뒤, 막사 옆 버드나무 아래에서 입궐하는 병욱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정순이었다. 안면을 튼 지 이레 만에 정순을 본 병욱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밝아졌다. 병욱은 버드나무가 드리운 그늘에 서서 말없이 경복궁을 둘러보는 정순의 뒤태와 옆모습을 매혹적이라고 생각하며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그러고는 정순 옆에서 일꾼들이 수레에 실린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대나무통 서른 개를 부리고 있는 걸 보고는 정순이 찾아온 연유를 짐작했다. 그러는 사이 삼돌이 축 처져서, 개동이 활기찬 걸음으로 영추문을 들어서며 병욱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난데없이 찾아온 손님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두 사람은 사내 옷을 입은 곱상한 청년이 남정네인지 아녀자인지 좀처럼 가늠을 못했다. 정순은 신호용 폭죽의 효능이 병욱의 마음에 드는지 확인해보려 찾아왔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만들었는데 종사관 나리께서 다시 먼 걸음을 하시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고 한시라도 빨리 폭죽을 써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찾아뵀습니다.” -138쪽 표범은 두 사람을 포기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놈이 노리는 대상은 몸을 추스르는 개동이었다. 횃불도 육모방망이도 떨어뜨린 개동은 맨몸으로 표범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개동도 병욱처럼 이글거리는 표범의 눈빛에 압도됐다. 개동은 자신에게 무기가 있더라도 표범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맨손일 때 결과가 어떨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플 일이리라. 삼돌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병욱이 개동에게 덤비려는 표범을 저지할 방법을 궁리하며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개동은 뒷걸음질을 쳤고, 표범은 곧 튀어 나갈 기세로 몸을 웅크렸다. 줄행랑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개동은 서둘러 몸을 돌려서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렸다. 딱히 어디를 가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표범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병욱과 삼돌이 뭐라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부리나케 뛰어오는 그들이 지르는 소리는 아득히 들렸지만, 표범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바로 뒤에서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놈이 내뿜는 뜨거운 김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살가운 마누라 송곡댁과 귀여운 아들놈 한돌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갔다. -152쪽 상규가 품은 희망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혼돈계 계원이 늘어나는 건 당장은 패악질을 벌일 놈들의 수가 늘었다는 뜻이지만 장차 혼돈계 내부에 분란이 일어날 소지가 커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은 둘만 모여도 생각과 취향과 의견이 다르기에 티격태격하는 게 정상이다. 우애 좋은 친구지간도 수가 늘면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둘만 모여도 그런데 셋이, 넷이, 다섯이 모이면 어떻겠나? 세상 어느 곳에나 모난 놈이 있고 삐딱한 놈이 있고 위아래 가리지 않고 들이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 있는 법이다. 어떤 모임이건 모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런 자들이 있을 공산이 커지고 분란이 일어날 소지도 커진다. 군대나 포청 같은 곳에서도 하극상이 일어나고 동료지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어명과 나라의 법률에 따라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곳도 이런 실정인데 힘과 주먹과 칼로 만사를 해결하려 드는 놈들이 모인 검계는 오죽하겠는가? -173쪽 매월은 병욱의 생일날 가야금을 뜯는 와중에 정순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매월은 기생이었을 때 맺은 많은 인연과 술도가를 운영하며 얻은 연줄을 생각하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루, 길어야 이틀이면 정순에 대해 웬만한 건 다 알아낼 거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틀을 넘기고 사흘을 넘기고 열흘이 돼가는 동안에도 정순에 대한 얘기는 누구나 다 아는 정도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심성 고운 최 노인이 업둥이를 거둬 키운 처자로, 최 노인과 동료 약장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는 동안 화약 만드는 법을 익히고 공부를 거듭한 끝에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뛰어난 약장이 됐다는 게 정순에 대해 알려진 전부였다. 이웃이라 할 사람도 찾기 힘든 무악재 외딴 벌판에 사는 데다 위험한 물건인 화약을 다루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약장들은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지낼 뿐 남들과 교류하는 걸 꺼리는지라 정순이 어떻게 생활하며 누구를 만나는지 같은 사소한 정보조차 알려진 게 전혀 없었다. 정분이 있는 사내가 따로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좋으련만, 매월은 혼기를 넘긴 정순에게 정인이 있는 듯한 기색을 찾을 길이 없다는 얘기에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212쪽 소격서에 머무르다 떠나는 수레는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삿갓을 깊이 눌러 쓰고 시커먼 옷을 입은 저놈들은 초저녁에 수레를 몰고 가회방을 돌아다니며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서랑은 고민했다. 놈들을 미행해 뭐하는 놈들이고 소굴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것인가, 그냥 놔둘 것인가. 사내 대여섯은 쉽게 때려눕힐 정도로 힘이 넘치던 다모였을 때라면 고민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놈들을 쫓아가 구린 짓을 하는 놈들인지 아닌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지금 서랑은 다모 시절에 때려눕히던 못된 놈들이 하던 구린 짓을 하는 떳떳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 짓을 하자니 무척이나 마음이 켕기고 마뜩잖았지만, 병석에 누운 남편과 철모르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면 도리가 없었다. 서랑은 글 읽는 선비들이 질색하는 소격서에 무당들이 사람들 눈을 피해 들락거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격서 아래에 남들이 모르는 통로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었다. 그 통로를 알려준 사람은 내명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수사하다 알게 된 박 상궁이었다. 서랑 덕에 억울하게 뒤집어쓴 누명을 벗은 박 상궁은 궁녀 시절에 어머니처럼 모시던 상궁이 알려준 통로를 서랑에게 알려줬다. -258쪽 “조상님들께서 경복궁을 마주 보고 있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숭례문 현판도 세로로 써서 걸고 광화문에 해태도 세운 건 형님도 아실 거요? 저 용은 아마 경복궁을 지을 때 집어넣은 걸 거요. 물을 다스리는 동물인 용이 화기를 막아줄 거라는 생각에서였겠죠. 그런데 글쎄, 내가 경복궁을 맡자마자 300년 넘게 물속에 처박혀 있던 놈이 떡하니 뭍에 올라오지 뭐요? ‘국태민안’이라는 글자까지 배에다 박고 말이오. 아, 형님을 선왕으로 만들면서 내가 직접 옥좌에 오를까 고심을 거듭하던 차에 하늘이 이놈을 내보내신 건 ‘나보고 이 나라를 맡아 백성들을 평안케 하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이다. 내가 왕위에 오를 때 때맞춰 용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지면 민심이 어떨 것 같소? 어리석은 자들은 그 얘기에 혹해 나를 하늘이 내린 임금이라 칭송하며 떠받들지 않겠소?” “펑.” 갑자기 들린 폭음에 기단에 있는 두 사람과 의자에 묶인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 교태전(交泰殿)이 있던 곳의 동쪽에 있는 돌담 근처에서 신호용 폭죽이 쏟아내는 빨간 불꽃이 보였다. 정순이 광산군에게 속삭이자 광산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광산군이 일어나 병욱에게 오더니 말했다. “송 종사관, 솔직히 자네를 천거할 때만 해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네. 그런데 신호용 폭죽 얘기를 하는 걸 보고는 기대해볼 만한 인재라는 생각이 들더군. 떤가? 자네가 궁리해낸 폭죽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는 걸 보는 기분이?” -270쪽 “어디서부터 할까요? 성 책쾌 얘기부터 해야겠죠?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달의 발단이 책을 가져온 그 사람이니까요? 아니,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책을 가져온 목수 얘기부터 해야겠지요? 이름이 선겸이었던가요? 가여운 사람. 하필이면 판돈이 필요할 때 성 책쾌를 만나는 바람에 고통스럽게 죽었으니…. 아무튼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지게 만든 성 책쾌의 공을 제대로 쳐주자면 여기 궁궐에 묻어줬어야 마땅한데 목수를 묻다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궁궐 대신 한강에 사는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았죠.” 정순은 수레에서 폭죽을 가져와 터뜨린 후 건춘문과 신무문의 중간쯤 되는 곳을 향해 네모와 동그라미를 그린 뒤 말을 이었다. “성 책쾌는 시체를 처리하는 문제로 애를 먹이기는 했지만 고마운 사람이었죠. 그이가 내놓은 책의 뒷부분 세 쪽 덕에 알아낸 암문과 비밀 통로에 우리 혼돈계가 털어온 패물과 다른 물화들을 쌓아둘 수 있었으니까요. 화약을 실은 수레에 강탈해온 물화를 숨겨 운반하면 어찌 되는지 아시나요? 모두들 우리를 군영에 화약을 가져가는 약장들로 보고는 괜히 우리 수레에 가까이 왔다가 누군가의 담뱃대에서 불티가 날아들어 화약이 터지기라도 하면 큰 변고를 당할 거라는 생각에 우리에게 다가오려 하지를 않습니다. 그 덕에 우리는 걱정 없이 여기 경복궁에 패물을 가져와 비밀 통로에 넣어둘 수가 있었답니다.” -279쪽 경복궁에서 더 이상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솔밭을 집어삼킨 화염의 기세가 꺾이는 게 보일 때 비탈길을 달려오는 여러 사람의 부산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개동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정신을 잃은 병욱을 업은 덩치 큰 장정이 뒤따라 들어왔다. 병욱의 머리에는 뒤통수의 출혈을 막으려는 헝겊이 감겨 있었다. 들이닥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흙먼지와 검댕을 뒤집어쓴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나이 든 선비가 병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들어왔는데, 그 선비를 앞뒤에서 호위하는 이들은 아무리 봐도 금군이었다. 금군의 철저한 호위를 받는 분이라면 상감마마라는 뜻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 밤중에 상감마마가 이 집에 거둥하실 리가 있느냐는 생각에 한생은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뺨을 꼬집어봤다. 한생은 영문을 몰라 어슬렁거리기만 하는 땅쇠에게 노선비 앞에서는 행실을 조심하라 일렀는데, 눈치 좋은 땅쇠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벌벌 떨었다. -3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