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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황해문화 (계간) : 가을 [2026년]
통권 132호
새얼문화재단 편집부
새얼문화재단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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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420쪽 | 606g | 153*224*20mm
ISBN13
9771739663002

출판사 리뷰

특집: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으로 보는 중동의 현재

이번 『황해문화』 특집은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에서 이란 이슬람공화국을 외부로부터 포위하는 힘들과 체제 내부에서 진행되는 정치 구조의 분화, 이스라엘의 전쟁국가화와 그 그늘 속에서 지워져가는 팔레스타인, 이 전쟁을 매개로 재편되는 강대국의 각축, 그리고 에너지 안보와 일상의 물가를 통해 중동과 긴밀히 연결된 한국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서로 다른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해부한다. 나아가 이란 내부에서 직접 전쟁을 목격하고 사유하는 목소리를 대담으로 담음으로써, 숫자와 전황 너머 이란 사회가 감내하는 고통과 변화를 함께 성찰한다.

구정은(국제 전문 저널리스트)은 「군사주의 전쟁기계 앞에서: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사라진 팔레스타인」에서 2023년 가자 전쟁과 2026년 이란 전쟁을 하나의 연속된 폭력의 흐름으로 읽는다. 글은 유엔 팔레스타인구호기구의 7월 보고서에서 출발한다. 열흘 새 마흔네 명이 목숨을 잃었고 2025년 10월 휴전 발표 이후에만 1,084명이 숨졌다. 그러나 이 죽음들에는 ‘전쟁’이라는 이름조차 붙지 않는다. 필자는 1948년 알 나크바 이후의 역사를 짚어 내려오며, 좌파 시오니즘의 퇴조와 리쿠드의 부상, 여러 집단을 층층이 등급 지어온 이스라엘 내부의 차별 구조를 전쟁국가화의 토대로 지목한다. 이 글의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이 참상이 잊혀진 방식에 관한 것이다. 미국과 이란이 맞붙은 뒤 세상의 관심은 유가와 증시와 패권 경쟁으로 쏠렸고 팔레스타인은 논의의 목록에서 조용히 삭제되었다. 필자는 이 삭제야말로 이번 전쟁이 낳은 가장 심각한 정치적 효과라고 본다. 나아가 글은 한국을 향한다. 한국은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과 인권 침해를 다룬 결의안에 예외 없이 기권해 왔다. 이스라엘과 가까워서가 아니라 미국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규범을 지켜야 실리도 커진다는 그의 결론은 소박해 보이지만, 규범이 무너지는 시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처방이기도 하다.

유달승(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장,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교수)은 「포위된 이슬람공화국: 이란의 저항과 균열」에서 이란을 단일한 저항 주체로 그리는 통념과, 곧 무너질 신정 체제로 보는 통념을 동시에 해체한다. 핵심 명제는 외부의 포위와 내부의 균열이 독립 변수가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하나의 구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외부 위협은 내부의 정통성 위기를 관리하는 안보 담론으로 전환되고, 그 담론은 다시 체제 유지의 핵심 논리가 된다. 내부 균열에 대한 분석은 더 촘촘하다. 필자는 이란을 단순한 신정 체제가 아니라 공화주의적 제도와 종교적 권위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정치 질서로 규정한다. 바로 이 제도적 복합성이 특정 지도자의 부재에도 체제가 곧바로 붕괴하지 않는 회복력의 원천이다. 결론에서 필자는 두 갈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혁명수비대가 국가의 최종 안보 보장 기관으로 자리 잡고 성직자 조직과 선출직 정부가 외형만 남는 군부 후견형 권위주의로의 이행이 하나요, ‘저항 중심 국가’에서 ‘발전 중심 국가’로의 전환이 다른 하나다. 이란의 미래는 체제의 존속 여부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중심 논리가 어디로 이동하는가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는 진단은, 우리가 이란을 읽는 시간표 자체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한새롬(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의 「다극화의 시험장?: 미국, 유럽연합, 중국 그리고 이란 전쟁」은 이번 전쟁을 강대국 경쟁의 시험대로 놓되, 패권과 세력 균형이라는 익숙한 어휘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을 파고든다. 미국에 대해 필자는 전쟁 목표가 사후적으로 축소·재구성되어온 과정을 짚는다. 목표는 계속 수정되고 승리의 기준은 끝내 모호했던 이 양상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반복이다. 필자는 여기서 루치아노 페레로의 ‘이란 내러티브’ 개념을 끌어온다. 미국의 대이란 담론은 정책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 체계이며, 그 서사는 이란을 규정하는 동시에 미국 자신을 규정한다. 이란이 비합리적일수록 미국은 합리적인 국가가 된다.
중국에 대한 분석 역시 통념을 뒤집는다. 중국은 개전 직후 ‘높은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았고, 이란을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았으며, 이란의 걸프 공격을 규탄하는 안보리 결의안에는 기권했다. 중국은 기존 국제 제도의 형식은 유지하되 그 안을 채우는 언어를 주권과 상호 존중과 발전 협력으로 바꿔왔다. 유럽에 대해서는 대서양 동맹의 성격 변화를 짚는다. 이제 유럽은 협의의 대상이 아니라 기지를 제공하는 지원 세력으로 취급되며, 이견은 설득이 아니라 압박과 거래의 대상이 된다. 낡은 질서는 힘을 잃었으나 새 질서는 아직 정당성을 얻지 못한 시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질서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질서와 규범이 동시에 경쟁하는 시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황의현(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석유, 산업과 일상의 균열: 한국이 본 중동, 그 50년의 ‘지리적 상상’」은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린다. 필자는 신문 아카이브를 통해 한국 사회의 중동 관심이 얼마나 정직하게 사건 의존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 중동은 크게 두 가지 결로 이해된다. 하나는 기회의 땅으로서의 중동이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수주를 시작으로 1982년에는 중동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가 17만 명에 달했다. 다른 하나는 낯선 타자로서의 중동이다. 1970년대 한국 언론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동정의 대상으로, 무장저항조직을 비합리적 테러리스트로 분리해 그렸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중동은 여전히 경제적 이해가 걸리거나 분쟁이 터질 때에야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이며, 이번 전쟁으로 커진 관심 역시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필자가 요청하는 것은 정보의 증가가 아니라 인식론적 전환이다.

특집의 마지막은 대담을 담았다. 시아바시 사파리Siavash Saffari(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 문명학부 교수)와 구기연(『황해문화』 편집위원·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교수)은 대담의 첫 매듭에서 ‘이란 사람들’이라는 단일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사파리 교수는 이란 현대사 내내 이어진 양극화를 짚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여성, 생명, 자유’ 운동에 대한 재평가다. 그는 이 운동이 이슬람공화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저항이었다고 단언하면서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체제 변화 운동이 아니라 시민권 운동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실질 권력이 전쟁 이후 혁명수비대로 이동하는 가운데 히잡 강제 같은 종교적 규율이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역설도 지적한다.
휴전 직후 그의 친구들은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매일 저녁 무료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테헤란 시민들의 최우선 순위는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 ‘숨 쉬게’ 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는 데 20년이 걸릴 수도 100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동안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초강대국이 침공했는데도 이란 사회가 붕괴하지 않은 것은 정부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이 맞서 싸우는 가장 큰 악은 절망이다. 전쟁에는 무기만이 아니라 타자를 악마화해 살상의 죄책감을 마비시키는 심리적 프레임이 반드시 동반되며, 이를 무력화하는 유일한 길은 재인간화rehumanizing, 곧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심층 분석 및 비평: 시대의 또 다른 균열들
‘좌담’에는 지난 5월에 방한한 훙호펑[孔誥烽] 교수와 하남석·장정아 두 연구자가 나눈 대화를 실었다. 표면적 주제는 중국이지만, 그가 짚는 문제들은 이란 전쟁을 읽는 우리의 틀과 거의 그대로 겹친다.
그는 신간 『중국 문제: 800년 동안의 환상과 공포』에서 서구의 중국 담론이 800년 동안 이상화와 악마화 사이를 오갔음을 보인다. 핵심은 그 이미지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가 아니다. 중국을 고정된 본질을 지닌 하나의 문명으로 환원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이며, 두 입장 모두 내부의 역사적 변화와 계급 관계와 사상적 다원성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더 뼈아픈 지적은 그다음이다. 중국의 권력자들은 이 오리엔탈리즘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동생산자였다. 또한 그는 미중 경쟁을 이데올로기 차이에서 비롯한 ‘신냉전’이 아니라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제국 간 경쟁’에 가깝다고 본다. 미국의 적이면 무조건 옳다는 논리를 두고 경찰이 폭력적이니 카르텔은 좋은 편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오류라고 잘라 말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곧 출간될 『달러 제국』을 설명하는 대목은 이번 특집과 가장 가깝게 맞닿는다. 그는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미국이 사우디 왕가에 안보 우산을 제공하는 대가로 모든 석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도록 강제했음을 상기시킨다. 전 세계가 석유를 사기 위해 반드시 달러를 보유해야 하는 구조, 그것이 미국 국력의 가장 깊은 기반이었다. 그렇다면 호르무즈 봉쇄가 흔든 것은 유가만이 아니라, 반세기 동안 중동의 유정과 워싱턴의 국채를 잇고 있던 회로 자체다. 좌담의 마지막 문장도 오래 남는다.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던 체제들조차 결국 영국 제국이 깔아놓은 역외 금융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짚으며, 그는 우리가 아직 진정으로 탈식민 상태에 도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비평’에서 홍명교는 지난 5월 삼성전자 성과급 쟁의를 되짚으며, 성과급이 보상이 아니라 사후에 정산되는 지연된 임금이자 노동자를 서로의 경쟁자로 만들어온 분할-통치의 장치였음을 짚는다. 언론이 앞세운 ‘45조’의 모수인 300조 원 영업이익 뒤에 최소 30만 명의 하청·특수고용 노동이 지워져 있다는 지적은, 정규직의 요구를 ‘지대 추구’로 낙인찍는 프레임이 정작 겨누어야 할 수탈 구조를 가려왔음을 드러낸다. 하승우는 지방선거 이후 승패를 셈하는 논의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묻는다. 주민과 합의되지 않은 정책의 속도는 장점이 아니라 치명적 단점이 된다는 지적은, 규모는 다르되 이 특집이 다루는 문제와 같은 결을 지닌다.

사상의 오늘-여기: 포퓰리즘에 대하여
이번 호 ‘사상의 오늘-여기’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조명한다. 『포퓰리즘 이성』의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마련한 자리다. 이승원은 라클라우가 포퓰리즘을 합리성의 병리적 과잉이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려 정치 일반의 논리로 재배치한 과정을 안내하고, 연준한은 포퓰리즘이 헌정민주주의의 위협이 아니라 그 평등주의적 이상을 급진화하는 기획임을 논증하며 아르헨티나 과두제 공화국의 경험을 87년 체제의 ‘수도권 고학력 중산층 과두제’와 겹쳐놓는다. 현우식은 한국에서 좌파 포퓰리즘이 유행처럼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해왔을 뿐 한 번도 체계적인 정치 프로젝트로 시도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세 편 모두 인민이 결코 주어져 있지 않다는 명제를 공유한다.


무감각해진 균열 사이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번 호 ‘포토에세이’는 다시 팔레스타인이다. 양희석 작가가 서안지구 최남단 마사페르야타에서 여러 해에 걸쳐 찍어온 사진들을 「Sumud: 꺾이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싣는다. 수무드Sumud는 아랍어로 불굴, 꺾이지 않음을 뜻한다. 집이 부서지면 다시 짓고, 빼앗으려는 땅에서 계속 농사를 지으며 끝내 견디는 방식을 가리킨다.
아투아니 마을의 농부 하페즈 후라이니 씨는 2022년 자기 밭에서 정착민에게 팔이 부러지도록 맞고 감옥에 갇혔다. 폭행당하는 와중에도 그는 곁의 아들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고 소리쳤다. 풀려난 뒤에도 그는 매일 그 밭으로 나간다. 3년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땅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나이든 자신에게는 작물을 심고 땅을 가꾸는 것이 투쟁이라고 그는 말한다. 열두 살 모아예드는 트랙터가 부서진 뒤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침마다 양에게 먹이를 주고 당나귀에 농기구를 싣고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간다. 그의 동생 열한 살 이삭은 그날 학교에서 배운 문장을 작가에게 물었다. 뭘 하는 걸 좋아하세요? 되물었을 때 아이가 한 대답이 이와 같았다. “I like Palestine.”
우리는 학살과 인종청소와 가옥 파괴라는 말에 이미 무감각해졌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인 ‘불법 정착촌’이라는 말에는 더욱 무감각하다고 작가는 쓴다. 정착촌이 하나 생긴다는 것은 지도에 마을이 하나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땅에 갈 수 없게 된 사람이 생긴다는 뜻이고, 마을의 양이 죽고 올리브나무가 불타고 사람들이 끝내 떠난다는 뜻이다.
이 특집의 이름은 균열이지만, 그 균열 사이로 우리가 끝내 보아야 하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사람이다.
전쟁을 끝내는 일은 협상 테이블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해체하는 일은 다른 자리에서 시작된다. 통계로 뭉뚱그려진 얼굴들을 하나씩 되찾는 일이다. 이란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는 없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도 없다. 상냥한 사람과 무례한 사람, 페미니스트와 보수주의자,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양을 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평범함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음 전쟁의 명분을 미리 승인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미 나와 있다. 적어도 하페즈를 위한 것도, 테헤란의 어머니를 위한 것도, 이삭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서 이 시대를 기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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