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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잔치
지워진 이름, 노동자 입술만 달싹인 노래 용지의 파동, 금기를 넘어서 모시 적삼과 반팔 조끼 팬티가 젖은 줄도 모르고 자갈마당의 트라이앵글 불어 올리자, 서남풍 붉은 머리띠를 두른 가을 소풍 인센티브의 덫 자굴에서 두륜까지 신당역 2번 출구 찰나의 깃발, 영원한 선언 집들이 마당의 활극과 촌극 붉은 능선, 푸른 넋 오월의 깃발과 거부된 시험지 붉은 함성과 잿빛 폭풍 싸울아비들의 행진 어둠 속의 포위망, 흩어지지 않는 대오 천막교실의 약속 살 꽃처럼 피어나는 붉은 마음들 해임 날개라도 단 듯이 텅 빈 백비에 새긴 고해성사 수신 불능 번호를 지우며 웃물을 바꿔야 낫을 벼리는 시간 노천극장의 전사들 궤도를 이탈한 밤 보이지 않는 올가미 엇갈린 결의, 멈추지 않는 파업 투쟁 찢긴 깃발, 꺾이지 않는 사람들 겨울을 뚫고 솟는 청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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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왜 노동자야? 법령에 따라 움직이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이지.’ 검정 사인펜 촉이 하얀 종이 위를 거칠게 문질렀다. ‘노’라는 글자의 머리가 뭉개지고, ‘동’의 이응이 시커먼 잉크 속에 잠겼다. 그 위에 꾹꾹 눌러 쓴 ‘근로자’라는 글씨는 덧칠된 잉크 때문에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나 덧칠된 검은색 너머로 여전히 ‘노동자’라는 글자의 획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의 눈을 찔렀다. 수련회를 가기 위해 속속 모여든 간부들이 그의 사인펜 덮어쓰기 작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워진 이름, 노동자」중에서 한 손씩 차례로 내밀고, 두 손을 연거푸 찌르고, 한 팔씩 뻗어 올린 후 머리 위에서 손뼉을 두 번 치는 ‘지게차 율동’은 간단해서 금방 손에 익었다. 무거운 하중을 견뎌내며 적재물을 들어 올리는 지게차의 강인한 갈퀴처럼, 두 팔을 허공으로 힘껏 뻗어 올리는 그 동작은 수십 년간 공직사회를 짓눌러온 낡은 관행과 침묵의 무게를 단숨에 걷어차 올리는 해방의 몸짓이었다. ---「팬티가 젖은 줄도 모르고」중에서 수강은 월급 명세서 위에 선명하게 찍힌 ‘노조 건설 기금 10,000원’을 읽으며 가슴이 북받쳤다. 1만 원. 누군가에겐 술 한 잔 값이지만, 수만 명의 결의가 모이면, 이 돈은 ‘공무원노조’라는 기관차를 움직일 연료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원천징수 동의서와 함께 받은 노조 결성 서명은 국가의 ‘관리 대상’에서 스스로가 ‘행정의 주인’으로 거듭나겠다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주권 선언이기도 했다. ---「신당동 2번 출구」중에서 수강은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랫말을 곱씹었다. 10년 공직 생활 동안 그녀는 늘 누군가의 ‘은 주무관’이거나 민원인의 ‘저기요’였다. 조직의 거대한 톱니바퀴, 혹은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인력으로만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 밤, 이 뜨거운 함성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동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어깨를 나란히 한 수천 명의 동지들.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다는 자각이 가슴 저릿한 결기로 피어올랐다. ---「어둠 속의 포위망, 흩어지지 않는 대오」중에서 기후는 글자 한 자 없이 매끄럽게 깎인 백비의 여백을 응시하며, 명절 떡값과 부정부패의 유혹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지난 1년을 되짚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선생의 결백 앞에서, 이제 그들은 51건의 치부를 고해성사해야 했다. 기후에게 그 텅 빈 비석은 마치 ‘진정한 청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거대한 질문지처럼 다가왔다. 바스락, 누군가 긴장한 듯 봉투를 쥐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기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부장들을 마주했다. ---「텅 빈 백비에 새긴 고해성사」중에서 기후에게 내려진 체포령은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정보병이던 아들은 신원조사에서 탈락해 보직을 잃고 계란판으로 실내 방음벽을 설치하는 허드렛일로 내몰렸다. 고향인 강진 군청에 근무하는 두 처남에게도 경찰들이 찾아와 특진 기회를 달라며 매형과 매제의 행방을 묻는 황당한 압박이 이어졌다. 국가는 가장 보호해야 할 울타리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기후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가족의 일상이 감시당하는 현실 앞에서, 이제 이 싸움은 단순히 노동조건의 개선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싸움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낫을 벼리는 시간」중에서 다음 날 새벽, 철거된 사무실 자리에 천막을 설치하고 사무국장과 쟁의부장이 ‘지부 사무실 회복’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장은 실·과장과 읍·면·동장, 시정자문위원을 동원해 천막 철거에 나섰다. 천막이 뜯겨 나가려는 순간, 쟁의부장이 천막에 매단 줄에 자신의 목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동원된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천막을 밀어제쳤다. 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쟁의부장의 목을 옥죄며 그의 몸을 허공으로 끌어 올렸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철거에 나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막 기둥을 밀어붙였다. ---「찢긴 깃발, 꺾이지 않은 사람들」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