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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후 구상과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중국 공산화, 한반도 분단 그리고 6·25전쟁
권영근 저
시대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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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목 차
저자 서문
제1장 미국의 전후 대전략과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제1절 미국의 전후 구상
제2절 미국의 전후 목표
1. 자유시장 경제체제 구축
2. 유라시아대륙을 미국이 아닌 또 다른 세력이 주도하는 현상 저지
제3절 미국의 전후 질서 개편 논리
1. 전후 대소(對蘇) 견제의 중요성: 스파이크만의 림랜드 이론
2. 전후 대중국(對中國) 견제의 중요성: 세력균형 이론
제4절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의 전략과 난제
1.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의 중요성과 현실적 난제
2.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방향
3. 은밀하게 진행된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4.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과정
5. 미국 주도의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종합

1부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중국 공산화와 한반도 분단)의 태동

제2장 소련군 대일전쟁 참전의 명분과 실리
제1절 루스벨트/트루먼 행정부의 소련군 대일전쟁 참전 유도 정책
제2절 소련군 대일전쟁 참전: 전승 목적으로는 불필요
제3절 소련군 참전을 통한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1. 얄타 합의의 핵심 쟁점은 중국 및 한반도 관련 사안
2. 주도면밀하게 사전 기획된 얄타 합의
3. 소련군 대일전쟁 참전과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제3장 38선 획정과 한반도의 지리적 분단
제1절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정책의 전략적 동기
1.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인식
2. 2차 세계대전 참전 초기부터 기획된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
3.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원한 이유
제2절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38선 획정의 배경
1. 미국이 38선 중심으로 한반도를 획정한 이유
2. 미군의 한반도 주둔 보장을 겨냥한 미국의 열망
제3절 38선 획정 시점에 관한 역사적 재조명
1. 38선 획정 주역들의 성향 분석
2. 38선 획정 주역들의 상반된 증언
3. 각 주장의 타당성 검증
4. 러스크와 링컨 증언의 해석과 한계

제4장 핵무기 투하: 전후 대소(對蘇) 봉쇄의 전주곡
제1절 핵무기 투하: 일본 항복을 위한 군사적 필요성 논란
1. 연합국의 천황제 인정 여부가 일본 항복의 관건
2. 미 안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 핵무기 사용 무용론
3. 트루먼의 천황제 허용 결심과 사전 천명 거부
4. 트루먼의 핵무기 투하는 일본 항복이 아닌 또 다른 목표를 겨냥
제2절 핵무기의 외교 및 전략적 의미
1. 핵무기 개발 여부를 1급 비밀로 유지한 루스벨트
2. 대일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을 염두에 두었던 루스벨트
3. 대소 외교정책의 지렛대로 기획된 핵무기
4. 소련군 참전 직전 핵무기 투하 기획
제3절 핵무기 투하 결정과 대소 견제 의도
1. 핵무기 투하 이유에 관한 기존 학설의 한계
2. 트루먼의 핵무기 투하에 관한 새로운 시각

2부 봉쇄체제 고착화: 한반도 분단 중간 단계

제5장 남한 단독정부 수립 대비 반공(反共) 성향 통치기구 조직
제1절 자주적 세력 배제와 친미적 세력 조형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성격
2.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선포와 미군정의 탄압
3. 친미적인 정치 조직 지원
4. 이승만의 발굴과 정부 조직의 신속한 구축
제2절 반공 성향 국가 기구의 조직화
1. 법과 질서 유지 기관 조직
2. 군 조직

제6장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안 무력화 내막
제1절 조선 독립 문제를 둘러싼 주요 행위자들의 시각
1. 하지 장군 중심의 미군정
2. 미 국무부
3. 소련
4. 조선인
제2절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안에 대한 각 진영의 역동적 반응
1.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안
2. 주요 행위자들의 정치적 대응과 영향력 경쟁
제3절 남한지역 반탁(反託) 운동 하지가 독자적으로 주도한 것인가?
1. 육군 참모총장 아이젠하워의 반응
2. 소련의 반응
3. 미 국무부의 반응
4. 하지의 반응
제4절 트루먼: 하지의 모스크바삼상회의 합의안 무력화 노력 지원

제7장 억지와 방관의 이중주: 북한군 남침 대비 비상 대응계획
제1절 반공 성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1.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
2.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제2절 남한지역의 통일 지향 세력 제거
1. 미군이 진압 계획수립, 한국군과 경찰이 계획 이행
2. 미국이 트루먼 대통령 차원에서 이들 사건을 강경 진압한 이유
제3절 남한지역 포기 천명과 이면의 비상 대응계획 수립
1. 한국을 포기할 것만 같은 태세 유지
2. 북한군 남침 대비 비상 대응계획 수립

제8장 분쟁의 조건 형성: 북한군 남침 유도 전략의 전모
제1절 주한미군 철수와 전략적 공백의 연출
1.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북한군 남침 가능성 증대
2. 관련 요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주한미군 철수
3. 주한미군 철수 이후의 한국의 안보적 취약성
제2절 남북한 전력 불균형 조장과 북한군 남침 환경 조성
1. 북한군 전력 증강 현황
2. 미국의 한국군 전력 증강 요청 거부
제3절 전쟁 발발 필연성에 대한 한국 정부의 기정사실화
1. 선(先)남침 수용 명분을 이승만에게 주입
2. 전쟁 발발 책임 논란을 둘러싼 국제적 정당성 확보 추구
제4절 소련의 북한군 남침 허용 결심을 자극한 전략적 유인 구조

3부 전후 구상의 변곡점: 중국 공산화 중간 단계

제9장 연립정부의 허명과 중국 공산화의 이점
제1절 중국의 연립정부가 구현 불가능한 개념인 이유
1.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본인 중심의 완벽한 중국 통일 염원
2. 중국의 연립정부 수립 방안에 소련 찬성, 미국 내심 반대
제2절 동북아지역 세력균형 관점에서 본 중국 공산화의 효용
1. 미국: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중국 공산화 방안 연구
2. 중국 공산화의 이점: 실증적 접근
제3절 루스벨트 정부가 연립정부론을 고수한 정략적 명분

제10장 대륙의 향방: 중국 공산화의 전략적 배경
제1절 중공군의 만주 진입을 지원한 미국과 소련
1. 소련의 중공군 만주 진입 노력 지원
2. 미국의 중공군 만주 진입 노력 지원
제2절 국공내전을 조장하기 위한 마셜의 전략
1. 트루먼: 장제스에 대한 무조건 지원이란 거짓 약속 천명
2. 마셜의 국민당 군대 만주 진입 지원: 국공내전 조장 목적
제3절 국공내전에서의 마오쩌둥 승리 보장
1. 마셜의 국공내전 조장과 중공군 지원
2. 스탈린의 중공군 지원 결심/미국의 국민당 군대 지원 중지 결심
제4절 중국 공산화 관련 주요 의문 사항

제11장 이간과 봉쇄: 트루먼의 소련 중국영토 이권 반환 종용 전략318
제1절 아태지역 방어선 선언과 한국·대만 제외의 본질
1.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지역
2. 미 국무부가 한국과 대만을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한 이유
제2절 공산 중국의 대소 밀착 종용
1. 미국: 마오쩌둥의 미중관계 정상화 요청 거부
2. 공산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안보 위협
제3절 애치슨의 또 다른 노력: 소련 제국주의 프레임을 통한 심리전 등
1. 공산 중국을 소련의 하수인이라고 맹비난
2. 미중관계 정상화 가능성 운운
3. 공산 중국이 대만을 조만간 점령할 수 있을 것처럼 발언

4부 충격과 패권 확립: 중국 공산화, 한반도 분단의 완성

제12장 6·25 전쟁의 원인과 기원
제1절 서론
1. 기존 연구 검토
2. 전쟁과 여론 동원
제2절 6·25전쟁 원인: 미군 재무장 필요성
1.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미군의 격돌을 추구한 트루먼
2. 마오쩌둥의 미중관계 정상화 노력 차단이 필요했던 스탈린
3. 미군의 38선 북진을 용납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
4. 적화통일을 자신한 김일성
5.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미측 요인
제3절 6·25전쟁 기원: 기밀문서(NSC-48/2) 유출
1. 1950년 1월 1일의 뉴욕타임스지 특종 보도(NSC-48/2의 요약본)
2. 미국이 대소 선전 선동 노력을 극비문서 형태로 전달한 이유
3. 미군 재무장 노력과 NSC-48/2
제4절 스탈린의 중국영토 이권 포기와 대중국 영향력 복원 노력
1.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 합의
2. 마오쩌둥에게 다가가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
3. 미중 화해를 무력화하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

저자 후기

저자 소개 1

공군사관학교(26기), 연세대학교 정치학박사, 미 오레건주립대학 전산학박사, 공군대령(예), 공군사관학교 교수, 국방대학교 합동교리 실장, 국방과학연구소 데이터통신실장, 한국국방연구원 감사(역임), 『북한 핵무장의 감춰진 진실』(시대출판사, 2023) 외 7권의 저서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한국국방연구원, 2020) 외 50여 권의 역서. “한국의 국방정책 발전 방향”(전략연구, 2023) 외 국가안보 관련 100여 편의 논문과 연구 보고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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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539쪽 | 182*250*35mm
ISBN13
9791198355515

책 속으로

Ⅰ. 저자 서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에는 몇 가지 주목할만한 특징이 있다. 6·25전쟁은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하게 전개된 분쟁이자 불필요하게 장기화된 전쟁이었다. 나아가 고립주의를 표방하던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정전 이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6·25전쟁은 한반도 역사는 물론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하게 전개된 분쟁이었다. 당시 투하된 네이팜탄과 일반 폭탄의 양은 태평양전쟁 시기를 상회할 정도였다. “6·25전쟁에서는 32,357톤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 그런데 이는 1945년 일본에 투하된 규모의 2배였다.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구(戰區)에 투하한 폭탄(503,000톤)보다 훨씬 많은 양(635,000톤)을 한반도에 투하했다.”
3년 동안 진행된 이 전쟁으로 적어도 300만 명 이상의 남북한 주민이 사망했으며,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남북한 인구가 3,000만 명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전쟁 발발 당시를 기준으로 인구가 7,000만 명 이상이었던 일본이 수행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총사망자가 300만 명 미만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평양, 원산과 같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이미 1950년 말경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당일까지도 유엔군 항공기는 이들 도시에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1951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6·25전쟁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먹은 것을 토할 지경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지속하면 인류 역사상 제가 들어본 적이 없는 형태의 대학살을 자행하게 될 것입니다.”
미군 조종사들은 흰색 옷을 입은 사람, 다시 말해 조선인들을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이 전쟁이 남한과 북한 주민에게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6·25전쟁은 필요 이상으로 장기간 진행되었다. 조기에 종료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미국이 이 같은 기회를 차단했다. 예를 들면, 미국은 북한군의 남침 준비 현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 준비에 대해 사전 경고를 보냈더라면 남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맥아더의 제언을 수용하여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북한군의 남침을 한강에서 저지했더라면 전쟁을 더 조기에 종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미군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시키되, 북한군을 한강이 아닌 낙동강에서 저지하기로 이미 1949년 9월 결심한 바 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이 유엔군의 압승으로 종료될 것으로 보였던 1950년 9월 25일, 소련 외무성 차관 야곱 말리크(Yakov A. Malik)는 평화 중재를 제안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의 주요 인사들은 이 같은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들은 6·25전쟁이 조기에 종료될 경우, 미군 재무장 노력이 차질을 빚을까 우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과 공세 정책에 대항하여 오랜 기간 미국의 능력 동원과 미군 재무장을 준비해 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예상되는 완벽한 승리로 이 같은 미국의 진지한 노력이 중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1951년 7월 10일부터 미국은 공산 측과 협상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논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협상이 성사될 기미가 보일 때마다 교묘한 방식으로 협상을 무력화했다. 예를 들면, 1952년 2월 미국은 전쟁의 총성이 멈춘 즉시 포로를 본국으로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는 1949년 8월 제정된 제네바협약을 위배해 가며 자유의사에 입각한 포로송환을 주장했다. 트루먼은 포로의 자유 송환을 새로운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정전 시점이 적어도 17개월가량 지연되었다. 포로의 자유 송환 원칙 수용을 공산 측에 강요할 목적으로 항공력을 이용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는 등 전쟁을 강행한 결과, 상당한 인명이 추가로 희생되었다.

한편 6·25전쟁은 미국을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시켜준 사건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와 소련 전문가 찰스 보렌(Charles E. Bohlen)은 6·25전쟁을 미국이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계기이자 냉전 승리의 초석을 마련해 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그 효과의 크기로 볼 때, 어떤 사건도 6·25전쟁을 대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의 참전 여부 등 6·25전쟁 관련 주요 의사를 결정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또한 6·25전쟁이 미국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은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평시에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참혹하게 전개되는 6·25전쟁을 이용하여 이 같은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소련 중심의 공산 세력이 미국의 안보에는 물론이고 서유럽, 북아메리카 등 전 세계 주요 지역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영미권 국가들의 관계가 강화되었고, 독일과 일본이 국제사회에 재차 등장하게 되었으며, 미국과 나토국가들의 재무장과 더불어 미일동맹과 나토가 한층 강화되었다. 즉, 6·25전쟁을 통해 미국의 냉전 승리를 위한 초석이 마련된 것이다.

이 같은 6·25전쟁은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프로이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단순히 살상과 파괴를 초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목표에서 군사적 목표가 도출되고 군사적 목표를 겨냥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되는데, 정치적 목표는 결국 전쟁 원인(Cause)에 기인한다. 이 같은 이유로 전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업은 바로 전쟁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전쟁 원인이 전쟁을 초래한 조건을 형성하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요인’이라면, 전쟁 기원(Origins)은 전쟁을 직접 촉발한 특정 ‘사건’을 지칭한다. 전쟁을 대화재에 비유한다면, 전쟁 원인은 손쉽게 점화가 가능한 메마른 불쏘시개로, 전쟁 기원은 그 불쏘시개에 붙은 불꽃으로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의 경우를 보면, 당시 유럽 국가들이 군국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동맹체제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전쟁의 원인이라면,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를 암살한 사건을 그 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수행한 대부분의 전쟁은 그 원인과 기원이 명확히 식별되었다. 예를 들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러우전쟁의 원인을 규명한 『서구사회가 러우전쟁을 초래한 방식(How the West Brought War to Ukraine)』이라는 책이 2022년에 출간되었을 때, 시카고대학의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John Joseph Mearsheimer)를 포함한 미국의 여러 석학이 이를 격찬한 바 있다. 또한 1997년 미 공군의 저명한 사관(史官) 리처드 할리온(Richard Hallion)은 1991년 걸프전의 원인과 이를 통해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국가와 이라크가 추구한 정치적·군사적 목표, 그리고 이들의 전쟁 수행 방식을 다룬 『이라크에 몰아친 폭풍: 항공력과 걸프전(Storm over Iraq: Air Power and the Gulf War)』이라는 권위 있는 저서를 출간했다. 반면에 6·25전쟁은 정전협정 상태로 종료된 지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이 전쟁의 원인은 물론이고 기원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6·25전쟁의 원인 및 기원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주요 관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관점은 6·25전쟁을 남한과 북한의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다. 두 번째 관점은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화로 자유 진영에 대항한 공산권의 세력이 비교적 막강해지면서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김일성(金日成)의 남침을 승인해주었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관점은 애치슨이 1950년 1월 12일 미 내셔널프레스센터 연설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한 사실을 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들은 6·25전쟁 관련 비밀자료들이 대거 해제되면서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

네 번째 관점은 냉전 종식 이후 6·25전쟁 관련 소련 측 자료가 대거 비밀 해제되면서 등장했다. 스탈린이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전 대가로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확보한 만주를 포함한 중국영토 관련 이권을 1950년 1월 2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자, 중국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우려하여 이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주기로 결심했다는 주장이다.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되돌려받기 위한 새로운 중소조약을 체결할 목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1949년 말경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이 같은 중소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비밀 해제된 소련 자료들에 따르면, 1950년 1월 2일 스탈린은 이러한 성격의 새로운 중소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했다. 학자들은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로 만주 등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되돌려받은 마오쩌둥이 타이완섬까지 점령한 후 미국을 포함한 지구상 주요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미소 사이에 중국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질 가능성을 스탈린이 우려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를 차단하고자 스탈린이 북한군의 남침을 허용해주기로 결심했다고 해석했다.

이들 학자는 스탈린 입장에서 북한군의 남침이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고 생각했다. 즉, 북한군을 남침시키면 미군이 참전하여 38선 너머로 북진할 것임을 스탈린이 이미 내다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면 한반도가 남한 중심으로 통일되어 미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에 주둔하게 될 것이고, 이 경우 공산 중국의 대소(對蘇) 의존성은 대폭 증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공군이 참전하여 한반도에서 미군과 격돌하더라도 중국의 대소 의존도가 심화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또한, 만에 하나 북한군의 남침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서 소련의 함정이 부산이나 제주도와 같은 남한의 해안 지역을 통해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1950년 1월 2일 스탈린이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게 하는 성격의 새로운 중소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그 요인을 주로 마오쩌둥의 역할에서 찾았다. 마오쩌둥의 외교적 노력으로 인해 스탈린이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상실한 대중국 영향력을 복원하기 위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본 것이다. 션즈화(沈志华)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조약을 체결하지 못한 채 귀국할 경우, 본인과 중국공산당의 입지가 약화될 수 있음을 들어, 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Ivanovich Mikoyan) 부총리를 비롯한 스탈린 정부 관료들을 설득함으로써 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세르게이 곤차로프(Sergei N. Goncharov)는 1950년 1월 1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마오쩌둥의 발언, 즉 모스크바 방문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면 일정을 앞당겨 조기 귀국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스탈린이 1월 2일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을 결심하게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6·25전쟁 참전용사이자 오랜 기간 중국 문제를 연구해온 조지워싱턴대학의 리처드 쏜턴(Richard C. Thornton) 교수는 마오쩌둥이 베이징의 류사오치(劉少奇)와 나눈 1949년 12월 19일 자 전화 통화에서 미중관계 정상화가 임박한 것처럼 스탈린이 오인하도록 정략적으로 유도했으며, 당시 소련의 통화 감청이 스탈린이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과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데이비드 추이(David. Tsui)는 만주 등 중국영토 관련 이권을 포기하는 형태의 새로운 중소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의 유고슬라비아처럼 공산 중국이 소련과의 관계에서 독자 노선을 추구할 것이라는 마오쩌둥 정보참모의 협박에 스탈린이 굴복하여 새로운 유형의 중소조약을 체결해주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들은 중국영토 관련 이권이 소련에 지니는 본질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 모스크바가 몇 차례 화를 입었던 경험이 있는 소련은 자국 영토 주변에 상당한 규모의 완충지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여겼다. 스탈린이 2,700만 명이라는 막대한 자국민의 희생을 감수하며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한 배경에도 이러한 완충지대 확보의 필요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은 단순한 영토가 아닌 완충지대로서의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권이자,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확보를 염원하던 만주를 포함한 중국영토 이권을,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했던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설득이나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여 스탈린이 쉽게 포기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부족해 보인다. 영토 이권이란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극단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법이다. 오늘날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두고 대립하는 상황을 보더라도, 이 문제가 단순한 설득이나 협박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관점은 단순한 추정에 불과하며, 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반해 이 책에서는 6·25전쟁의 기원을 마오쩌둥의 외교적 노력이 아닌, 트루먼 행정부의 동북아지역 개편 전략에서 찾고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9년 12월 16일 직후인 12월 23일에 NSC-48/1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제출했으며, 30일에 NSC-48/2를 최종 비준했다. NSC-48/2의 핵심 요약본을 1950년 1월 1일 자 뉴욕타임스 1면에 특종으로 보도되게 했다. 정황상, 이 자료는 트루먼 대통령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직접 흘린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서는 6·25전쟁의 기원을 이 같은 정보 유출로 생각한다. 1948년부터, 특히 1949년 당시 미국의 관심이 소련과 중국을 이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핵심 방안이 바로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 일행과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일행의 1949년 9월 회동에서, 베빈 장관은 만주 등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안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당시 누군가는 이들의 갈등을 조장하는 내용을 1급 비밀문서(Top Secret)로 작성하여 스탈린에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는 NSC-48/2 문서가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만주 등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반환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기획된 문서였을 가능성을, 그리고 트루먼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기밀을 흘린 이유 역시 소련의 중국영토 관련 스탈린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려는 성격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탈린이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게 되면 대중국 영향력을 복원하기 위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NSC-48/2 문서가 스탈린의 김일성 남침 승인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 학자는 필자뿐만이 아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박사와 미국의 러시아 전문가 케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역시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키신저와 웨더스비는 미 국무부 내의 소련 간첩들을 통해 이 문서가 스탈린에게 곧바로 전달되었으며, 스탈린이 미국이 한반도를 자국의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한 내용이 문서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주장은 이미 그 타당성을 잃었다.

필자가 트루먼 대통령이 NSC-48/2라는 극비문서를 작성한 뒤 이를 은밀히 스탈린에게 노출하는 방식으로 소련이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해당 문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그 내막을 잘 알 수 있다. 문서에서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겉으로는 친밀해 보일지라도 만주를 포함한 중국영토 관련 소련의 이권 문제를 두고 상호 대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스탈린이 해당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을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정치·경제·외교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당시 장제스(蔣介石)가 점거하고 있던 타이완섬을 마오쩌둥이 1950년 이내에 점령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처럼 마오쩌둥이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반환받고 타이완섬을 장악하는 순간 미국이 공산 중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한편, 1945년 2월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전 조건으로 스탈린에게 만주 등 중국영토 관련 이권을 할애해주기로 합의했다. 이때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전후 마오쩌둥의 중공군이 만주 관련 소련의 이권을 지켜주는 것으로 구두 합의를 보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같은 합의에 따라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입했으며, 1946년 5월에는 중국 본토에서 대부분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즉,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1949년 12월 말경에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에 소련군이 거의 주둔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경우, 중국 본토 공산화에 성공한 마오쩌둥이 스탈린으로부터 이들 이권을 손쉽게 회수할 수 있었을 것임을 의미한다. 만주를 비롯한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되돌려받고자 하는 마오쩌둥과 중국 인민들의 강렬한 염원을 스탈린이 끝내 수용하지 않을 경우, 마오쩌둥이 미국과 손을 잡고 이들 이권 포기를 압박해 올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 여세를 몰아 타이완섬까지 장악한 후 마오쩌둥과 트루먼이 미중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미소 사이에서 중국이라는 완충지대가 소멸할 위험이 있었다. 이는 스탈린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이 문서를 확인한 스탈린으로서는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는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에 합의하는 대신, 대중국 영향력을 복원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북한군을 남침시키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949년 말 트루먼의 미국이 NSC-48/2라는 극비문서를 통해 스탈린이 소련의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게 만들고, 나아가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도록 유도하겠다고 결심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미국이 구상한 전후 세계질서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미국은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1일에 이미 참전을 결심했다. 참전을 통해 전후 세계 곳곳에 미국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소련 중심의 공산 세력을 봉쇄하고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확립하려는 장기적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후 구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동북아지역이었다. 전후 중국이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후 정치적으로 안정된 중국이 아태지역에서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과 미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미국의 저명한 지정학자인 예일대학의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icholas John Spykman) 교수는 1942년 1월 발간한 『세계정치에서의 미국의 전략(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과, 사후 동료들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1944년 1월 발간한 『평화의 지리(The Geography of the Peace)』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스파이크먼은 미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운 중국이 향후 동북아지역 안보는 물론 미국의 안보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동북아지역의 세력균형을 위해 전후 미국이 일본과 연대하여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견제(Balance)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스파이크먼의 이 논리를 바탕으로 1943년 1월 미국의 저명한 정치 평론가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이 저술한 『미국의 대외정책: 공화국의 방패(U.S. Foreign Policy: Shield of the Republic)』는 당대 엄청난 인기 도서가 되었다. 리프만 역시 중국의 산업이 발전하여 세력이 막강해질 경우, 동북아지역과 미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들의 저서는 미군 장교를 비롯한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이 대소 봉쇄 개념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후 미국은 대소 봉쇄를 위해 만주를 포함한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보았으나, 그 통일 주체가 장제스 중심의 국민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1940년대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미국에 우호적인 장제스를 중심으로 전후 중국이 통일될 경우, 오히려 중국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중국을 미국 중심 질서에 편입시켜 과학기술까지 발전하도록 방치하면, 향후 미국의 안보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전후 효과적인 견제가 가능해지려면, 오히려 중국이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공산화되어 통일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마오쩌둥과 중국인들이 강렬한 중화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공산화된 중국일지라도 결코 소련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오히려 공산 중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될수록 소련과 더 격렬하게 대립할 것이며, 이처럼 안정된 공산 중국이 오히려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유용한 방파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산 중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스탈린이 만주 등 중국영토 관련 이권을 마오쩌둥에게 반환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이처럼 정치적으로 안정된 공산 중국을 자국의 막강한 항공력과 해상전력을 활용해 일본을 포함한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어렵지 않게 봉쇄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한편 미국의 전략가들은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과 결속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에 미군을 장기간 주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한반도를 자국의 핵심 부위를 겨누는 날카로운 비수(匕首)와 같은 지역으로 여겼다. 전략가들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이 일본의 적성국으로 넘어갈 경우, 일본이 미국의 안보 공조 노력에 협력하기보다는 중립 노선을 추구하며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한반도 전체가 일본의 적성국 수중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미국과 결속하는 경우, 이 같은 결속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과 손을 잡고서 공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1940년대 당시 조선인들의 정치적 성향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을 고려해볼 때, 통일 한반도는 결국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전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분단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중국 공산화와 한반도 분단이라는 밑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전이 필수적이었다.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이 증언했듯이, 순수하게 일본을 패망시키는 목적에서만 본다면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전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핵무기 투하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련의 참전을 유도함으로써 미국은 만주 등 중국영토 이권과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이권을 스탈린에게 자연스럽게 보장해줄 수 있었다. 이 이권 보장이야말로 중국 본토 공산화와 한반도 분단을 유도하기 위한 필수적인 포석이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 진짜 이유는 대일전쟁에 참전한 소련군이 얄타회담에서 허용해준 이권 이상을 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면, 38선 이남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미국의 거대 구상으로 인해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중공군이 승리하면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1949년 말경에는 한반도 38선 이남 지역에 한국이, 이북 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된 가운데 김일성의 남침이 항상 스탈린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미국의 전후 구상 구현 측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전통적으로 미국 정부의 해외 문제 개입에 강하게 반대해 온 미국 시민들의 여론이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유라시아대륙 주변의 주요 거점에서 소련을 포함한 공산 세력을 봉쇄하는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오랜 고립주의 정서에 젖어 있던 미국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공산 세력의 위협에 평시부터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미국의 안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도록 해야 했다. 3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6·25전쟁이 바로 그러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전후 대소 봉쇄체제 구축과 주한미군의 영구 주둔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중국의 공산화를 방조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장제스 정부의 극심한 부패로 대소 봉쇄 파트너로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했다. 물론 이러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미국에 우호적인 장제스 중심으로 중국이 통일되면, 38선 이북에 들어설 공산 정권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 있었다. 이 경우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의 남한 주둔을 열망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북한군의 남침에 대응해 미군이 38선 너머로 북진하더라도, 장제스의 중국은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 중국군과 미군이 직접 충돌함으로써 미군의 대대적인 재무장과 확고한 대소 봉쇄체계를 구축하려던 트루먼의 대전략이 차질을 빚게 될 상황이었다.
1949년 말에 작성된 NSC-48/2라는 문서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중국영토 이권을 포기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공산 중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고, 한국인들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간절히 원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동시에 미국 시민들에게도 커다란 안보적 충격을 주어, 결과적으로 전 지구적인 대소 봉쇄체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트루먼이 6·25전쟁을 필요 이상으로 장기화하며 참혹한 방식으로 수행한 본질적인 이유는, 이 전쟁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 우방국 국민에게 공산주의의 실존적 위험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6·25전쟁의 원인은 전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구축이 가능하도록 자국민과 동맹국 국민에게 공산주의의 위협을 각인시키기 위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장기간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세계 4대 강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교차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이 땅이 그 참혹한 전장(戰場)으로 선택된 것이다. 6·25전쟁의 기원은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NSC-48/2 문서의 핵심 내용을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흘렸다는 사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국은 전후 미일 공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장기간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만약 미국이 모종의 전략적 이유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6·25전쟁을 획책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눈치채게 된다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거센 반대에 부딪혀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인들이 6·25전쟁의 진짜 원인과 기원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도록 매우 정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전쟁을 유도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6·25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전쟁의 원인과 기원에 대한 규명이 그토록 어려웠던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내막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 미국은 참전을 결심하며 전후 미국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대전략을 세웠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본격 개입한 미국은,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6·25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전후 세계 구상을 완벽히 구현해 냈다.
이 책에서는 전후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 중국을 공산화하고 한반도를 분단시켰으며,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할 수밖에 없도록 정교하게 유도한 미국의 보이지 않는 노력을 미국의 전후 구상, 그리고 소련·중국·한반도를 겨냥한 미국의 핵심 정책들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 4절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의 전략과 난제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의 지정학적 논리에 따르면, 전후 미국은 일본과 결속하여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구조로 동북아지역의 지정학적 질서를 전면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동북아지역 질서를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로와 방법을 통해 개편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1.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의 중요성과 현실적 난제
미국은 전후 대소 견제 차원에서 만주를 포함한 중국 본토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련이 만주를 비롯한 중국영토를 통제하게 되는 경우, 소련의 국력과 세력이 지나칠 정도로 막강해지면서 전후 대소 견제가 극도로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 국무부는 분단된 중국을 소련이 지배하게 될 것이며, 이 같은 중국이 국가 간에 긴장을, 결과적으로 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러시아의 저명한 학자인 볼프 모티레프(Volʹf Evnovich Motylev)가 1940년 6월에 저술한 『2차 제국주의 전쟁의 태평양 매듭(The Pacific Knot of the Second Imperialist War)』에 따르면,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하고 독립된 중국을 선호했지만, 자국에 위협이 될 정도로 강력하고 독립적인 중국의 등장은 원치 않았다. 이는 강력한 통일 중국이 향후 중·러 간에 심각한 갈등 요인으로 부상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만주를 포함한 중국의 통일은 대소 견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문제는 통일된 중국과 미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 이 같은 중국을 미국 중심의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편입시켜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방대한 인구와 영토의 중국이 자유시장 경제체제 편입을 통해 과학기술 능력을 함양하면, 동북아지역에는 물론이고 미국에도 위협적일 수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스파이크먼은 전후 중국을 견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전후 중국 견제가 가능해지도록 동북아지역 질서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필요성을 스파이크먼은 다음과 같이 암시했다.

미국의 안보는 어느 정도의 세력균형에 좌우되었습니다. 따라서 전후 조정 과정에서 미국의 평화와 존엄에 위협이 되는 형태의 세력균형을 설정하면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월터 리프만은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우리는 일본 패망이 동아시아 지역이 맞이할 심오한 역사적 변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적어도 지구 절반의 안보를 좌우하는 동아시아의 안정을 현재 달성하기 어렵다면, 충분히 합법적인 ‘세력의 조직화(질서 개편)’ 과정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향후의 변화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현실적인 장벽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등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형성된 미국인들의 정서였다. 당시 대다수 미국인은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로 증오했던 반면, 연합국의 일원이던 장제스의 중국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과 합세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구도로 동북아지역 질서를 개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스파이크먼은 이러한 난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미국의 극동지역 개입은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여론은 극동지역의 세력균형이 이미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운 지 오래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이 과거 유럽대륙을 향해 추구했던 것과 같은 개입 정책을 극동지역에서도 추진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만을 심각한 위협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나 극동지역에서 확실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향후 일본에 대해 일종의 보호적인 정책을 취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전후 미국과 일본이 결속하여 중국의 부상을 효과적이고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방안이 도출되었다. 그 핵심은 ‘중국 본토의 공산화 통일 종용’과 ‘한반도의 38선 이북 지역 공산화 및 분단 고착화’였다. 나아가 38선 이남 지역을 미국의 독점적인 영향권으로 묶어두는 거대한 전략적 구상이었다.

2.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방향
스파이크먼과 리프만은 전후 동북아지역에서 미국이 일본과 합세하여 소련과 중국을 견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처럼 하고자 하는 경우 동북아지역에서의 세력균형 유지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및 유지 과정에 미국이 직접 관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이들의 논리에 따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시점부터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 작업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본토 공산화와 한반도 38선 분단을 결심했다. 태평양을 겨냥한 중국과 소련의 세력 팽창 노력을 아태지역 도서와 일본을 중심으로 저지해야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미국이 동북아지역 질서 개편과 유지 측면에서 주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아태지역에서의 일본과 태평양 도서 지역 중심의 공산 세력 봉쇄
미국은 일본을 아태지역에서의 대소 봉쇄체계의 보루(堡壘)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전후 동북아지역에서 일본을 미국의 세력 기반으로 확보하여 유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일본의 전후 개혁을 자국 독자적인 영역으로 간주했다. 일본의 침략행위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국가들을 적절히 배상해야 하는 도덕적인 문제와 공산 세력 봉쇄를 위해 일본을 신속하게 재건해야 하는 전략적인 과업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자, 미 국무부는 과감하게 후자인 일본의 신속한 재건 노선을 선택했다.
이미 1943년 7월, 미국의 전후계획위원회(PWC)는 “유엔의 궁극적인 전략 목표가 전후 일본을 일군의 국가들로 구성되는 국제기구의 완벽하고 대등한 회원국으로 조속히 복원시키는 것이다”라고 공식 천명했다. 전후 일본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육성해야 한다는 표현이 1943년 이후 미국의 극동지역 관련 전략 기획 문서에 정기적으로 등장했다. 미 군부는 이때부터 구체적인 일본 점령 및 관리 계획을 수립했다.

태평양전쟁이 종전되기 불과 몇 주 전, 미 국무장관 대리 조지프 그루(Joseph C. Grew)와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은 전후 단기간에 일본 경제와 치안을 재건하기 위한 정밀한 계획을 작성하여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전폭적인 승인을 받아냈다. 이어 3부조정위원회(SWNCC) 역시 전후 미국이 일본을 독점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략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곧바로 승인하여 집행했다.

동시에 미국은 1943년부터 일본뿐만 아니라 과거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아태지역 주요 도서들의 영구적인 점령과 통제를 추구했다. 당시 미 육군과 해군의 전략 기획가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위임통치 형태로 점령했던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미국이 영구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도서 지역의 영구 통제를 통해 강력한 ‘종심(縱深) 방어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될 소련의 해양 진출 노력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합참의장 윌리엄 리히(William D. Leahy) 제독은 미국이 아닌 또 다른 열강이 태평양의 섬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부분적으로나마 통제하게 된다면 미국의 안보가 심각하게 위태로워질 것이라며 언성을 높여 경고했다. 미 합참은 이들 도서의 처리에 관해 여타 연합국과 타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민간 외교 관료들의 유화적인 제안을 전해 듣고 경악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전후 해외 요충지에 다수의 군사 기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들 기지를 선정할 당시 대서양과 태평양 전역에서의 미국의 절대적인 해상 패권 유지를 최우선 지표로 삼았다. 이들은 이미 1944년 초순에 이러한 해외 기지 확보 방안과 관련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의 공식 재가를 받아두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는,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과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이 이들 기지 확보 문제를 중심에 두고 광범위한 전략적 논의를 했다.

이러한 구상 속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길목인 필리핀과 동해·서해 및 동북아의 핵심 산업 지대를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오키나와가 미국의 전후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부상했다. 이곳을 미국의 전략적 최일선 거점으로 삼아, 미국은 아시아의 풍부한 원자재 공급원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동시에 가상 적국이 이들 원자재에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나아가 분쟁이 예상되는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자국 주도로 관리하고, 주요 해상 교통로를 완벽하게 보호하며, 유사시 소련과 중국의 핵심 산업 기반 구조를 겨냥해 자국의 막강한 항공력을 동원한 치명적인 공중 공격을 언제든 감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자 했다. 이러한 미국의 은밀한 전략적 기류를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겠지만, 1945년 9월 마오쩌둥은 미국이 전후 동아시아 지역의 질서를 일본을 중심으로 유지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날카로운 논평을 남기기도 했다

--- 본문 중에서

추천평

통설과 다른 새로운 접근, 방대한 사료, 지정학과 동북아를 감고 도는 강대국들의 수 싸움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보이는 전쟁은 보이지 않는 강대국 간의 전쟁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이면을 통찰하고 뒤집어 보며 새로운 학문적 직관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2차대전 말기 동북아 정세와 이와 연계한 한국전쟁을 새로우면서도 감히 혁명적인 방향에서 조망을 제공할 것이다. 김동기(예비역 육군대령, 육사 31기, 정치학박사) 이 책은 우리가 믿어온 한국전쟁의 상식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해제된 기밀문서와 치밀한 논증을 통해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을 재조명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거대한 전략을 파헤친 역작이다. 장정수(전 한겨레신문 편집인) 전후 동북아 질서를 설계한 강대국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작. 이제껏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얘기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풀어낸 학자의 용기와 양심을 담은 책. 각자도생의 시대에 패권국 미국과 한미동맹을 냉철한 이성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책 공평원(예비역 공군준장, 공사33기, 정치학박사) 미국은 제주 4·3의 무자비한 진압을 왜 그리 독려했을까? 조지 마셜은 왜 38선에 일찌감치 ‘봉쇄라인’을 그었을까? 권영근 박사의 이 책은 상식과 통념을 해체한다. 문서와 자료를 뒤적이며 한 땀 한 땀 재구성한다. 이번에도 주제는 한국전쟁이다. 제대로 돌아봐야 현재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진호(전 경향신문 국제전문기자) 이 책에서는 스탈린의 남침 승인이 트루먼 행정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NSC-48/2 문서 유출에서 비롯되었다는 대담하고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수십 년간 축적된 국제정치학적 안목과 철저한 문헌 고증이 어우러진 이 저작은, 6·25전쟁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이병록(예비역 해군준장, 해사36기, 정치학박사) 오랜 세월, 이념과 강대국의 논리로 덧씌워진 해석을 걷어내고,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은 변화의 첫출발이다. 이 책은 분단과 6·25전쟁 등 한반도 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믿을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병호 (전 내일신문 외교통일팀장) 10. 보도자료 한반도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란 4강의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 지역에 위치하여 있다는 사실로 인해 한국의 선택이 동북아지역 질서는 물론이고 세계 질서에,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어느 국가 국민보다도 국가안보 문제를 감성이 아니고 철저한 이성에 근거하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안보에 관한 한 국익에 따라 신중하고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해방 이후 10년 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예를 들면 제주도 4·3사건 관련 역사 논쟁,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작전통제권 전환과 국방개혁 문제, 평시 군사력 건설과 전시 군사력 운용 문제에 관한 지혜를 찾는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사, 국방사, 육군, 해군 및 공군사 정립 측면에서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저자 후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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