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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게 번지는
붉게 물든 입장권 순례 가라앉지 못한 하루 고잉 백 투 제천 물귀신 잔향 불행해도 죽지는 않았다 금의 문턱 유리 너머 보이는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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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2
다른 곳에 숨거나 흉터를 가리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지만 그럼 내가 고작 흉터 하나 따위에 추락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싫었다. 하지만 안개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난 그저 의림지를 찾아온 것일 뿐이니 내 자존심은 무사했다. p. 37 핸드폰 불빛으로 비추며 안쪽으로 들어가던 도중 구석에 놓인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다른 물건들과 달리 상자에는 자물쇠가 달려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보관한 것처럼 보였다. p. 75 그냥 나에게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가장 1차원적인 방법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이 일을 끝내고… 아주 먼 길을 떠나고 싶어요. p. 62 문제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제부턴가 자꾸만 밤마다 가장 구석진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흐느낌 같았고 또는 여럿이 내는 아우성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면 괴물의 신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형체는 없고 목소리만 들려오는 괴물은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오려 갖은 노력을 했다. 내가 호기심으로 문을 열어줬다간 그 목소리의 진짜 형체와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 p. 101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물속이라는 느낌이 점점 옅어졌다. 몸은 분명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볍고 움직임도 느렸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은 바깥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이라고는 이곳이 80년대의 모습이라는 점이랄까 그뿐이었다. p. 138 어머니는 친부가 따로 있다는 것 외에 말을 아끼셨다. 그러다 보니 내게 친아버지란 그저 ‘존재한다’라는 하나의 정보로 여겨졌다. 어머니께선 당시 친아버지의 이름도 알려주시긴 했지만, 지금은 성조차 기억나질 않는다. p. 150 우혁의 죽음은 별일이 아닌 듯이 지나갔다. ‘가십거리’, 딱 그 정도의 인상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 되면 어르신들이 물가에 가서 놀지 말라고 하는 이유로 우혁은 소비되었다. p. 182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약방을 찾아왔지만, 나는 더 이상 차를 내어주지 않았다. 선의가 언제나 선의로만 남는 것은 아니었기에. 돈을 받고 몸에 맞는 약재를 챙겨주는 것.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전부였다. p. 214 한겨울에 찬바람을 타고 오는 고추 향이 너무 매운 나머지 울면서 콜록거렸다.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지금 참지 못하면 이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내야만 했기에 악을 쓰며 버텼다. 그렇게 봉급날마다 고추시장으로 항상 도망쳤다. p. 233 “너랑 있으면 내가 첼로를 안 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쓸모있다고, 가치있다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내 존재만으로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니까.” p. 291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맴돌았다. 놀이공원 입구 앞을 몇 바퀴를 돌아도 뿌연 담배연기 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노인의 말처럼 어제 만난 노인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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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연애와 가족의 비밀
선의에 대한 의심과 오래된 죄책감 청춘의 눈에 들어온 우리 삶의 복잡한 사정들 김나현의 〈선명하게 번지는〉은 얼굴에 화상 흉터가 생긴 뒤 세상과 거리를 둔 도윤의 이야기다. 도윤은 자신의 흉터도 타인의 시선도 흐려지는 의림지의 안개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던 어느 날, 특수분장 영상을 만드는 서현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잠시 흉터를 가려준 서현과의 만남은 도윤에게 자신을 다시 바라볼 여지를 열어준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삶을 성공이라 믿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다. 김도현의 〈붉게 물든 입장권〉은 의림지 놀이동산을 배경으로 한 공포소설이다. 친구들과 놀러 간 창조는 폐장 후 갇힌 놀이동산의 창고에서 붉은 얼룩이 묻은 입장권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그것을 가져온 뒤,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잇따라 사고가 일어나고 악몽 속에는 훼손된 얼굴의 남자가 나타난다. 입장권의 비밀을 추적하던 창조는 오래전 놀이기구 사고로 알려진 죽음 뒤에 숨은 사건과 마주한다. 즐거웠던 하루의 기념품이 돌아갈 길을 가로막는 저주의 매개가 된다. 김은선의 〈순례〉는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스물한 살 다온의 짧은 일탈을 그린다. 입시에 실패한 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다온은 제천의 할머니 집에서 오래된 편지와 지도를 발견한다. 보물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배론성지에서 낯선 신부를 만나고, 그와 함께 순례길을 오르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낸다.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에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바람이 숨어 있다. 길의 끝에서 다온이 얻는 것은 자기 뜻대로 다음 걸음을 내디딜 용기다. 박지현의 〈가라앉지 못한 하루〉에는 청풍호에 반지를 두고 와달라는 기묘한 의뢰가 등장한다. 사설 잠수부 형식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기차가 오가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옛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의 승강장에는 돌아와 청혼하겠다는 연인을 기다리는 수연이 있다. 형식이 맡은 반지는 가난과 두려움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남자의 뒤늦은 마음이다. 사소한 선택 앞에서도 망설이던 형식은 반지를 건네야 하는 순간, 자신 역시 하지 못한 일들을 남겨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돌아본다. 백승주의 표제작 〈고잉 백 투 제천〉은 제천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의 택시 안에서 시작된다. 승진에서 밀려 제천으로 발령받았던 남자는 본사 복귀를 앞두고 처음으로 의림지에 가보려 한다. 늘 말없이 차를 몰던 노년의 기사는 그날 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낸다. 마흔 해 전 아내가 어린 아들만 데리고 떠났다는 사연을 듣는 동안 남자의 기억도 되살아난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떠나기만을 기다렸던 도시에 다시 돌아올 이유가 생기는 밤이다. 유정석의 〈물귀신〉은 친구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우를 비룡담 저수지로 불러낸다. 십 년 전, 우혁은 물에 빠진 축구공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비가 올 때마다 그날의 기억에 시달리는 지우에게 어느 새벽 죽은 우혁의 이름으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저수지에서 다시 만난 옛 친구 민호도 같은 연락을 받았다. 기이한 현상 속에서 되풀이되는 과거는 당시 두 사람이 본 것과 외면한 것을 드러낸다. 물귀신의 공포는 질투와 망설임에서 비롯한 것일까? 이다인의 〈잔향〉은 할아버지의 약방을 물려받은 화자가 다시 차를 끓이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어린 시절 화자는 손님에게 차를 내주고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가 뜻밖의 원망을 받는 모습을 목격한다. 선의가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약방을 이어받은 뒤에는 손님과의 관계를 약재를 사고파는 데로 한정한다. 그런 약방에 한 대학생이 자꾸 찾아와 말을 건넨다. 마냥 귀찮은 대화가 이어지면서 화자는 공간을 지키는 일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천천히 알아간다. 이민규의 〈불행해도 죽지는 않았다〉는 고향의 고추시장에서 처음 눈물을 보인 아버지의 과거를 따라간다. 어머니가 집을 떠나고 형제들이 흩어진 뒤 어린 기석은 구두공장에서 일하며 임금마저 아버지에게 빼앗기는 생활을 견딘다. 폭력을 피하려 숨어들었던 고추시장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몸에 남은 기억을 호출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시간이 끝나지 않은 것은 제대로 마침표를 찍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기석은 뒤늦게 자신의 말을 꺼낸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가해자를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음을 이 소설은 분명히 한다. 이수민의 〈금의 문턱〉은 박달재에 세워진 가상의 ‘리미널 센터’를 무대로 한다. 리미널 센터란 기억과 감정을 잇는 신경 경로를 끊어 고통을 덜어주는 곳이다. 의식을 잃은 연인 설을 삼 년간 간호해온 금이 찾아온다. 감정기록팀의 달은 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감정을 정보로만 대할 수 없게 되고, 점차 금에게 마음이 기운다. 사랑을 놓으려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문턱에 선다. 타자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마음은 어디까지 다가가도 되는가. 함현정의 〈유리 너머 보이는 것들〉은 사진 공모전을 계기로 제천을 찾은 직장인의 여행담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감해진 화자는 어린 시절 가족사진을 단서 삼아 의림지로 향한다. 그런데 카메라 렌즈에 비친 풍경은 현재의 모습과 달리 오래된 사진처럼 빛이 바랬다. 그곳에서 만난 노인들의 알쏭달쏭한 말과 낯선 경험은 사진 한 장을 남기려던 여행의 방향을 바꾼다. 과거의 장면을 되찾으려던 화자는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사진에 담기지 않는 바람과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