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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말해지지 않은 흐름 기억 끝나지 않는 말 쪽이라는 거리 한양의 숨결 소리를 먼저 알다 첫 만남 종이를 보는 눈 정읍에서 온 사람 등등 2. 말이 만든 자리 서련이 지나간 자리 남겨진 이름 갖추어진 자리 정해진 이야기 갈라진 자리 기록의 빈자리 조용함의 다른 뜻 입에 오른 호칭 등등 3. 지워지는 이름, 이어지는 마음 상왕을 둘러싼 움직임 상왕의 곁을 지우는 사람들 재가가 내려오기 전에 이름이 죄가 될 때 이름이 궁을 떠나는 날 상왕이라는 이름이 거두어진 날 64인의 행렬 속으로 들어간 서련 궁을 떠나는 사람들 영도교, 돌아갈 수 없는 길 등등 4. 떠난 자리에서 시작된 삶 소문이 드리운 그림자 순흥에서 번져온 역모의 소문 알 수 없는 아버지의 행방 확인할 수 없는 진실 죽음이 되어 돌아온 소문 궁을 떠나, 내 삶의 자리를 정하다 사랑이라 부르지 못했던 마음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자리 살아남기 위한 다짐 등등 5. 기억은 길을 따라 흐르고 평구도에 남은 의문 세 죽음을 잇는 하나의 길 기억으로 지키는 사람들 먼 곳에서 온 온기 그들도 결국 인간이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날 영월에서 건너온 증언 그리움은 늙지 않는다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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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야산 마루에 이르는 길쯤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았다. 어느새 중간에서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어 숨을 고르게 되었고, 나무줄기나 가지를 붙잡고 잠시 쉬어 가는 날도 많아졌다. 그러다가 다시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혼자 오르는 일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시녀들이 양옆에서 내 팔을 받쳐 주어야만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가끔은 내 걸음이 느린 것인지, 그녀들의 걸음이 느린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돌리고, 다시 천천히 야산을 올랐다. 마치 흘러가는 세월을 거스를 수 없음을 이미 오래전에 받아들인 사람들처럼.
그 세월 동안 다섯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세조 전하, 예종 전하, 성종 전하, 연산군, 그리고 중종 전하. 그 긴 세월 동안을 지나며 궁궐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고, 세상 또한 적지 않게 변하였다. 젊었던 이들은 늙었고, 늙었던 이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강과 산은 그대로였고, 그 품 안에 잠든 이들의 평온만은 변함이 없었다. -28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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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간을 살아보는 소설
빠르게 읽을수록 놓치고, 천천히 읽을수록 선명해지는 역사소설이 있다. 『단종을 기다리며』는 단종의 비극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시간과 사유를 복원하는 작품이다. 말 한마디가 권력이 되고, 침묵 하나가 생사를 가르며, 표정과 시선마저 읽어야 했던 시대. 사람들은 드러난 사실보다 감춰진 뜻을 헤아리며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이 소설은 그 느린 호흡을 끝까지 따라가며 독자를 역사 한가운데로 이끈다. 읽는 동안 우리는 역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단종을 기다리며』가 선사하는 가장 깊은 몰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