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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표지 1 판권 2 벨일에서-모네 3 저자 4 불멸의 화파-인상주의 5 책을 내며아름다운 인상(印象) 7 차 례 12 18c-20c 인상주의 연대표 16 1900년경의 지베르니 지도 17 프롤로그 18 인상주의의 개념(槪念) 40 인상주의의 태동(胎動) 75 인상주의의 기법 (技法) 92 미국(美國)의 인상주의 108 모네의 가족화가들 (3명) 161 지베르니 초기화가들 1885~1889 (16명) 211 지베르니 중기화가들 1890~1899 (20명) 341 지베르니의 후기화가들 1900~1914 (8명) 425 부부화가 및 가족화가들 (30명) 457 여류화가와 조각가들 (14명) 635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들 (9명) 725 미국 외(外) 다른나라 예술가들 (14명) 799 에필로그-불멸(不滅)의 인상주의 874 참고 문헌 879 아트월드 책발간 885 뒤표지 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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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평]
아트월드 출판사를 통하여 조영규 작가는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시리즈로 여태까지 체험판 4권을 포함하여 14권을 발간하였다. 올해에 다시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 전2권』을 합권으로 만들어 발간하고 있다. 2013년 처음 이 책을 전자책으로 발간할 당시에는 책을 판매하는 유통서점에서 2권의 용량이 911쪽에 달하여 PDF로 업로드 하기에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업로드 용량이 상향 조정되어 한권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곧 『 The Ten-미국 인상주의 거장화가, 전2권 』도 합권으로 발간 예정에 있다고 한다. 저자는 올해 『미국의 인상주의 거장화가 존 싱어 서전트』를 발간하면서 16권 째가 되었다. 사실 국내에서는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하는 전시회나 책자가 희소한 편이다. 이 책에서는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가 1874년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전시회를 가진 이래 141년이 지나서도 차츰 번성하여 “불멸의 화파”가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우리 미술계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러한 숨겨진 사실을 안다면 앞으로 장래가 무궁무진한 인상파 미술을 특히 청년들도 관심을 가지고 매진하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흔한 말로 미술화가들은 스트로크(stroke) 즉 붓을 가지고 자기 개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경지를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그 예로 빈센트 고흐는 파리로 진출하여 여러 인상파의 그림을 보고 자기 자신은 남보다 독특한 스트로크 즉 신속하면서 원색적인 화면구성을 하는 기법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인상파의 특색은 먼저 모티브의 무한성에 있다. 그리고 작가 스스로의 개성을 화면에 충분히 받아 드리는 바탕을 꾸며 놓고 있다. 이는 작품 제작 후에 관객이 가지는 감동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것처럼 독특하며 얼마든지 개성을 살리는 스트로크를 이룰 수 있다. 우리가 골프에서 경험해 보듯이 똑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우드나 아이언 드라이브를 가지고 스트로크(stroke)를 하더라도 공이 나르는 궤적은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페인팅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골퍼는 이러한 매력 때문에 연습과 필드에 나가는 것을 그만 둘 수 없다고 흔히 말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도 처음에는 명필을 가지고 임서(臨書)를 하였고 차츰 자기만의 필체인 추사체를 결국 창조하여 당시 중국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고자 열광 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이 알기로는 인상파 화가나 인상주의에 대하여 프랑스 위주로 인식하는 일이 흔하다. 프랑스의 인상파는 12년 뒤인 1886년에 결국 해체되어 버렸다. 모네는 제8회 전시회에도 불참하였고 1883년에 파리에서 80km 떨어진 시골 마을인 지베르니(Giverny)에 가족을 데리고 집을 매입치 못하고 세(貰)로 이사를 갔다. 당시 파리에는 인상파에 대한 이론체계도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미술학교도 없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를 제외한 외국 화가들은 예술의 도시인 파리 등의 유럽에 진출하여 미술을 배우는 형편이었는데 주로 아카데믹 스타일을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인상파에 관심을 가지거나 모네 등의 획기적인 작품에 영감을 받은 유럽파 화가들은 귀국하지 않고 모네가 살고 있는 지베르니로 스스로 찾아들었다. 이들의 숫자는 18개국에서 350명이었다. 물론 체류기간은 1885년부터 유럽전역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30년간 이었다. 어떤 화가는 수개월간을 살았지만 다른 화가들은 30년간 부부나 형제 및 가족들이 함께 살아 간 이들이 많았다. 모네는 제자를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이 찾아온 화가들을 동료로서 외광에서 같이 그림을 그렸고 대화를 나누었다. 즉 젊은 외국화가들은 모네가 한동안 희구하던 명예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즉 모네는 작품을 팔면서 생활을 하기 위하여 파리살롱에 출품하였으나 겨우 몇 번을 통과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외국의 청장년 화가들은 파리의 유명 미술학교를 거쳤고 특히 파리살롱에서 상을 받고 교수로 픽업된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여러 번 개최될 때에도 명예스런 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서로가 인상파를 실험하면서 작품 제작에 대화를 나누고 각기 다른 기법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지베르니를 거친 미국출신 화가들은 전체 350명 중에 300명으로 대부분 이었으며 1914년에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의 중심지가 되자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지베르니와 같은 화가마을을 대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하고 미술학교나 스튜디오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인상파 거장인 윌리엄 메릿 체이스는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20년 동안 인상파를 가르치면서 4천명의 제자를 길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실 공히 인상파는 파리에서 발아되었으나 미국에서 번성한 화파가 되었다. 마치 인도에서 발아된 불교가 동남아시아에서 번성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책의 말미인 <에필로그>에서 서양미술사에서 “불멸의 화파”가 된 스토리를 다시 강조하면서 우리들에게 고전이 되면서 현대적인 화풍인 인상파에 관심을 가지도록 환기시키고 있다. 오늘날 미술의 역할은 모든 현대생활의 생명인 디자인의 접목과 더불어 인간의 생활을 보다 가치 있고 풍요한 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심에 우뚝 선 기둥이 바로 인상파이다. 이로부터 파생된 여러 현대미술의 가지는 세월이 가되 생성과 소멸이 심한 편이 되었다. [작가의 에필로그]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개최된 지 140년이 지났다. 당시 인상파 전시를 주도하고 선구자 Forerunner(先驅者)가 된 클로드 모네는 43세인 1883년에 그가 평소에 염원했던 지베르니에 정착하여 소원을 이루기 시작했다. 불과 2년 후인 188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30년 동안 모네는 그들을 초청치 않았으나 새로운 인상파에 주목하고 관심이 많던 전 세계 350명의 청·장년 화가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들 ‘지베르니아이츠 Givernyites’ 즉 지베르니의 화가들은 생애를 걸고 인상파 원형(原型)의 작품을 실험하고 창조해 나간 사람들이다. 그곳 지베르니는 새로운 미술의 모태(母胎)와 발원지(發源地)가 되었다. 중심에는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가 있었다. 그러나 개성과 기법이 다른 화가들은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화가마다 독특한 인상파의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지베르니아이츠는 미국 등 자국의 유명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마친 사람들이었다. 또한 더 나은 미술교육을 위해 파리, 뮌헨 등 유명 아카데믹 교육기관에서 주로 인물과 초상을 위주로 수학했다. 또한 이들은 파리살롱의 배심을 통과하여 전시했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기량을 과시한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귀국하면 바로 장래가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네가 있는 지베르니로 가서 상당기간을 새로운 화파의 진면목을 다시 배우고자 하는데 에는 고된 생활이 따랐으나 마다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19세기 중반이후 서구가 산업사회로 크게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동인(動因)이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당시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추세에 맞추어 점진적이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움직임 속에 발아되었다. 유럽의 미술세계도 종래 아카데믹한 초상화와 인물화 위주의 인문중심(人文中心)에서 풍경화의 관심과 흥미로 바뀌는 자연중심(自然中心)의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산업사회가 진전되어 갈수록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원초적인 희구(希求)와 욕망(慾望)에 따라 미술의 흐름도 역전(逆轉)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350명 중에서 85%에 달하는 300명의 화가 등이 방문하여 지베르니는 사실 미국의 예술가 공동체 Art Colony 즉 화가마을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에 대하여 유럽보다 미국에서 오히려 개혁적이면서 수용(受容)이 빨랐던 원인이었다. 이러한 모든 증거는 지베르니에서 마담 버디 Madame Burdy가 운영했던 버디호텔의 ‘방명록(芳名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여러 화가들이 보낸 편지(便紙)나 회고록(回顧錄) 및 여러 형태의 자료에 자세한 상황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베르니에서 그린 작품(作品)에서 인상주의 본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두 권의 책에는 350명 중에서 약 1/3인 모네를 포함하여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의 생애(生涯)와 작품을 실었다. 당시의 인상파에는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한군데도 없었고 이론적인 체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 파리의 유명한 에콜 데 보자르, 줄리앙 아카데미 등 교육기관을 관장하던 미술 교수와 저명한 미술 비평가 및 프랑스 정부 측은 이러한 새로운 인상주의의 혁명적인 출현과 기성 화단을 부정하는 데에 반기(反旗)를 들면서 여덟 번 전시의 초기에는 악평과 조롱을 일삼았다. 그러나 한마디로 결론을 말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예술적 흐름에 대한 승자(勝者)와 패자(敗者)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 전시가 개최된 12년 동안에 서서히 갈라져 버렸다. 먼저, 미술의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파악했던 이름난 비평가들은 결국 굴욕적인 패자가 되었고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대신 당시 인상파의 장래가 극도로 불안했지만 서구미술의 추세를 감각적으로 인식했던 모네 등의 초기 인상파 화가들과 이를 따른 지베르니아이츠는 고난 끝에 값진 영광의 승자가 되었다. 또한 인상파 작품을 매입할까 하고 망설였던 화상(畵商)들 중에 위험한 투기(投機)였지만 예지(叡智)와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매입했던 뒤랑 뤼엘 등은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미술시장을 휩쓸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작품의 가치(價値)와 심미적(審美的)인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가진 일반 관람자(一般 觀覽者)들이 가장 큰 승리자들이었다. 작품 구매의 수요(需要)가 없었다면 어떻게 화가들의 창작행위인 공급(供給)이 140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겠는가? 이런 이유로 인상주의는 초기에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前衛藝術)로 간주되어 불안하고 금방 사라질 듯 한 운명이었지만 이내 서구미술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발전을 이루었다. 인상주의가 등장한 이후에 이로부터 드디어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화, 입체파 및 상징주의 등의 여러 모던 아트Modern Art가 연이어 파생되었다. 이 책으로 인상주의가 오늘날 현대미술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서 불멸(不滅)의 화파로 인기가 지속되는 점이 다소나마 독자들께서 이해될지 기대해 본다. 미술과 예술인의 성과물인 회화와 조각 등 예술작품의 창조에는 철학적인 원칙(原則)과 사리(事理)가 있다. 특히 화가들은 성장 과정에서 각자 관심과 흥미로 교육과정을 거치고, 주위 관련인물을 만나서 영감(靈感)을 받는다. 그리고 많은 지역을 여행하고 그곳으로부터 감동(感動)을 얻는다. 화가는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화가와 작품으로부터 표현키 어려운 뉘앙스(Nuance)를 느낀다. 또한 화가는 수많은 대상Motif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예민하게 영감과 감동과 뉘앙스를 터득하는 체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화가들은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창작의 욕구로부터 많은 여행과 견문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과 작품으로부터 신선한 자극을 받고자 원했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이야 말로 모네를 찾아간 지베르니아이츠들의 가장 큰 동인(動因)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미흡하나마 화가마다 생애의 전환점에서 무엇을 느끼고 이루었는지 살펴보았으며 짧지만 생애와 주위의 인물을 작품과 같이 포함시켜 해설하여 보았다. 이와 같이 140년 전(前) 인상주의의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었던 지베르니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활동한 지베르니아이츠의 작품과 상상하지 못할 여러 가지 애환(哀歡)이 담긴 생활이야 말로 우리들이 값지게 살펴 볼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아직도 더러 미궁(迷宮)에 빠진 듯한 인상주의(?) 라는 질문에 인상주의의 원형(原型)을 알고 싶어 하는 모두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 중에 여류화가들이 33명으로 약 29%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는 여성의 미술계 진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리의 미술학교 입학에서도 에콜 데 보자르는 1879년까지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누드수업도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메리 카셋 다음의 ‘제2의 미국 여류화가’의 자리를 성취한 릴라 C. 페리처럼 1885년 미국 화가들이 최초로 지베르니를 방문한 시기인 37세에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국에서 독학(獨學)으로 출발한 사례는 참으로 귀감(龜鑑)이 되었다. 페리는 37세에 미국의 카울레스 미술학교를 수학하고, 39세에 파리의 콜라로시 아카데미, 40세~41세에 줄리앙 아카데미, 그 후 독일에서 프리츠 폰 우데로부터 장년의 여성이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다시 1889년부터 지베르니에서 11년간 모네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상주의를 실험하며 공부했다. 그녀가 1909년에 미국으로 귀국할 때는 나이가 61세이었지만 그녀가 그린 작품은 100년이 지나도 모든 이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기쁨을 주고 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지베르니아이츠 중에서 저작권(著作權)으로 사후(死後) 적용기간이 아직까지 경과되지 않은 훌륭한 화가들의 내용이 누락(漏落)된 점이 있었다. 또한 화가 명단은 파악되나 그들의 자료가 아직 미흡하고 공개되지 않은 점도 크게 아쉽게 생각한다. 끝으로 114명 지베르니아이츠의 작품과 활동내용을 단편적이지만 세상에 늦게나마 소개하는데 대하여 기쁘게 생각하면서 그간 수년 동안 책발간과 자료수집에 많은 격려와 용기를 준 가족들과 주위의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올린다. 2015년 8월 20일 경기도 안양시, 아틀리에에서 서양화가 조영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