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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_조선일보와 함께 65년을_김대중
1.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_강신호 2. 남편과 나를 이어준 영화인 _고은아 3. 천천히 서두르시다 _권이혁 4. “이것 기사가 되지 않겠어?” _김덕형 5. 5분도 못 가는 불같은 성격 _김동건 6. 한평생 무지개를 쫓은 내 친구 _김동길 7. 영원한 연세의 이사장 _김병수 8. 나의 ‘1호 친구’ _김봉균 9. 이젠 약속대로 교회에 나오시길 _김서년 10. 병실에서 열렸던 ‘작은 편집회의’ _김성권 11. 나의 영원한 형님 _김성진 12. 거침없이 ‘쓴소리’ _김수한 13. 지면은 열려 있다 _김영관 14. 차장 한 번 못한 전설의 기자 _김용원 15. 우리 총장, 감옥 가지 않아서 고마워 _김우식 16. 전례 없는 母校 100주년 사업 _김우중 17. 어머니의 기도, 아내의 믿음 _김장환 18. 나의 사회생활 지도교수 _김정룡 19. 연세인들의 영원한 ‘방 두목’ _김정수 20. 기자 같은 경영인 _김종필 21. 짧지만 강렬했던 인연 _김학준 22.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익어가는 것입니다 _김한중 23. 대단히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 _남재희 24. 욕먹을 각오 하라우 _류근일 25. 앞으로는 지팡이 짚지 마십시오 _문흥렬 26. 함께한 젊은 날을 추억하다 _민병철 27. 진정한 리더의 성품을 지니시다 _박삼구 28. 세브란스 새 병원 탄생을 후원하시다 _박창일 29. 삼촌의 눈물 _방상훈 30. 1등 기자, 1등 대접 _백선엽 31. 미래를 내다보시다 _백진훈 32. 기자라면 그 분들처럼 _봉두완 33. 어쩌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_서청원 34. 왜 발목을 풀고 계셨어요? _송영자 35. 그는 인간 경영의 귀재였다 _송형목 36. 단구의 거인 _신동호 37. 멋과 맛을 아시는 국제 신사 _신두병 38. 예술문화 발전의 후원자 _신영균 39. 프랑스 미술전을 지원해주시다 _신용석 40. ‘고향 오빠’ _심치선 41. 조선일보 황금기를 함께하다 _안병훈 42. 내 이름도 ‘응모’입니다 _안응모 43. 잊지 못할 야밤의 합창 _우기정 44. 골프에서 ‘자선’을 찾으시다 _우윤근 45. 너무도 자상하신 분 _유흥수 46. 인화의 지도자, 통찰의 리더십 _윤관 47. 골프로 더욱 끈끈한 관계를 맺다 _윤세영 48. 온몸으로 신문의 역사를 만드시다 _윤임술 49. 기적을 만든 신문인 _윤주영 50. ‘우영’하라는 계초의 뜻 이루었으니 이젠 ‘일민’의 안락을 즐기소서 _윤형섭 51. 나에게 여러 번 놀라움을 주신 분 _윤호미 52. 형제끼리 우애가 깊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된다 _이광노 53. 나를 알아준 ‘방우영 사장’ _이도형 54. 늘 푸른 소나무 _이동건 55.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날 _이미자 56. 강력한 카리스마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인간미 _이범관 57. 선배다움을 보여주시는 선배, 방우영 _이병규 58. 공과 사가 분명한 연세인의 ‘대부’ _이병무 59. 단절됐던 우리 국악 이어준 회장님 _이생강 60. 방우영 회장과 한독협회를 생각하며 _이성낙 61. 지극히 인간적인 ‘대장님’ _이수성 62. 차돌멩이의 추억 _이어령 63. 권위주의 시대를 지혜롭게 뛰어넘어 _이종식 64. 자네는 다른 데로 가라우 _이준용 65. 골프는 멋지게, 농담은 소탈하게 _이중명 66. 일민 방우영 회장님의 미수를 축하하며 _이홍구 67. 우리는 ‘방우영 혁명군’이었다 _인보길 68. ‘미스터 골프’와 한국 골프계의 기적 _임영선 69. 제일 첫 번째니까 통 크게 찬조하시라 _임택근 70. “이 나이에 아등바등 몇 년 더 살겠다고?” _장준 71. 정이 많은 원칙주의자 _전순재 72. 바위처럼 흔들림 없이 지지해주신 거산 _정갑영 73. ‘두목’을 생각하며 _정구영 74. ‘통일 한국’을 위해 가장 필요한 DNA를 가진 사람 _정남식 75. 일민, 뜻 그대로의 사람 _정재철 76.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고 활달했던 분 _정진우 77. 대학이 잘돼야 나라도 발전한다 _정창영 78. 方又榮 사장 시절에 月刊朝鮮도 1등으로 올랐다! _조갑제 79. 신새벽의 진수성찬 _조영서 80. 환도 후부터의 만남 _조용중 81. 25년 인연 속에 담긴 신뢰와 존경 _최기준 82. 방우영의 골프 3관왕 _최영정 83. 서로 다른 방식, 하지만 정상은 하나뿐 _최정호 84. 글 사랑, 책 사랑, 신문 사랑 _최준명 85. 일영·우영 형제와 성곡의 두터운 정을 회상하며 _한종우 86. 우리 사회의 큰 어른 _허동수 87. 모든 것이 맑고 분명하시다 _허억 88. 친구 같은 선배님 _홍두표 89. 우리 언론계의 큰 나무이자 큰 산이시다 _홍석현 90. 형님과 함께한 사냥 여행 _황충엽 연보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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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회장은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그냥 고집 센 것과는 좀 다르다.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는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경우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상황을 보 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격랑을 헤쳐 온 신문쟁이다. 정부의 압력에 시달렸던 때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면서도 일언반구 내색하지 않고 꼿꼿하게 버텨냈다. 어쩌다 아주 가끔 나에게 의견을 물어올 때도 있었지만. 인간 방우영은 불의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작은 이익을 탐하여 대의를 버렸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결기, 그게 오늘의 조선일보를 있게 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친구인 방 회장을 존경한다.
---p.58 방우영 선배 기자의 기사 쓰는 스타일은 독특했다. 핵심 내용을 직설적으로 쓰셨다. 에두르거나 형용사를 쓰지 않는 명료한 문장이었다. 나도 그렇게 쓰려고 노력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경제생활이 우리 몸에 익숙지 않고 경제문제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경제 기사를 쉽게 쓰느냐는 것이 그때부터 나의 과제가 됐었다. 1960년 12월쯤 방우영 선배 기자는 아카데미극장 지배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우영 선배 기자가 경제부를 떠나며 “나는 차장 한 번 못했다. 차장도 시켜주지 않았다”고 말씀했다는 말이 들렸다. 진짜 차장 발령을 받고 싶어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보기에는 매일매일 출입처에 나가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부담 없는 기자의 신분에서 어려운 회사 살림을 떠맡아야 하는 경영자 신분으로 바뀌는 데 대한 걱정과 아쉬움 같은 묘한 심정을 방우영 회장다운 웃음의 말로 그렇게 하신 것으로 이해됐었다. ---p.93 신문인으로서 방 회장은 무엇보다 기자들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려 했다. 경기도의 한 컨트리클럽에서 골프 모임이 있을 때 일이다. 일행 중에는 방 회장과 연배가 비슷하고 평소 사이도 좋은 한 대기업 사장이 있었다. 나는 경제부 기자여서 같이 모임에 끼게 됐다. 그때 기업 사장이 회장께 농담 비슷하게 우리 신문사 기자의 실명을 대면서 뭔가 비판을 했다. 회장은 순간 격분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이제 나와 인연이 끝이다. 어디서 기자를 욕하는가. 기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 같은 사람의 욕을 들을 일이 있는 줄 아느냐”고 일갈하시는 것이다. 이 기업체 사장은 나중에 내게 와서 “그저 신문 이야기 좀 아는 체했을 뿐인데 이렇게 역정이 나셨으니 큰일이오.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하소연을 했다. 동시에 방 회장 본인은 언론인임을 내세우지 않았다. 당신이 직접 경제부 기자 생활도 했고, 경제부처에서의 영향력도 대단했던 분이다. 그럼에도 우리 일선 기자들과는 자세가 달랐던 점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는 장·차관을 우습게 여기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회장께서는 “나는 경영인이다” 하는 의식을 깊이 갖고 있었다. 고위 공직자를 만나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깍듯하게 예우했다. 이것이 모두 신문의 경영을 생각한 마음가짐이었다. ---p.217 젊은 시절 조선일보에서 일하면서 바라보았던 방우영 사장의 모습은 내 차돌멩이의 기억과도 같다. 어느 맑은 냇물이 흐르는 모래밭에서 여름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반짝이던 차돌멩이 하나. 그것을 주워 호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의 추억 같은 그것이 고려청자가 되고 최첨단 반도체 전자 제품 이 된다. 차돌멩이는 그냥 차돌멩이인데 나이와 함께 그것은 성숙하 고 또 변신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준다. 조선일보에서 내 젊음의 일부를 보냈던 그 시간들이 생각날 때마 다 나는 어릴 적 냇가에서 줍던 차돌멩이를 본다. 그 차돌이 깐깐한 얼굴로 웃기도 하고 손이 닿을 수 없는 박물관 진열장 안의 고려청자 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반도체 칩 속의 복잡한 회로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심연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낯 선 그리움이다. 그러다가 몇 년 뒤 그 차돌멩이는 역사책에 나오는 무슨 왕관에 박힌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처럼 휘황하게 빛날지 모른다. ---pp.371-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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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김종필·백선엽·이미자·이어령 등 名士 90명이 쓴 米壽 축하 문집 65년 언론경영인 기록 넘어 산업화·민주화 시대의 언론 窓으로 조선일보의 중흥을 이끈 방우영은 스스로를 언론인이 아니라 신문인, 또는 신문경영인이라고 말한다. 조선일보 96년 역사에서 65년을 봉직한 사람이 스스로를 ‘신문인’으로 자처하는 마음가짐 속에는 ‘언론’을 중(重)히 보고 자신은 언론보조인일 뿐으로 낮추려는 뜻이 있다. 방우영은 언론인이다. 영원한 기자(記者)다. 스스로는 “편집국 차장(次長)도 못 해본 처지”라고 말하지만, 정작 조선일보의 성가를 높인 여러 특집기사, 인터뷰, 연재소설을 기획하고 만들어낸 ‘기획기자’였다. 방우영은 동시에 신문경영인이었다. 때로는 파격적이고 때로는 멀리 보면서 인재(人材)를 발굴하고 기용했다. 한마디로 기자를 잘 뽑고 잘 썼다. 오늘의 조선일보는 방우영이 그렇게 뽑은 기자들이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다. 그런 방우영 고문이 미수(米壽)를 맞았다. 방우영은 애초 직접 책을 쓸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힘에 부친 일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방우영이 쓰고자 하는 것을 그의 친구, 친지, 신문사 후배들이 ‘대필(代筆)’하는 형식으로 ‘신문인 방우영’, ‘언론인 방우영’, ‘인간 방우영’을 조명하는 것도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아쉬운 점은 방우영 고문과 인생행로를 같이하면서 그를 더 잘 알고 이런저런 인연을 쌓은 사람들이 이제 우리 곁에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다행히 90명의 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됐다. -발간사 중에서 일민 방우영 逸民 方又榮 언론인이자 경영인.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과 어머니 이성춘(李成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되던 1932년 할아버지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가 민족 진영 요청을 받아들여 경영난을 겪던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방우영은 정주에서 조일심상(朝日尋常)소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상과를 나왔다. 1952년 공무국 견습생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한 방우영은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8년 동안 활동한 뒤 1960년 조선일보 방계 회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1963년 발행인, 1964년 전무 대표이사가 됐다. 1969년 오랜 숙원 사업이던 신사옥을 준공했고, 1970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80년 ‘월간 조선’을 창간하고 월간 ‘산’을 인수해 조선일보의 잡지 전성 시대를 선도했다. 1990년에는 ‘스포츠조선’을 창간했다. 1993년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 1994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3년 조선일보 명예회장에 추대된 방우영은 2008년 55년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2010년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추대됐고 2013년 창간 93주년을 맞아 60년 근속상을 받았다. 방우영은 조선일보의 성가를 높인 여러 특집 기사, 인터뷰, 연재소설을 기획하고 만들어낸 ‘기획 기자’였다. 신문 경영인으로서 파격적이면서도 멀리 보는 인재 기용으로 조선일보를 이끌었다. 신문 외길을 걸어 온 그의 경영 정신은 ‘재정 독립’과 ‘공존 경영’이다. 현재 조선일보 상임고문, 연세대 재단 명예이사장,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명예동문회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슬하에 손자와 손녀 아홉을 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