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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우지 않은 비명
2. 제4막 3. 이사벨라의 행방 4. 유리빛 목장에서 별을 삼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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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들 모두 잘 지내라!” 진실로 위대한 메시지였다. 이제 나는 나의 죽음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의 메시지는 뭐라고 할까. “용서해달라, 나를 용서해달라!”
--- p. 129 그런데 불현듯 뇌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워싱턴 스퀘어. 개선문 옆. 오후 다섯 시’에 어젯밤의 그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는 생각이었다. 이상도 한 일이구나.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고 그도 나의 말을 알아들었을 까닭이 없는데 언제,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을까 말이다. --- p. 151~152 “만일,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말요, 쿠데타가 발생하면 이사벨라는 어떻게 할 거요?”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이사벨라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는 사흘쯤 울다가 나흘째쯤 학교로 나가 도서관에서 알레산드리의 전기를 다시 한 번 읽고 알레산드리 대망론을 쓰겠어요.” --- p. 172 호텔로 돌아와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을 펴들었다. 한 장 한 장 건성으로 넘기고 있는데 꼭 한 군데 사이드라인을 친 곳이 있었다. 그 시구는 다음과 같았다. ‘유리빛 목장에서 별을 삼키다’ 나는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리카르도의 말이 자살의 가능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설렘을 느꼈다. --- p. 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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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또는 글로컬 시대에 있어서 우리 문학
“소설의 본질적인 가치나 그 평가에 있어 배경이나 환경의 문제는 중심 주제에 비하면 보다 부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같은 부대 요소의 구성 없이 소설을 창작할 수 있는 길이 없거니와, 환경의 조건이 주제를 효율적으로 부양하는 기능을 감당하기 때문에 지역 환경의 중요성을 도외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중국을 떠올리지 않고 펄 벅의 《대지》를, 더블린을 생각하지 않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떤 소설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그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글로벌 또는 글로컬 시대에 있어서 우리 문학의 활로는 공간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에 나림 이병주만큼 대륙을 오가는 이야기를 구사한 소설가가 드물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단순히 외국의 이국적인 풍경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오롯이 담아냈다는 점이다. 소설의 배경을 외국으로 하는 것이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외국이란 공간에 담겨질 때 진정한 글로벌 또는 글로컬 문학이 될 수 있음을 이 작품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1979년에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 이란의 팔레비 국왕,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 중미 니카라과의 소모사 대통령,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황제, 그리고 중미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정권 등 무려 여섯 명의 독재자가 붕괴·타도·축출된 기념비적 기록이 제시된다. (중략) 그런데 그러한 역사의 격동을 배경에 두고 성유정인 ‘나’는 매우 개인사적으로 어머니의 위암과 자신의 간암에 직면한다. 일제 말기에 학병으로 끌려갔고 6·25 때 자칫 죽을 뻔했고 5·16 때 징역살이를 한, 역사의 고빗길마다 고난을 겪은 개인사를 돌이켜 보면, 이 두 불치병의 배면에 지구 전반에 걸친 엄청난 시대사의 소용돌이가 닮은꼴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우지 않은 비명]은 주인공인 성유정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젊은 시절 연인을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식민지 유학생으로서 학병에 끌려간 피해자인 동시에 제국의 여인에게 큰 상처를 준 가해자인 주인공의 삶은 그 답답한 결말만큼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적인 독재자가 여섯 명이나 축출된 1979년의 10월 26일에 이 땅의 독재자도 유명을 달리했다. 죽음과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헤쳐나가야만 하는 미래까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모든 모순적인 상황이 1979년이라는 세계사적인 격변이 우리에도 마찬가지였음을 잘 드러낸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주점 ‘제4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요령부득인 대화가 ‘나’에게는 소설적 이야기의 재료가 되고, 또 그 개별자들도 소설적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중 세르기 프라토라는 이름의, 육십 세에 가까운 에스토니아 출신 화가 부부와는 삼 년쯤 후에 ‘제4막’에서 만나 ‘제4막적인 대화’를 나누기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뉴욕에 심어놓고 왔으니, 어떻게 뉴욕에 애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제4막]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뉴욕의 한 술집에서 만나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망명객인 노화가는 이제 유행이 지난 사실적인 풍경화만 그리는데, 그 이유는 고향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기 위해서다. 이제 에스토니아가 어엿한 독립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그 노화가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많은 망명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자본의 상징인 뉴욕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는 두 이국인의 이심전심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에서 마주친 우리의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누군가의 행방 “‘나’는 미국에서 칠레로 전화를 걸었으나 이사벨라의 종적을 찾지 못한다. 칠레 대학교에서 체포된 교수와 학생이 1,520명이나 된다는 보도를 보았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와 몇 차례 산티아고에 편지를 띄웠으나 회신이 없었고, 마침내 행방불명이 된 채 생사를 모른다는 전갈을 받는다.” [이사벨라의 행방]은 칠레에 쿠데타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사벨라가 쿠데타 이후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만으로도 울림이 있는 작품이지만 우리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기 때문에 여운이 더욱 짙다. 군부 독재와 기나긴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가 공유되지 못하고 머나먼 남의 이야기였던 남아메리카의 상황이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글로벌하면서도 글로컬한 공간 활용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제는 용서해야 할까 “파리를 떠나기 전날 밤, ‘나’는 호텔에서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을 펴든다. 그 시집에서 ‘유리빛 목장에서 별을 삼키다’라는 구절을 찾아내고, 용서와 자살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본다. 그 구절은 ‘나’에게 스페인의 정변처럼 난해하지만 은은한 애수를 남긴다.” [유리빛 목장에서 별을 삼키다]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을 피해 파리로 망명했던 리카르도란 시인이 프랑코 사후 고향에 돌아와 자살하는 이야기다. 아직 군부 독재가 한창인 시절의 작품임에도 군부 독재가 끝났을 때의 용서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아직 보·혁 갈등에 시달리고 있고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병주의 작가적 감각의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과거를 용서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 작품이 던진 화두는 시대를 넘어 아직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