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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너무도 익숙한데 여전히 인사하지 않는 사이로 지낸다는 건 정말이지 난처한 일이다. 그런 밥이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하행선을 타고, 나는 상행선을 타고 중간 지점에서 교차할 운명이었다. 붉은 대리석으로 된 로비의 드넓은 공간, 지상 6미터 지점에서 우리는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거나, 차갑게 공중을 노려보거나,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동안 살필 만한 것을 살피는 척해야 할 것이다. 서로 마주쳐야 할 순간을 마치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피하기 위해. (……) 나는 발을 내딛으려다 말고 뭔가 중요한 할 일을 잊고 있었다는 듯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다른 쪽으로 재빨리 걸어가버렸다.
--- pp.9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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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엘리베이터는 승객이 미어터지고, 어떤 엘리베이터에는 단 한 사람만 타고 있을 것이다. 뒤의 경우를 상상해본다. 더할 수 없이 은밀한, 진정 자유로운 순간. 회사 화장실 칸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 큰 소리로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도 엿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L은 가끔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을 때 스커트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고 했다. 나도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면 장난감 병정 걸음으로 벽 속으로 들어가는 시늉을 하곤 했다. (……) 이런 은밀한 자유의 순간은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서만 사무실에 갈 수 있는 흔치 않은 여건이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의 모든 사소한 의식에 날마다 참가해야 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엘리베이터에 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눈을 들어 층수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타면 경건한 표정으로 ‘열림’ 버튼을 누르거나 고무로 된 도어센서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대화 끄트머리를 듣게 되면 음모에 가담하거나 교활한 짓을 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도 그렇다.
--- pp.116~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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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하고 익살맞은 방식으로 일상을 잡아채는 대담한 데뷔작
『구두끈은, 왜?』는 주인공이 사무실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한 손에 있던 쇼핑봉투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드는 장면에서 시작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는 주인공이 에스컬레이터 맨 위 계단의 금속판 가장자리에 낀 담배꽁초가 제자리에서 구르다 튀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짧디짧은 여정에는 언제 어디로 빠져들지 모를 예측불허의 수많은 샛길이 뻗어 있다. 그 길은 기발하면서도 유쾌하고 또 집요하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 샛길로 빠져드는 묘미다. 어느 날 주인공의 한쪽 구두끈이 끊어진다. 그 전날 다른 한쪽이 끊어졌으니 양쪽 구두끈이 거의 동시에 끊어진 셈이다. 구두끈은 왜, 어떻게 동시에 끊어졌을까? 주인공은 구두끈 매기와 구두끈의 마모에 대해 “삼백스물다섯 번” 정도 생각할 정도로 집요하다. 그러다 마침내 도서관에서 “신발끈의 마모 저항력과 매듭이 풀리게 하는 힘의 측정 방법”이라는 연구논문을 발견했을 때 그는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탁” 친다. 그러곤 “전 인류가 하루 종일 신발끈을 다시 매지 않아도 되도록, 그리하여 구두는 아직 멀쩡한데 신발끈을 갈아 끼워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연구에 매진한 누군가를 향해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며 도서관을 나선다. 구두끈을 사러 나가기 전 들른 화장실에서는 화장실만의 고유한 일상적인 풍경을 익살맞게 그려 보인다. 세면대의 물소리, 변기에 물이 차는 소리 같은 화장실의 잡음이 동시에 멈추면 화장실 안에는 갑작스레 정적이 찾아들고, 그 틈으로 다양한 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낙담하고 지친 긴 한숨 소리, 화장실 휴지 쓰는 소리, 신문지를 접어 제자리에 놓는 소리, 완전히 속 편하게 볼일을 보는 소리, 움찔 놀라게 만드는 물 튀는 소리와 맥주병 주둥이에 공기를 불어넣는 소리 같은 다급한 방귀 소리.” 한편, 여러 사람이 있는 화장실에서는 편하게 볼일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은 슬프게도 “볼일이 끝난 척 헛기침을 하고 지퍼를 올리고는 자신을 저주하며” 화장실을 빠져나온다. 점심거리로 우유를 사면서 머릿속에 날아든 빨대에 대해서는, 비닐 재질로 바뀐 빨대가 탄산음료에서 둥둥 뜨는 것을 두고 “빨대 기술자들이 어떻게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를 진지하게 탐구하다가 결국 “이렇게 해서 삶의 질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 1밀리미터 정도 내려앉았다”고 말함으로써 불쑥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새 구두끈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는 공원에 들러 쿠키와 우유를 마시며, 쿠키와 우유가 동시에 입 안에 있는 행위에 대해 심사숙고한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펼쳐들어 “명백히, 어떤 삶의 조건도 오늘 우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만 못하리라”라는 “약간의 어색함과 예스러움”을 지닌 문장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떠올리며 또 다른 샛길로 빠져든다. 손에 든 쇼핑봉투를 바라보면서 시작된 소소한 생각의 파장은 그 쇼핑봉투 안에 들어 있는 구두끈에서 시작해, 우유팩으로, 빨대로, 스테이플러로, 종이타월과 핸드드라이어의 역사로, 화장실에서 들리는 휘파람소리의 전염성으로, 셔츠 단추를 끼울 때 나는 미세한 소리로,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으로 종횡무진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물과 사람의 관계에 눈부신 빛을 드리운다. 작은 생각들이 엮어내는 치밀하고 섬세한 그물망 너무 평범해 특색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 개인의 내면과 머릿속을 집요하게 관찰함으로써 그 속에 숨은 고유한 우주를 발견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니컬슨 베이커는 특히 평범한 회사원들에게 관심이 많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오전 내내 생계를 위해 일하고, 직장 동료와 나누는 가벼운 대화를 어색하지 않게 마무리짓고, 여러 명이 쓰는 화장실에서 성공적으로 소변을 보고, 점심으로 핫도그와 우유를 곁들인 쿠키를 먹고, 공원에서 잠깐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기도 하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이다. “87퍼센트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밝힌 『구두끈은, 왜?』에는 대학 졸업 후 몇 군데 회사를 다니고 여러 임시직을 경험했던 작가의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다. 조직의 일원이지만 그 구조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사람들, 힘없는 개인에 대한 관심은, 소설에서 뜻밖의 빛을 발하는 구두끈이나 귀마개, 빨대 같은 사소한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드러난다. 관리인이 가만히 선 채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닦을 줄, 학생들이 일회용 포장 속의 버터를 벽 쪽으로 붙이려고 버터를 탁 치는 법을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상인들이 연필을 귀 뒤에 편리하게 꽂아둘 수 있다는 걸 알아내리라고, 그러다 나중에는 점점 귀 뒤에 연필 꽂기를 그만두게 되리라고, 또 자동차 앞 유리 와이퍼가 광고 전단을 남겨두는 편리한 장소를 제공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행동의 발명이 빨대나 일회용 설탕, 연필, 와이퍼같이 꾸밈없이 기술적인 발명품들을 꾸며주었다. 이런 것들은 등록되지도, 특허를 받지도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이어져온다. 말이나 생각을 거치지 않고서 선택되고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조율된다.(147쪽) 작가가 짜놓은 수많은 사소한 사물과 생각들의 정교한 그물망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무심히 지나쳐오던 사물들과 행위들에 새삼 주의를 기울이며 일상의 친숙한 모습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멈춰진 시간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만나는 순수하게 ‘고독’한 개인의 모습을 통해 “그 순간만큼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외부 사건의 사슬에서 놓여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말과 세계와 우주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런 고독감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자잘한 생각들,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그것들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실체이며, 거의 쓸데없어 보이는 궁금증과 관찰이야말로 바로 개인의 고유성과 우주를 나타내는 핵심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전통적 소설 형식을 벗어난 각주의 바다를 헤엄치는 즐거움 그들에게는 글을 읽으면서 다음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각주에 굳이 조언을 청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각주를 문맥에서 읽을 것인가, 본문을 읽기 전에 전채 요리처럼 미리 읽을 것인가? (……) 철도직원이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여기 어깨번호 1번을 달고 달리는 생각이 있다. 이것을 잡아타고 버려진 역들, 숨겨져 있거나 지나쳐 온 터널들을 지난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이렇듯 하강함으로써, 즉 교본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생각은 날개를 달고 진정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190쪽) 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기도 했던 니컬슨 베이커는 좋아하는 음악기호로 페르마타를 꼽는다. “음표들의 화음 위에 앉아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며” 박자를 잠시 늦추거나 멈추라는 이 기호는 그의 소설에서 각주의 형태로, 즉 문장을 잠시 멈추게 함으로써 번외의 생각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소설 형태로 나온 작품 중 어쩌면 가장 많은 각주를 담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지도 모를 『구두끈은, 왜?』는 빈번하게 등장한 방대한 각주들로 인해 출간 당시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얻었다. 개중 서너 쪽에 달하는 것도 있는 이 평범하지 않은 각주는 “평범한 한 남자의 하이퍼텍스트”이자 독자가 선택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하이퍼텍스트’가 될 수 있다. 문장 중간중간 발을 멈추게 하는 빈번한 각주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각주는 독자 마음이다. 지시한 순서대로 읽어 내려갈 수도 있고, 건너뛸 수도 있고, 각주만 먼저 읽을 수도 있다. 나는 각주를 통해 독자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시간을 멈추고 무수한 샛길로 빠졌다 돌아오게 만드는 이 소설의 각주는 전통적인 소설 구조에서는 느낄 수 없던 독특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