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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창고 밥 이 거리는 자주 정전이 된다 강에 가면 어둠이 없다 같은 꿈 못 황학동 물고기의 추억 바다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무료한 날 여름 숲의 고요 우울증 폐 염전에 남아 있는 것들 마른 똥 막대기를 찾아라 빛, 그리고 상처가 남긴 것 공존의 게임 콩장에 밥을 비벼 먹다가 어둠의 비밀 황태 담배 피우는 여자 목섬 II 밥도둑 삭은 오이지와 아버지 새벽안개 얼굴 리모컨 장마 수월관음, 종로 거리를 지나다 컴퓨터 빛으로부터 얻는 것 트리플렛 오이장아찌 국밥 한 그릇 성불암 유년의 바다 표적 국수집 복권 어둠의 힘 한 여자가 지나가네 어머니의 등 능곡동의 바람 해당화 인생을 말하겠네 III 구업(口業) 겨울, 도담삼봉 그녀의 손톱엔 무지개가 핀다 무소유 가정방문 갯벌 장마 속 안부 집착 선인장 거울을 닦는다 내가 돌아눕자 가을 편지 아름다운 아침 가시 이별, 그 후 널빤지의 항변 꿈 사진첩 가을 붉은 물빛 해 설 ‘밥’의 언어를 꿈꾸다| 고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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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언어를 꿈꾸다
최승헌은 첫 번째 시집 『고요는 휘어져 본 적이 없다』(2003)에서 몸과 욕망, 자아와 세계, 세속과 신성 사이를 오가며, 중유(中有)의 넋을 떠도는 시인의 역설적 운명을 선보인 바 있다. 일상적 삶의 진실을 서정적 언어로 길어 올린 최승헌의 시는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일군의 시풍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두 번째 시집 원고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현실’과 ‘현실 너머’ 사이에서 진자 운동하던 시인의 목소리가 현실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는 시선이 심화·확장되고 있음을 반영하는데, 서정적 자아의 발화가 구체적 형상을 부여받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는 더 깊어졌고 더 넓어졌다. 시인은 ‘꽃이 피어도 꽃향기가 함께 행방불명’되는, ‘꽃이 피자 근심을 피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불임의 거리’에서, 이 불모의 세상이 사람들(셀러리맨, 퀵 서비스맨, 닭발집 주인남자, 대리운전기사)을 길들이는 ‘허약한 언어’를 넘어, ‘멀리 있’는 ‘밥’을 얻게 할 수 있는 언어(시)를 꿈꾼다. 이러한 시인의 따스한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