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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의 세계사와 유럽중심적 사회이론의 대결
전체론적 방법론과 이 책의 목적 유럽중심주의가 아닌 글로벌리즘 글로벌 경제의 관점 예상되는 저항과 난관의 극복 2. 세계무역의 회전목마, 1400∼1800년 세계경제 입문 세계분업과 무역수지 3. 화폐는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게 한다 세계의 화폐: 그 생산과 교환 승자는 어떻게 그 돈을 썼는가? 4. 글로벌 경제ㅡ비교와 관계 양적 문제: 인구ㆍ생산ㆍ생산성ㆍ소득ㆍ무역 질적 문제: 과학과 기술 메커니즘: 경제적·금융적 제도 5.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 동시성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의 실천 6. 왜 서양은 (일시적으로) 승리했는가? 장기 사이클의 롤러코스터는 존재했는가? 동양의 쇠락은 서양의 발흥에 선행했는가?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글로벌 경제적·인구학적 설명 7. 역사서술의 결론과 이론적 함의 역사서술의 결론: 유럽중심주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이론적 함의: 전체를 비추는 거울을 통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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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이 경쟁에서 어떻게 승리하여ㅡ일시적으로ㅡ발흥할 수 있었을까? 이 책 서장에서 나는 지금까지 수용되어 온 다수의 학설과 해답을 평가했다. 그것들은 이런저런 유럽예외주의, 좀더 크게 보자면 서양예외주의적 주장을 많건 적건 예외 없이 담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든 베버주의든 이 모든 이론은 본질적으로 유럽중심주의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했다. J. M. 블로트는 <식민지 건설자의 세계 모델: 지리적 확산과 유럽중심적 역사>(Blaut 1993a)에서 10여 가지 학설과 그 결함을 꼼꼼히 분석한다. 나도 이 책 1장에서는 이런 유럽중심주의의 신화를 폭로한 구디·사이드·버날·아민·호지슨·티베부·루이스와 와이겐의 작업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들이 역점을 둔 것은 표면에 드러나거나 배후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는 브로델과 월러스틴이 대안으로 제시한 '근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세계-체제'론도 비판했다(Frank 1994, 1995). 물론 나와 길스(Frank and Gills 1993)가 1500년 이전까지의 세계역사를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전에 내가 주장했던 내용도 비판을 면할 수는 없었다.
이 책은 역사적/실증적 차원에서도 1400~1800년ㅡ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ㅡ의 현실 세계사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어 온 이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중심적인 역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른바 '고전적' 사회이론, 심지어는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론조차 유럽의 우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1800년까지만 해도 세계경제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한다손 치더라도 그 중심이 유럽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유럽에서 탄생했다는(또 유럽에서 길러냈다는)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정의할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하물며 유럽 또는 서양이 '자본주의 발전'을 촉발시키고 탄생시키고 전파시키고 확산시키고 영속화시켰다는 주장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버날이 이미 강조한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은 극한으로 뻗은 유럽중심적 상상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마저도 뒤늦게 19세기 이후에야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문은 '자본주의적 저발전[의 발전]'이 과연 그 전부터 이미 존재했는가 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경우 저발전의 발전이라는 논리(Frank 1966, 1967)는 여전히 타당할 수 있으며,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아프리카 지역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인도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에야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Frank 1975, 1978a). 그러나 현실역사를 냉정히 돌아볼 때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쇠락 원인을 과연 어디까지 '자본주의'의 탓으로 볼 수 있는지, 유럽에 '압도'당한 결과로 볼 수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경제가 압도적으로 아시아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은 수세기 동안 아시아에 어떻게든 빌붙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유럽의 항해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해에 나선 것도 아시아로 가는 황금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유럽(세계가 아니라!)의 선구자들이 아시아 항로를 발견하고 나서도 다른 유럽인들은 수세기 동안 고생한 끝에 겨우 뒤늦게, 아주 느리게 아시아 경제열차의 말석에 올라탈 수 있었다. 유럽은 19세기에 들어서야 이 열차의 기관차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pp. 433~435 |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프랑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고 배우고 있는 세계사는 1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에 의해 쓰였으며,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 사회과학이라는 것 역시 단순히 유럽중심적 발명으로서 새롭게 탄생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유럽적인 역사가와 사회이론가들이 유럽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발명한 이데올로기가 유럽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날까지 유럽 또는 서양의 패권을 재생산하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버팀목 역할을 해 왔을 뿐 아니라 식민지배를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이 유럽중심주의의 뿌리를 찾아 나선 프랑크는 근대 유럽을 대표하는 사회과학자들의 시각 속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유럽의 내재적 특징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는 다른 예외적인 유럽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확신한다.
마르크스는 유럽만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맹아를 갖고 있었고,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대표되는 아시아는 정체성이 고착화되었으므로 여기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유럽으로부터 진보의 수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주의의 피와 살이라고 하면서 유럽 이외 지역의 종교는 모두 신화적이고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한마디로 반(反)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말에 따르면 합리적 정신이라는 효모를 가진 '서양'은 발흥했고, 그것을 결여한 '나머지 세계'는 그러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럽의 역사가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시야가 넓다고 할 수 있는 페르낭 브로델 같은 역사가마저도 "중국이 낙후된 것은 이슬람이나 서양보다 덜 발달된 경제구조 때문이었다. 중국의 기업가들은 이익을 내는 데 열성적이지 않았다. 서양 자본가의 정신자세에 비하면 그들은 어설펐다"고 부정확한 서술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크는 자기 자신과 학문적 동지였던 월러스틴에게도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 " 월러스틴과 나 두 사람 모두 근대 '세계'경제/'세계'체제의 구조와 과정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모델화하는 데 주력했다. 월러스틴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그 당시 이 체제의 중심부가 유럽이며 그 중심부가 점점 확대되면서 나머지 세계가 유럽에 기반을 둔 '세계'경제로 통합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월러스틴/프랑크 이론의 한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럽인은 지리학도 발명했다. '유라시아'라는 말 자체가 유럽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의 일개 반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유럽인은 유럽중심적으로 '역사의 진전'을 지도상에 표현해 왔다. 예컨대 메르카토르 도법에서는 조그마한 섬나라 영국이 인도만큼 크게 그려진다. 또 지리학적 사실과는 반대로 유럽 반도를 한사코 대륙으로 격상시키면서, 인구가 훨씬 많은 인도는 겨우 아대륙(亞大陸)이고, 중국은 그저 '나라'(國)라고 한다. 이처럼 뿌리깊은 편견을 분쇄하려면 글로벌한 관점에서 단일한 세계경제체제의 현실을 분석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프랑크의 논지이다. 부분의 합 이상인 전체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유럽이라는 부분을 포함해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한 관점에서 본 아시아 시대의 세계경제 프랑크는 유럽의 세계지배는 1800년 이후 지금까지 길어야 200년 남짓 이어진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근대 유럽의 경제성장은 유럽 스스로 달성한 것도 아니고, 합리성, 제도, 기업가 정신, 기술, 온난한 기후, 한마디로 유럽인이라는 인종의 유럽'예외주의'로 이룩한 것이 결코 아니며, 1800년 이전의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중요하지도 앞서 있지도 않았다. 만약 1800년 이전에 세계경제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한 지역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시아였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중심적' 지위와 역할이 있었고 '여러 중심' 중에도 서열이 있었다면 그 정점에는 중국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유럽은 오래 전부터 아시아의 풍부한 물산과 양질의 상품에 눈독을 들였다. 유럽 국가들이 대양항로 개척에 혈안이 되었던 것도 비단, 면직물, 도자기, 향신료, 차 같은 아시아 상품을 항시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안전한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에 은이 굴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화폐도 부족하고 아시아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변변한 물건도 없어서 아시아 상품을 마음껏 구입하지 못했다. 은은 이런 유럽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유럽은 "신대륙의 은으로 아시아 경제라는 열차에 오르는 승차권을 샀던" 것이다. 유럽은 대(對)아시아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은으로 그 적자를 메웠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은의 태반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은이 없었다면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명함도 못 내밀 신세였다. 영국이 훗날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수출한 것도 딱히 팔아먹을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제품은 아시아 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으므로 식민지가 아닌 곳에서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중국과 인도는 기술력, 생산력, 품질 면에서 유럽을 압도했다. 프랑크에 따르면, 유럽인 특유의 합리성이라는 내재적 특성 덕분에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을 통해 유럽이 산업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한갓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과 인도가 대표하는 아시아의 과학기술 수준은 적어도 1800년까지는 유럽에 뒤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을 능가했다. 1800년을 고비로 상황이 역전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전까지 아시아의 경쟁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풍부한 물산과 수준 높은 농업기술이 있었고 인구가 풍부하다 보니 자연히 노동비용이 저렴했다. 이것은 상품의 경쟁력으로 직결되었다.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아시아에서도 발명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노동절약적인 기계를 개발하는 기술혁신보다는 노동력을 추가 투입하는 쪽이 더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반면에 유럽은 인구가 적었던 데다가 식민지의 확대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어 인구/토지자원 비율이 아시아보다 훨씬 낮았고, 이것은 고임금/고비용 생산구조로 이어졌다. 유럽은 노동절약적 기계를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기계를 발명한 것은 과학자가 아니라 주로 현장 기술자였다. 바로 이들에 의해 산업혁명의 막이 올랐고 유럽은 이때부터 경쟁력의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자들은 이런 글로벌한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 기업가 정신, 기술혁신 등을 모두 유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예외적 현상으로 평가하고 유럽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크는 강력히 비판한다. 유럽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가 유럽을 만들었다"고. 유럽의 발흥은 유럽의 내적 요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시아는 세계사의 대부분 기간 내내 주변에 머물러 있던 유럽이 아시아에 가져다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기술적·문화적 혜택을 유럽에 안겨주었다. 이를 두고 프랑크는 재미있는 비유를 한다. "유럽은 아시아 경제라고 하는 열차의 3등 칸에 달랑 표 한 장을 끊어 올라탔다가 얼마 뒤 객차를 통째로 빌리더니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인을 열차에서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 동양으로―다양성 속의 통일성 동양이 세계경제의 사이클에서 하강국면(1750년 이후)으로 접어들었을 때 서양 각국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면서 수출증대에 주력하여 요즘으로 치면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으로 발돋움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그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프랑크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시아가 금융위기를 겪긴 했지만 중국과 미국의 경제전쟁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