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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공이산(愚公移山) - 권영필
2. 우리 미술사 연구에 대한 하나의 제언(提言) - 김기주 3. 입암이화(立巖二話) - 김동욱 4. 한국 도자사 연구의 오솔길 - 김영원 5. 나의 미술사학, 달콤한 저주 - 노성두 6. '인간 발견의 학(學)'으로서의 미술사학 - 민주식 7. 건축사의 새로운 관점 - 신영훈 8. 늦깍이의 변 - 유준영 9. 미술사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 윤난지 10. 도자, 삶과 문화를 담은 작은 세계 - 윤용이 11. 뒤늦게 시작한 건축사 연구 - 이상해 12. 아름다움과의 만남 - 이원복 13. 이 땅과 삶을 그리워하며 - 이태호 14. 우여곡절의 인연 - 임영주 15.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 - 정병모 16. 삼불(三佛)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 허영환 17. 회상을 통한 미술사의 '이삭 줍기' - 아오키 다카오 18. 문외한의 미술사 - 하마시타 마사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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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시대 채색 필사본 전시에 갔을 때였다. 박사과정 학생들만 스무 명쯤 우르르 몰려갔다. 전시장은 쾰른의 작은 로마네스크 교회를 개조한 쉬니트겐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가 보니 전시 작품은 고작 다섯 점. 그것도 서너 뼘밖에 안되는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어서 머리를 맞대고 보아야 하는게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오전 열시에 입장해서 한 시간쯤 지나자 다들 지쳐 버렸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작품을 들여다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카페테리아로 도망치고 말았다. 전시장에는 결국 가우스교수와 나만 남았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싶었다. 슬쩍 교수님 눈치를 살핀 다음 친구들 수다에 합류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가우스 교수가 나타났다.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를 지목했다.
"노 군!" "네?" "당신은 작품을 다 보았습니까?" 친구들의 시선이 쏠렸다. 다들 돌연한 상황에 긴장했다. "... 네." "그런가요? 나는 십오 년 전에 같은 작품을 보았고,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작품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뒷말을 철사 자르듯이 뚝끊더니 전시장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다들 말없이 주섬주섬 일어나 전시장으로 따라 들어갔다. 나도 주눅이 잔뜩 들어서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날 박사과정 학생 스무 명은 전시를 닫는 오후 다섯시 반까지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전시장에 억류되어야 했다. 점심도 거른 채였다. 오토 시대 미술에 다들 무지했던 터라 뭐가 뭔지 아무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는 작품을 앞에 두고 그저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결국 나는 그날 이후 오토 시대 미술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고 지금도 여전히 완벽하게 무지하다. 그러나 이 일 덕분에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 미술사는 어느 경우든지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 그러나 그 단순한 방법을 실제 실행으로 옮기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교훈이었다. --- pp.78~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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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미술사학자 18인이 걸어온 삶과 학문의 다양한 여정
‘미술사(美術史)’라는 학문이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고, 미술서적 출판이 활기를 띠면서 대중적으로도 꽃피워 가고 있는 지금, 그 주인공인 ‘미술사학자(美術史學者)’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계기로 미술사라는 학문을 택하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미술사학자라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실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미술사라는 학문은 무엇이며, 그 방법론은 어떠한 것인가.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에서 이러한 질문들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서서 대중적인 관심의 영역이 되고 있다. 이 책 『미술사와 나』는, 유준영·신영훈·권영필·이태호·노성두 등 우리 시대 미술사학자 열여덟 명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답으로서 그들이 걸어온 삶과 학문의 다양한 여정을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우리 미술사 연구의 역사는, 오세창(吳世昌)·김용준(金瑢俊)·고유섭(高裕燮) 등에 의해 그 선구적 작업이 비롯되었고, 김재원(金載元)·황수영(黃壽永)·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김원용(金元龍) 등에 의해 연구 토대가 자리를 잡았으며,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이 책의 저자들처럼 박물관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며 성장하거나 해외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학위과정을 마친 이세대 미술사학자들의 연구로 심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국내에 미술사 강좌와 학과가 다수 생겨나고, 미술사 전공자들의 해외 유학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온 이세대 미술사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체험과 통찰의 글을 담은 이 책 『미술사와 나』는 젊은 미술사학도들과 미술사학 지망생들에게는 귀중한 간접체험이 되고, 학계에서는 미술사라는 인문학을 꽃피워 나가기 위한 성찰과 자성 그리고 활발한 논의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미술사와의 만남, 그 우여곡절의 인연 미학·미술사, 회화사, 도자사, 건축사 등 여러 분야에서 각자의 연구활동을 꾸준히 해 온 저자들은 ‘나는 왜 미술사를 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회고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는, 서울대학교 미학과 대학원 시절, 당시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강우방(姜友邦) 선배가 새로 채용할 박물관 직원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며칠을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추천하여 미술사학 연구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우공이산(愚公移山)」, p.11),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학부시절 안휘준(安輝濬) 선생의 ‘한국회화사’ 강의의 발표준비를 하던 중, 김홍도(金弘道)의 〈씨름도〉 가운데 한 구경꾼의 손가락이 뒤바뀌어 그려진 것을 발견해내고, 이후 풍속화를 운명이자 진로로 받아들여 건축공학에서 회화사 쪽으로 전향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 p.229).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집안의 어려움으로 고려대 철학과를 중도포기하고, 독일에서 삼 년간의 고된 광부생활을 거친 후 늦깎이로 쾰른 대학 미술사학과에 들어가 미술사와 인연을 맺었으며(「늦깍이의 변」, p.116), 허영환 전 성신여대 교수는,『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중 김원용(金元龍) 선생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뒤늦게 대만에서의 유학생활을 거쳐 본격적인 미술사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삼불(三佛)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p.246). 모두 뜻밖의 우연적인 요소가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미술사를 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미술사에 대한 애정과 동경이 내재해 있었기에 가능했던 만남이다. 미술사란 무엇이며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어떻게 해서 미술사를 하게 되었는가뿐만 아니라, 각자의 전공 분야에 대한 정의부터 방법론 및 이후의 과제까지 이제껏 연구과정에서 쌓아 온 체험과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언급하고 있다. 권영필 교수는 미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미학·미술사학·역사학의 정립(鼎立) 체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미적 상상력’을, 양식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미술품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보고 있다. 영남대 민주식 교수는, 미술사는 근래에 이르러 미술의 ‘역사체계’를 구성하는 데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마련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며, 그러므로 미술사학의 근본원리, 체계, 해석의 문제, 그리고 미술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설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인간 발견의 학(學)’으로서의 미술사학」, p.86) 이화여대 윤난지 교수는 주체가 살아 있으면서도 다른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설득력있는 ‘글쓰기’가 미술사학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동의의 지평선을 확보하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미술사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p.146) 한옥문화원의 신영훈 원장은 한국건축의 역사를 연구할 때 기법의 발달사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다른 나라에 있는 우리 건축 자료들도 우리 건축의 흐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건축사의 새로운 관점」, p.102) 명지대 윤용이 교수는 도자사(陶瓷史)는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며, 그 당시의 생활사·기술사·교역사·경제사·사회사 등 제반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도자, 삶과 문화를 담은 작은 세계」, p.157)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온 미술사학자들의 체험과 통찰 요즘 이삼십대들에게 인기있는 직종 가운데 하나는 미술관 큐레이터이다. 그러나 삼십 년 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생기지도 않은 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지금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대가 변해 연구 환경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고, 미술사라는 학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도자사를 연구하려면 도요지 현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녀야 하고, 건축사를 연구하려면 국토를 돌아다니면서 실제 건축물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하며, 회화사를 연구하려면 박물관에 있는 실제 작품들을 차근차근 되풀이해서 실견해야 하는 고달픈 작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러 모로 열악했던 시절, 저마다의 인연과 곡절 끝에 미술사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 이 책의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과거 미술사 연구의 체험과 통찰의 글을 통해 후학들에게 미술사의 현실을 거짓 없이 들려 주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는, 결국 열정과 애정이 미술사 연구에 변치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