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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서론 제 1 장 칼빈의 소년기와 청년기 학예학도 | 철학 수업 제 2 장 법률, 문학, 그리고 복음 친구들과 친지들 | 부르줴 대학과 새로운 시작 | 칼빈의 첫 번째 저서 | 부정으로부터의 도피 제 3 장 신학자 칼빈 율법, 신앙 그리고 기도 | 성례 |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 4 장 제네바에서의 시련 16세기의 제네바 | 교회의 권위 | 교회 조직 제 5 장 스트라스부르그의 프랑스인 목사 새 기독교 강요 | 칼빈의 로마서 주석 | 제네바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다 제 6 장 제네바 교회의 개혁 예배하는 교회 | 설교자 칼빈 제 7 장 도전 받는 경건한 사회 가정에서의 칼빈 | 여타의 신약 성경 주석 | 반대가 강해지다 | 권징에 관한 투쟁 제 8 장 패배에서 안정으로 세르베투스의 재판 | 반대 세력이 꺾이다 | 새로운 대학 |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 제 9 장 교회들에 대한 염려 편지 쓰기 명수 칼빈 | 대외적 영향력 제 10 장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는 내게 유익이라 부록1 연대 재추정론 부록2 칼빈의 회심 자료와 참고 도서 목록 색인 |
1480년에 그는, 하나의 대성당과 두 개의 수도원, 4개의 시교구(city parish)가 있는 교회가 지배하는 작은 도시, 노용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서 줄곧 번창했다. 성당 참사회는 그를 성당 공증인(notary)과 프로모터(promoteur)로 교회 법정의 서기 일을 하게 했다. 얼마 후, 그는 이 직책에 더해서 교황의 공증인과 중요 직책의 하나인 주교의 재정 공증인까지 맡게 되었다. 그는 사공이나 통 제조업자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주교와 참사회가 그를 우대했을 뿐 아니라 일 처리가 능숙하다는 명성에 그 지방의 큰 가문들까지 그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1497년, 그는 명실공히 중산층(bourgeois)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분명 그가 40세쯤 되었을 때 노용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던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와 결혼했다. 제라르의 장인은 제라르보다 일 년 후에 중산층(bourgeois)이 되어 시의회 의석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쟝 르 프랑끄(jean Le Franc)가 4 리브르(livres) (보통의 2배 가량)의 세금을, 제라르 꼬벵이 단지 14 수(sous)의 세금을 낸 사실에서, 그 결혼을 통해 꼬벵은 경제적 이점을, 신부는 사회적 승진을 노린 결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살던 집은 1552년 대 화재 때는 무사했으나 1614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 집은 뽀르셀레트(Porcelets) 거리와 과거에는 프로망티에르(Fromentiere) 거리였으나 이제 칼빈 거리가 된 거리 사이의 곡물 시장 자리에 있었다. 노용에 대해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집 한 쪽은 노틀담 성당을 향하고 다른 쪽은 성ㅡ고드베르뜨(Sainte-Godeberte) 교구 교회를 향하였다. 1509년 7월 10일, 둘째 아들 쟝(Jean)이 태어난 후 세례 받은 곳이 바로 이 교회다. 그의 대부(代父)는 성당 참사회 의원 쟝 데 바띠네(Jean Des Vatines)다. - 칼빈의 소년기와 청년기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