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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은 새가 걸어갔다
그, 사이를 지나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새는, 그랬으면 좋겠네 겨울 강을 건너다 밥 그런 봄 소묘(素描), 1975 꽃 피는 봄이 오면 슬그머니 돌아오다 발가락을 옴찔거리는 동안, 어떤 저녁 겨울과 봄 사이 낯익은 밥 냄새 저녁 무렵 후회하는 나 죽지 못하는 이유 낮고 쓸쓸한 저녁 다시, 겨울 쏟아지다 그냥 웃고 가는 봄 제비꽃 생(生) 우기(雨期)의 기록 서정소곡(抒情小曲) II 사과맛 아스피린 푸른 혓바닥 낙화하는 청춘 미완성 삽화 아스피린을 주세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읽지 않을 편지를 쓰는 시간 안녕, 비둘기 모래시계 연애 일지 아름다운 방 흉몽(凶夢) 스캔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의 일그러진 신 팔요일(八曜日) 소멸하는 애인들 사춘기 아다, 아다 시인 딱딱한 혀 물의 노래 詩 톡, 톡, III 문밖에서 저물다 몸, 무늬 든 스며드는 다만, 착한 여자 콤플렉스 홍등을 읽다 문밖에서 저물다 꽃은 주르륵 오지 않을 너 너덜너덜 저, 빗소리 꽃과 함께 춤을 너에게서 전화가 올 무렵 한번 해 볼래? 수취인 불명 나는 조금씩 걸어갔다 그냥, 훌훌 오래 아픈 꽃 아무렇지도 않은 날 꽃자리 놓치다 꽃말 하나를 그림자를 염(殮)하다 [해설]‘엄마의 혀’, 오래도록 아픈 꽃/오홍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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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로 쓴 시는 “욕망의 붉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세상에는 “어린아이의 푸른 가슴”은 사라진 채 “변질된 어른의 꿈”이 “낯선 언어”로 치장되어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들이 모국어의 가면을 쓰고 벌이는 감각의 잔치는 “붉은 언어의 꿈에 붙들린 종신 노예”들을 양산할 뿐이다. 붉은 언어는 푸른 혓바닥의 감각을 “욕망의 붉은, 눈”으로 물들인다. 욕망으로 충혈된 눈은 ‘보이는 대상’을 동일화하는 근대주체의 눈과 유사하다. 모국어의 권위를 앞세운 근대주체의 시선은 모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언어의 외부로 배제한다. 모국어의 내부에서 꿈꾸는 시(감각)의 세계는 따라서 모국어라는 상징적 언어세계의 욕망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모국어로 말을 할수록(시를 쓸수록) 엄마의 혀는 더욱 딱딱해진다. 딱딱한 혀는 사물의 감각을 느낄 수 없다. 부드러운 혀가 느끼는 감각을 딱딱한 혀는 관념적으로만 느낄 수 있다. “욕망의 붉은, 눈”이 감각의 세계를 근대주체의 시선으로 분석(해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근대주체의 시각체제는 보이지 않는 사물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만 표현하는 근대주체의 눈은 그대로 “붉은 언어의 꿈에 붙들린 종신 노예”의 눈과 다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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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혀’, 오래도록 아픈 꽃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은 이시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고통스러운 삶을 감각적으로 승화하는 깊이 있는 시편들 이시하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시집』은 삶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생명의 감각으로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다. 엄마라는 애틋한 존재에게 버림받은 유년의 기억은 적막감을 잉태하는 근본적인 사건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보통 엄마의 세계는 수많은 감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부재하는 엄마의 형상이 적막함과 따뜻함을 중층적으로 표현하는 시적 계기로 작동한다.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애틋한 감정은 시에 등장하는 ‘엄마’ 화자들의 모성성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시인은 엄마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엄마의 마음으로 부재의 흔적을 간직한 존재들의 고통을 위무한다. 엄마를 단순히 모성과 낙원의 상징으로만 바로보고 있지 않다. 엄마의 존재를 통해 여성을 본다. 문명의 사회에서의 여성을 본다. 어머니 아니면 창녀인 폭력적 시선을 그래도 보여준다. 누군가의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예수’처럼 아픈 언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부재한 엄마의 자리를 자신이 스스로 메우며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 밑에는 고통을 감각으로 느끼면서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긍정과 주체의 대상, 살아있는 증거로 삼는 긍정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