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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이휘소를 찾아서
세계로 아인슈타인을 바라보며 절대의 노력, 놀라운 결실 피츠버그대학원 프린스턴 시절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며 페르미랩에서 박정희 대통령께 20년 만에 귀국 아, 나의 조국아 운명과 진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잃어버린 이름 에필로그·역사와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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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적 과학자 이휘소를 찾아서
단군 이래 최대의 천재라고 이르던 인물이며 아인슈타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알려진 사람, 20세기 후반 세계 물리학계를 지배한 학자. 노벨상을 타기 직전 42세 젊은 나이에 의문사를 당해야만 했던 석학. 조국의 부름으로 목숨을 건 행동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실천에 옮겼던 애국자. 끝내 먼 이국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세계 물리학계의 거목. 이 책은 바로 그 이휘소의 기적같은 삶의 기록이다. 1970년 무렵 미국은 중국과 수교를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 이듬해 3월 7사단 2만여명을 철수한다. 한국에는 2사단 1만7천명만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병력철수도 시간문제였다. 미국은 이때부터 베트남전에서도 서서히 손을 떼려 하고 있었다. 국가안보에 위협을 느낀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에게 핵무기 기술확보를 지시한다. 총괄책임자 오원철은 미국 통제를 피하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7개 연구기관에 분산, 극비리 진행한다. 또한 김정렴은 미국을 방문해 첨단과학자들을 KIST로 대거 영입하고, 대전에 대덕연구단지를 대규모로 조성한다. 영입 과학자들을 거론할 때, 세계 물리학계의 큰별 이휘소(미국명 Benjamin W. Lee)가 빠졌을 리 없다. 그는 2차대전중 원자폭탄 제조책임자 오펜하이머가 매우 총애하던 사람이다. 오펜하이머는 그를 아인슈타인·페르미보다 더 뛰어난 과학자로 극찬했다. 이휘소는 길고 방대한 양의 계산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수학적 기교를 가진 학자였다. 소립자물리학계 천재학자 이휘소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는 경기고 2학년 때 대입검정을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입학. 재학중 미국으로 건너가 1956년 마이애미대 물리학과를 수석졸업, 1958년 피츠버그대 석사,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 이학박사를 받고, 28세로 이 대학 정교수가 된다. 이후 뉴욕주립대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 이론물리학교수 겸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연구부장 등을 맡는다. 그는 특히 1960년대 SU(6) 군이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1970년대 쿼크와 참이론으로 명성을 높였으며, 게이지장이론을 다루면서 이 분야에 독보적인 기여를 한다. 1972년 발표된 게이지장이론은 그의 가장 훌륭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살람은 이를 거의 완벽한 이론이라고 극찬한다. 1974년 9월 이휘소는 미 국무부 요청으로 서울대에 AID교육차관 타당성조사차 20년 만에 귀국한다. 이때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 국가안보위협을 상기시키며 그의 귀국을 요청한다. 핵무기개발에 참여하고 싶지 않던 그는 대통령의 제의를 사양하지만, 강대국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국의 신세에 고민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개발 집념 1977년 3월 이휘소는 다시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받는다. 주한미군 1만7천여명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급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이휘소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일기에 담는다.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가정할 때, 내가 조국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원리를 제공한다면,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죽는다! 내가 죽어 조국을 살릴 수 있다.…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소서.” 마침내 이휘소는 친분있는 외과의사를 찾아가 미사일·핵무기 제조원리를 따로 정리·축소해 만든 기밀문서를 내민다. 그의 다리 살 속에 소독된 종이가 넣어졌다. 5월 20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도쿄를 방문, 그날밤 비밀리에 청와대에 도착해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전달한다. 6월 16일, 이휘소는 세미나 참석차 가족과 함께 자가용으로 집을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자 트럭 몇 대가 그의 차에 따라붙었다. 일리노이주에 가까운 케와네시 근처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 유조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와 가족이 탄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차 앞머리가 처참히 부서지고 가족 모두 정신을 잃는다. 가족들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이휘소는 사망하고 만다. 이휘소가 한국에게 미사일 및 핵 제조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후,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한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정부에 ‘인권탄압중지, 긴급조치 즉각해제, 독자적 핵개발추진 즉시중지’ 등을 압박한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자기들은 이미 다 만들어놓고 남의 나라에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라고 반발한다. 이런 한미대립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사일·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78년 8월 26일 한 군사기지에서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이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국의 일부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 핵무기개발은 시간문제였다. 미국은 보다 강력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숨까지 내놓은 이휘소를 생각하면 박 대통령은 더더욱 멈출 수 없었다. 박정희정부 핵무기개발 추진 결정적 자료 드러나 2010년 1월 오원철 경제수석이 1972년 9월 8일 작성한 보고서중 일부가 국가기록원 정보공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2급비밀문서로 분류된 이 문서들에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 개발방향’ ‘우라늄탄두와 플루토늄탄두에 대한 장단점 비교’ 등 개괄내용과 함께 ‘우리나라 기술수준에 맞춰 플루토늄탄을 개발한다’는 잠정결론이 담겨져 있다. 이 문서들은 박정희정부 당시 핵무기개발이 추진됐다는 결정적 근거자료이다. 그러나 오원철 전 수석은 당시 연구진들이 작성한 핵무기 기술개발 관련 핵심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현재 국가기록원에도 남아있지 않아 실종상태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중이던 핵무기 관련 보안문서 봉투가 외부로 유출됐다는 것이다. 담당자였던 오원철 전 수석은 이 문서를 봉인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넘겼고, 이것은 나중에 전두환 신군부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