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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제1장│ 원시사회부터 전국시대까지 1. 악무 2. 악기 3. 종고지악 제2장│ 진·한부터 남북조시대까지 1. 악무백희 2. 고취 3. 우·슬의 음악 및 기타 4. 북조 석굴 기악伎樂 제3장│ 수·당·오대 시대 1. 악무와 의장악대 2. 설창용說唱俑과 희롱용戱弄俑 3. 중·일 음악문화의 교류 제4장│ 송·원 시대 1. 도시와 지방의 음악 활동과 산악散樂 2. 사곡음악 3. 잡극과 남희 4. 기악 제5장│ 명·청 시대 1. 민요·소곡 및 설창 2. 민간 가무와 풍속 음악 3. 전기傳奇와 경극 및 지방 희극 4. 기악 5. 궁정음악 6. 기보법 7. 주재육의 『악률전서』 8. 중외 음악 문화의 교류 결어 책을 마무리하며 수정판 후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용어 찾아보기 그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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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예술연구원 음악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중국음악사의 성과를 『중국음악사도감中國音樂史圖鑑』이라는 책자로 독자 여러분 앞에 출간하게 되었는데 이는 최근까지의 중국 음악사학의 연구 영역에서 이루어낸 최고의 업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중국의 여러 민족들이 공동으로 이룩해 낸 음악문화는 그 역사가 유구하며 전해져 내려온 사료도 매우 풍부한데 이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문자기록으로서 음악문헌 및 당대唐代 이후의 각종 악보이며, 둘째는 유물자료로서 지상에 보존된 것과 지하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며, 셋째는 현장조사 자료로서 고대 악곡이 남아 있거나 전래된 여러 가지 소리들이다. 본서는 이들 사료 중 유물자료를 중심으로 편찬되었으며, 그 외 두 가지 자료는 보조 자료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들 유물자료와 문자기록 및 현장조사 자료가 상호 보완적이면서 상호 인증의 자료로 사용되어 중국음악사의 발전 과정이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책자에 펼쳐지게 되었다. 고대 문헌자료는 그 기록이 면밀하지 못하거나 착오가 있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유물자료와 현장조사 자료로 내용을 보충하거나 착오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신석기시대에는 문자가 없으나 신석기 중기에 ‘도자기로 제작된 지공이 1개인 훈塤’을 발굴하였으며, 이 훈은 단3도 음정을 연주할 수 있다. 상商 시대의 문헌은 많지 않은데, 상나라 후기에 지공이 5개인 훈으로는 연속적으로 8개의 반음半音을 연주할 수 있다. 춘추 전국시대의 악률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호북 수현隨縣에서 출토된 증후을묘曾候乙墓 편종 64개는 이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당시 중국 악률학이 이미 체계화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진秦나라는 음악기관인 ‘악부樂府’를 설립하였지만 이에 대한 사서기록은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서안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종에 ‘악부樂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악을 담당하는 기관이 존재했음을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한나라 초기에 악부를 설립하였지만 그 규모가 작았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한 무제가 “악부를 세워서 시詩를 채집하고 불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세웠다立’는 것은 이미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부의 악가樂歌는 크게 ‘고취악鼓吹樂’과 ‘상화가相和歌’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제사·의장·군대 및 궁중의례에 사용되었으며, 후자는 민간에서 유행된 ‘거리의 노래’였다. 악부의 기록에 ‘고원鼓員’ ‘취고원吹鼓員’ 등이 나오는데 이는 대개 전문 고취곡을 연주하는 사람일 것이다. 산동山東 비성肥城 효당산孝堂山의 한漢나라 화상석畵像石과 성도成都에서 출토된 한나라 화상석 등에도 기마악대의 그림[騎吹圖]이 있다. 악부에는 가영歌횩의 ‘고수’가 있다. 기록에 의거하면, ‘고수’는 박자를 전문적으로 치는 사람이다. 한나라 화상석 악대 중에는 어떤 사람은 박(拍)을 치고, 어떤 사람은 손을 내려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있다. 이는 모두 ‘고수’이다. 제남濟南 무영산無影山에서 출토된 백희용百戱俑에서 반주악대 위에 7명이 손을 내려놓고 서 있는 모습이 있는데 이들도 ‘고수’이다. 그 외, 한나라의 ‘칠반무七盤舞’, ‘어룡만연魚龍曼衍’, ‘상인象人’, ‘백희百戱’ 등을 한漢 대 화상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생동감 있는 연희 장면과 악무배치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치는 당시 화가가 안배를 했겠지만, 이는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 이후의 유물 자료는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는데, 위진남북조시대는 민족의 이동이 빈번히 이루어졌고 당시 하서지역(현 감숙 황하 서쪽)의 사회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였기 때문에 중원에 살던 사람들은 부단히 하서지역과 신강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신강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사람들도 하서지역과 중원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이동은 각 민족들의 잡기, 음악문화의 교류를 초래하였다. 감숙甘肅 가욕관嘉탐關 위진魏晋 무덤의 벽돌 그림에 악무도樂舞圖가 있는데, 연행演行된 것은 선비족과 흉노족의 악무이다. 신강新疆 배성拜城의 키질克孜爾 석굴 벽화에는 서진과 동진 및 남북조시대에 중국과 외국의 악무가 교류되고 융합되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 유물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사용된 악기는 피리와 유사한 현지 악기도 있고, 비파와 같은 외래악기도 있으며, 생笙·소簫(또는 排簫)·완함阮咸 등과 같은 중원 악기도 있다. 감숙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과 산서 대동의 운강雲崗석굴 등 지역의 불교벽화에도 남북조시대의 악무도가 남아 있다. 당나라의 악무는 돈황 벽화에도 반영되어 있다. 당나라와 이웃나라 사이에는 광범위한 음악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에는 당시 전래된 악기·악보 및 무용에 사용된 의복 및 무구 등이 있다. 송宋·원元 대 이후에는 중국 내륙의 민간음악과 희곡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즉, 음악은 지속적으로 깊고 넓게 발전되었으며, 다양한 악곡 형식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는 희곡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예를 들면, 송나라 시대에 유행된 몇 개의 소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인 ‘창잠唱?’은 ‘전령纏令’과 ‘전달纏達’로 구분되며, 이는 ‘제궁조諸宮調’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림광기事林廣記 중의 창잠도唱?圖는 창잠을 연주하는 형식과 반주악기를 보여주고 있다. 산서 홍동현洪洞縣 명응왕전明應王殿의 원元 잡극 벽화에는 연주자와 반주자의 연주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원 잡극 연주가 성숙 단계로 발전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금金·원元시대 잡극무대에서 악대의 위치는 초기에는 무대 앞에서 연주하다가, 후기에는 무대 뒤의 출입구 문 사이에 한 줄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 희곡의 영향을 받은 일본 ‘가부키歌舞伎’는 오늘날 연주시에 이러한 구성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19세기 일본의 화교華僑 연희 중의 악대는 무대의 출입구 사이에 앉아 있다. 이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1889년에 출판한 명청악지간明淸樂之刊 중의 ‘당인약지도唐人躍之圖’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모두 음악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중요한 유물 가운데 500여 점을 선별하여 여러 차례의 감정을 거치고 난 뒤 이를 책자에 실었는바, 독자들이 책을 펼치면 일목요연하게 중국 고대음악의 역사적 발전과 어떠한 법칙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뚜렷하고 깊은 인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진귀한 유물의 감상은 독자를 무한한 미적 체험의 장으로 끌어 줄 것이다. 인파루陰法魯 1988년 2월 4일 북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