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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기에프, 차이코프스키 발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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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그 극적인 전환점
서구의 오페라 극장에서가 아니라, 음반에서 거의 모든 연주자들을 접하게 되는 우리들에게 게르기예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혹자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과 6번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수도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음악에 관심이 깊은 이들이라면 로테르담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1990년대 이후의 일들이고,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에서 첫 걸음을 내디뎠던 당시의 모습은 이 음반에 담겨있는 작품들로 처음 소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교롭게도 여기에 소개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작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은 후일 필립스에서 같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전곡 녹음을 마친 바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비록, 모음곡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모습과 비교해서 들어볼 수 있는 즐거움을 더해주기도 하는데, 시간과 경험에 의해 다분히 세련되어진 지금에 비해 조금은 더 거친 모습에서 오히려 더 러시아적이고, 또 더 게르기예프적인 감각적 해석의 전형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35살이라는 젊은 나이는 한낱 숫자에 불과할 뿐, 게르기예프 해석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스케일, 과감한 셈여림의 대비, 지극히 자의적인 그러나, 너무나 감각적인 리듬 처리와 같은 큰 줄기들은 이미 자랄 만큼 자라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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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자, 게르기예프
1953년 모스크바 출생이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은 코카서스 지방의 블라디카프카즈에서 보냈고, 여기에서 최초의 전문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1961년에 입학했던 음악 학교는 이제 그의 이름을 따서 발레리 게르기예프 음악 아카데미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더욱 단련된 그의 재능은 1976년부터 드디어 열매를 맺기 시작했는데, 소비에트 연방 지휘자상을 받는가하면, 1977년에는 베를린에서 열린 카라얀 지휘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이렇게 화려한 수상 경력은 곧바로 테미르카노프가 맡고 있던 마린스키 극장의 부지휘자라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이듬해인 1978년에는 프로코피에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로 마린스키 극장 무대에 데뷔했다.
1981년부터 85년까지 아르메니아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런던 심포니를 통해 서방 무대에 데뷔했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바로 1988년, 테미르카노프의 후임자를 결정하기 위한 단원들의 투표에서 35살의 젊디젊은 지휘자인 게르기예프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나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장래가 걸린 것과도 마찬가지인 투표에서 단원들의 선택은 대단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현명한 선택은 이제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다. 게르기예프로 인해 그들 또한 세계 최고 관현악단의 일원이 되었으니 말이다. 게르기예프와 함께한 마린스키의 1990년대는 러시아의 유럽 정복사와도 같다. 1989년 홀스타인 페스티벌에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독일 바이에른 극장에서의 '보리스 고두노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의 '전쟁과 평화' 프로덕션을 선보임으로서 러시아 오페라의 맹주임을 온 천하에 알렸으며, 이 명성은 코벤트 가든에서의 '에프게니 오네긴'(1992),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오텔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괄목할만한 행보는 게르기예프의 주가를 높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노래했던 갈리나 고르차코바, 올가 보로디나와 같은 가수들에게도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마린스키 극장과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영광마저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2년부터 시작한 '백야의 스타들(Stars of White Night)'이라는 음악 축제는 이 북방의 베니스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의 물결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는데, 연간 180만 명(1998년 기준)에 달하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6월말부터 8월말까지 이어지는 여름 한 철의 백야 기간에 집중된다고 한다. 1993년에는 '키로프의 친구들'이라는 후원 모임을 런던에서 발족시키기도 했는데, 이 모임의 초대 회장은 플라치도 도밍고에게로 돌아갔다. 1995년에는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자리를 맡았고, 1996년에는 마린스키 발레 극장의 음악 감독직까지 아우르게 되어 페테르부르크와 마린스키 극장의 명실상부한 제왕이 되었고, 힘차게 휘두르는 그의 지휘봉에는 러시아 음악의 자존심만큼의 무게가 더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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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부활
러시아 제2의 수도로 일컬어지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올해로 도시 건립 300주년을 맞이한다. 한 없이 펼쳐져있던 불모의 늪지대를 새로운 빛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것은 표트르 대제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신도시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정신에 가장 음울하고 날카로운 영향을 미치는 도시'라고 표현한 바 있고, 푸쉬킨은 '북방의 베니스'라고 칭송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페테르부르크가 춥고 척박한 땅 러시아의 '서구로 향한 창'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온 문화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로마노프 왕조 전성기의 화려함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는 에미르타주 박물관이 버티고 있고, 서양 음악과 발레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여러 번 맡았던 마린스키 극장* 역시 또 하나의 문화 중심이다.
그러나 이렇듯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린스키 극장 또한 돈이 없이는 제 빛을 내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공공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정부 지원금에만 의지하고 있던 연주단체들의 존립 기반은 완전히 흔들리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플레트네프는 신분 보장에 위협을 느껴 기존의 악단을 떠나는 연주자들을 다시 모아 RNO(Russia National Orchestra)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기까지 했겠는가. 항상 마리우스 프티파의 이름과 함께 등장했던 마린스키 극장과 그 오케스트라의 드높았던 명성 역시 다른 소비에트 연방의 악단과 마찬가지로 점점 잊혀져가는 이름이 되어가는 듯 했다. 마린스키가 이렇게 퇴락의 어두운 길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마치 수퍼맨처럼 홀연히 나타난 발레리 게리기예프라는 젊은 지휘자가 있어, 그로 인해 마린스키와 페테르부르크는 부활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러시아 음악 예술의 자존심까지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가 불러일으킨 이 놀라운 성과로 인해 그는 '러시아 음악 문화의 메시아'라는 자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게르기예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는 이미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일본의 음악 잡지인 'Mostly Classic'의 독자들이 선정한 최고의 지휘자에 1등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벗' 역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이몬 래틀, 정명훈과 함께 차세대 가장 주목할만한 지휘자로 게르기예프를 꼽고 있다. 단지 한 사람의 힘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논리로는 설명할 길이 없을뿐더러 지난 음악사를 훑어보더라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한 가지 예로 카라얀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사후, 베를린 필하모닉의 빈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다각도의 공작을 펼쳤고, 기어코 그 자리를 따낸 카라얀은 급여 수준을 현격하게 올려주겠다는 단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 많은 녹음을 계속했는데, 이는 음반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르트벵글러가 더 오래 살았거나, 첼리비다케가 카라얀의 자리에 앉았더라면, 음반에서는 거의 베를린 필하모닉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CD의 포맷 역시 지금과 다르게 결정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