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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부 제2부 제3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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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겪은 일들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침묵에 지쳤어. 하지만 네가 이 자리에 없으니 펜을 든다. 이야기를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모든 이야기를 잘 전할 수 있을지, 다른 편지처럼 네게 이 편지를 보내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밤 나는 외친다. 테오! 나 여기 있어! 나는 네 형이야, 영원히. 네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너에게 다가가고 싶다. --- p.16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계속 나아가리라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지쳤다면 이미 먼 길을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이 세상과 맞서야 하는 자신만의 싸움이 있다면, 또 피곤하거나 머리가 터질 것 같다면, 바로 그것은 분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눈을 들어 그물을 던지듯 네 자신을 세상의 바다에 던져라. 늘어진 두 손을 다잡고 일해라. 그 손으로 너에게 보이는 것들을 그려라. --- p.137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그 사실을 반대하지 않으신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과연 우리 중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스쳐가는 것 외에 다른 무언가도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의미가 없다면, 왜 이 모든 아름다움이, 왜 이 모든 고통이, 심지어 나에게는 왜 주먹을 부르쥐게 하고 이를 갈게 만드는 증오가 있는 걸까. --- p.266 딱따구리는 부리로 나무껍질을 파낸다. 송곳 같은 부리로 맹렬하게 나무를 쪼아댄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벌레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내 말은, 목적 없어 보이는 일도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거야. 사람이 자신의 직감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애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어쨌든 이 편지를 쓰는 데도 어떤 목적이 있다고 느껴진다. 풀숲에서 벌레를 찾듯 이 모든 말들을 한 뒤에 찾게 될 무언가가 있을 거야. --- p.266 우리가 이 세상을 붙잡으면 안 된다는 말이, 사랑하는 이들을 붙잡으면 안 된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여러분, 인정하세요!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세상을 붙잡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이곳을,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들을 붙잡고 싶어요. 여러분, 우리는 살아 있어요. 우리는 살아 있고, 그건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며, 아직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다음 세상을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다음 세상은 지금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게 맞아요. 그래요, 우리 모두가 그렇죠. 하지만 나는 가는 길의 걸음걸음마다 집중하고 있습니다. --- p.290 무엇이 너를 가로막고, 가두고, 묻어버리는지 늘 분명히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너는 알 수 없는 철창이나 문과 벽이 있음을 느끼고 있을 거야. 감옥을 없애는 게 뭔지 아니? 진지하고 깊은 애정이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 지고의 힘으로, 강력한 마법으로 감옥을 여는 거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죽음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연민이 다시 살아나는 곳에 생명도 다시 살아난다. 그 감옥은 때로는 편견, 오해,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치명적인 무지, 불신, 뻔뻔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 p.337 만일 네가 나에게서 좋지 않은 나태함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다.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너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 나는 네게 받은 것이 있어. 무슨 일이든 너를 도울 수 있다면, 내가 그랬듯이 너 역시 나를 불러도 좋아. 그렇다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고 신뢰의 표시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는 꽤 멀어졌고 어떤 면에서 관점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어느 날 우리는 서로를 도와줄 수 있겠지. 오늘은 너와 악수를 하고, 네가 나에게 보내준 따스한 마음에 다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 p.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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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놓친 반 고흐의 젊은 날을 문학으로 완성하다
화가의 출발, 알려지지 않은 벨기에 보리나주 시절의 반 고흐 조명 “나는 온 힘을 다해 이 세상을 붙잡고 싶습니다. 나는 다음 세상을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가는 길의 걸음걸음마다 집중하고 있습니다.”(290쪽) “내게 진정한 변화가 있었다면, 그때 이미 생각하고 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지금은 더욱 더 생각하고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이다.”(334쪽) 고흐를 근본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소설 『그림 속으로 사라진 남자』는 목사를 꿈꾸었던 청년 반 고흐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되는 벨기에 보리나주 시절(1878~1880)의 결정적 체험을 그린 소설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흐는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고, 그림은 생전에 단 한 점 팔렸을 뿐이며, 사람들과 늘 불화했고,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또 정신 발작으로 귀를 잘랐다. 고흐의 이런 광기와 비극성은 ‘위대한 천재 화가’라는 신화를 만들며 미화되곤 했는데, 이는 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과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고흐의 깊은 내면과 삶의 모순성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현재 컬럼비아 의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작가 넬리 허먼은 대학원(예술학) 시절, 뛰어난 미술사가 사이먼 샤마의 수업을 통해 고흐의 편지들을 처음 접한다. 감동적이고 솔직하며 통찰력이 뛰어난, 그리고 놀랍도록 숙련된 문장들로 씌어진 그 편지들은 그녀를 사로잡는다. 이후 고흐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이 소설을 쓰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출간 후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고흐가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감을 성취한 작품”(뉴욕 타임스), “고흐를 근본적으로 깊이 이해한다”(커커스 리뷰), “사실성과 미학성을 성취한 소설로 문학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일렉트릭 리터러처), “전기소설의 걸작”(작가 메리 고든). 동생 테오와 절연한 10개월, 고흐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많은 연구들이 고흐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로 꼽는 벨기에 보리나주 시절. 하지만 작가 넬리 허먼은 고흐의 편지를 읽던 중, 평생 동생 테오에게 650통 넘게 편지를 보낸 고흐가 이때만은 편지 한 장 없이 소식을 끊고 지낸 사실을 발견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흐의 전기들을 찾아보았지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작가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 미술사적 고증과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 시간들을 조명한다. 소설은 고흐가 실제로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즉, 프롤로그는 1879년 8월 14일의 편지이며, 에필로그는 1880년 6월 22일 편지이다. 이것은 둘 사이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침묵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소설의 본문은 동생과 절연하고 지낸 이 10개월 동안 고흐가 보내지 못한 편지를 썼으리라 가정하고 작가가 모두 재현해낸 것이다. 마치 고흐가 직접 쓴 것처럼 그의 감정과 생각, 문체가 생생하다. 놀라운 사실성을 지닌 이 소설에서 고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삶의 문제와 고민을 들고 우리 앞에 다가온다. 시점과 시제를 넘나드는 경이로운 스토리텔링 넬리 허먼은 고흐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각색하지도 않으며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도 가하지 않는다. 고흐는 줄곧 혼자였다는 분명한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고흐의 성장기에서 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일화들을 끌어와 이야기를 풍성하게 전개한다. 소설은 1인칭 서간문 형식과 함께 3인칭 작가 관찰자 시점이 교차한다. 또한 과거형과 현재형을 넘나드는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고흐의 행동과 그 동기가 되는 기억들, 의식과 무의식이 맞물리는 경이로운 스토리텔링이 펼쳐진다. 자연과 풍경 묘사는 그림을 문장으로 옮긴 듯 아름답고, 탄광촌(특히 지하 갱도의 체험기) 묘사는 감정과 생각을 압도한다. 작가는 전기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학의 세계에서 빚어낸 경이로운 빛으로 고흐를 비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화법의 소설이다. 관점이나 방식에서 어빙 스톤 등 고흐를 다룬 많은 전기 작가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전도사, 그리고 화가의 길 1879년 보리나주 탄광촌의 전도사였던 고흐는, 자신을 찾아온 동생 테오와 진로문제를 두고 크게 다툰다. 고흐는 이른 나이부터 화상(畵商), 보조 교사, 서점 점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얻은 전도사 자리에서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헌신적인 목회로 광부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과 함께 싸우며, 믿음과 회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열정이 지나쳐 씻지도 먹지도 않는 기행에 가까운 사역을 한 결과, 교회 당국의 오해를 받아 재임명을 받지 못한다. 다시 방황하는 고흐에게 테오는 아픈 말을 쏟아낸다. “형은 인생이 발전하기를 바라지 않아?” “지금 게으름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은 백만 개도 넘어!” 고흐는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던 테오마저 돌아서자 충격을 받고 연락을 끊는다. 그리고 외로운 침묵 속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운명을 바꾼 사건을 겪은 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목표는 다시 흔들리지 않았으며 생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세상의 인정보다는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작가는 고흐의 가족 관계를 통해 그가 지닌 외로움과 고립의 근원을 탐색해나간다. 고흐는 아버지의 인정과 애정에 목말라했고, 동생에게 사랑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부모는 고흐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일자리를 소개해주며 그를 지지하지만 그에게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둔다. 가족에게 그는 언제나 무거운 짐이었고 사랑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고흐뿐 아니라 가족의 심정을 균형 있게 다룬 이 소설은 우리에게 모든 인물들을 포용하고 인생의 복잡함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겪는 갈등을 인간의 보편적인 갈등으로 끌어올리며 ‘이해’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소설은 고흐가 화가가 된 것이 예술가로 성공해 세상의 인정을 받기보다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점을 깨닫게 한다. 말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리다 고흐는 편지에서 자신을 새장 속에 갇힌 새로 비유한다. 주인이 주는 먹이와 안락한 환경에서 빈둥대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은 새와 같다고 했다. 그는 테오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이 게으름뱅이가 아니라고 외친다. 실패도 좌절도 진정한 자기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한다. 편견 없이 자신의 방황을 지켜봐달라고 부탁한다. 이 책의 원제는 ‘이주의 계절’(Season of Migration)이다. 새가 겨울을 나기 위해 멀리 떠나듯이 고흐는 가족의 품을 떠나 척박한 보리나주로 향한다. 새들에게 이주란 생존을 거는 모험이다. 살 곳을 찾아 떠나는 새처럼 고흐 역시 지금 이대로는 견딜 수 없기에 떠나고, 또 떠난다. 그 여정의 목적은 이해다. 고흐는 가족과 탄광촌 사람들, 결국 테오에게도 외면당했지만 그럼에도 이해받고 싶어서 동생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마침내 부치지 못한 편지 묶음을 들고 테오를 찾아간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말’이 지니는 한계를 느낀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말보다 훨씬 더 잘 들려줄 수 있는 무언가를 그릴 것이다.” 이제 ‘광기 어린 천재 화가’라는 박제된 시각에서 조금 벗어나본다. 고흐가 남긴 예술적 유산을 향유하기 전에 왜 그가 화가가 되었는지, 왜 그렇게 방황하고 아파하고 고독했는지 헤아려본다.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사랑하기보다 힘든 일인지 모른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일컬어 ‘고흐가 삶의 중심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했고, 작가 역시 이 소설을 쓰며 삶의 중심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이 소설은 이해받지 못했던 반 고흐를 향한 애정 어린 헌사다. 또한 방황하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