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마지막 아내, 그러나 고종황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여인이 있다. 명성황후의 집안이지만 나라와 함께 몰락한 양반가가 있다. 이야기는 역사에서 나와 한 여인의 삶이 된다. 그림 같은 소설이다. 읽기보다는 가만히 바라봐야 할 것 같은, 그러면 어느 사이, 한 여인의 이야기가 조용조용 들릴 것 같다. 소녀였다가 어머니였다가 마침내 여인이 되는 삶. 그 삶이 품어낸 지나간 시대, 지나간 역사는 족히 고난스러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고즈넉하다. 작가 자신의 삶을,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오래 품어온 힘일 터이다. 소설로 쓰였으나 아마도 실재했을 이야기, 그리고 한 여인.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만히 '하린'이라는 이름을 불러본다. 마치 내 어머니, 그리고 내 어머니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의 이름을 불러보듯.
―김인숙(소설가)여인은 눈이 크고 깊은 데다 속눈썹이 길었다. 코는 오뚝하고 이마는 됫박처럼 둥글었다. 우아한 미인이었다. 여인과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여인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여인이 입술을 다물고 있어도 살짝 나온 앞니를 감출 수 없었듯이, 여인의 차가운 기품 역시 그의 내면을 채운 한과 사랑을 온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여인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향기였다. 샤프란의 後香처럼 은은했다. 여름 기린 夏麟이라는 예쁜 이름의 외로운 여인이 벽장 깊숙이 묻어둔 비밀을 훔쳐보는 은밀한 기쁨은 하린의 딸 은기의 것에 머물지 않고 독자 모두의 것이 될 것이다.
―김민환(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