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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음(得音)
해 뜨는 풍경 서울의 달 숭어 수상한 여자 구토 소풍 하루 작품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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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해남 두륜산 자락, 명지봉 너머 까막골짜기 중턱 언덕바지에 흙집이 한 채 있다. 자칫 흙무더기처럼 보이는 흙집은 폭삭 삭은 채로 꺼져들어 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그 흙집에 평생 소리공부로 늙은 한 여인이 살고 있다. 잘 빗어 넘긴 쪽진 머리에 무명저고리와 남청색 치마를 입고 북통을 두드리며 청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참빗으로 쓸어내린 듯 정갈하고 도깨비불이라도 매단 듯 활달한 그 소리에는 오랜 독공의 진기가 서려있다. 소리에도 정절이 있다고 배웠던 여인은 제 몸 간수하듯 올곧게 소리를 지켜왔다. 여인은 소나무 널빤지로 짜인 흙집의 마루에 앉아 시린 겨울이 몇 번 지나는 지도 잊고 그렇게 한 세월 소리공부로 늙어났던 것이다. 흙집에 소리꾼 일행이 찾아든 것은 산벚이 한창 피어오르던 봄날 해거름이었다. 짐꾼인 듯 지게를 걸머멘 사내가 먼저 들어서고, 뒤이어 불에 그슬린 탱자나무 지팡이를 짚은 늙은 사내와 북통을 멜빵걸이 한 열예닐곱 앳된 처녀가 들어섰다. 짐꾼은 우북하게 자란 마당의 풀을 작대기로 휘-휘- 저어 길을 내더니 어깨에 걸고 있던 지게의 짐들을 토방에 부렸다. 겉보리 한 섬과 짠지 한 독, 누비이불 한 채였다. “소리에 고름이 배이기에는 딱 그만이시.” 흙집이 맘에 들었는지 노인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여러 해 사람 손이 타지 않은 흙집은 빗물과 바람에 여기저기 씻겨나간 채 --- 「득음(得音)」 중에서
극장 수위와 청소부 여자가 매표소 앞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앉은 채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린다. 궁상맞은 입성에 표정까지 일그러진 두 사람은 참말로 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같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놈을 쳐다보는 두 사람의 손에서 종이컵이 구겨진다. 분위기로 봐서는 깔고 앉은 종이박스라도 구겨버릴 기세다. 커피에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다는 말은 참말인가 보다. 한눈에 보기에도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놈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다. 제발 그래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한 달 동안 마실 커피를 한꺼번에 털어 넣고 미친 듯이 놈을 물어 뜯어버렸으면 좋겠다.놈을 외면한 채 얼른 지나쳐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자전거 페달에 바짝 힘을 준다. 엉덩이까지 들어서 힘껏 눌러 밟은 페달이 철거덕 소리를 내며 헛돌고 만다. 발에 힘이 너무 들어갔나, 그만 체인이 벗겨지고 만다. 이놈의 자전거는 중요한순간에 꼭 말썽을 부린다. 젠장, 오늘도 초장부터 꼬여든다. 나에게 언제 재수 좋은 날이 있었던가? 되는 일 없이 얽히고 꼬이는 것은 내 지나온 삶이자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다. 쉽게 말하자면 사는 게 만날 그 모양 그 꼴이란 얘기다. --- 「해 뜨는 풍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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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현의 소설에서는 어떠한 문제의식이 서사적으로 탐구되고 있는가.
「구토」에 등장하고 있는 ‘나’는 지방 일간지의 기자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나, 속물적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점차 삶에 대한 활력을 잃어가고 있고, 극도의 삶의 무기력증에 빠진 ‘나’는 사회과학서적 동향을 취재하던 중 사회과학도서들 사이에 꽂혀 있는 ‘인어 여인숙’이란 시집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개장수의 이력을 가진 시인이 쓴 시집의 주요 배경이었던 “구도(狗島)”를 찾아 나선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나’의 모습은 지금, 이곳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병리적 증후에 대한 일종의 임상보고서와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활력을 빼앗긴 채 무력감에 빠져 있는 존재를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작가가 견뎌야 할 서사적 윤리이다. 「하루」, 「서울의 달」, 「해 뜨는 풍경」의 젊은이들이 곤혹스럽게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만 가혹스러운 게 아니라 이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엄습해오는 삶의 끔찍함이다. 전문대 졸업 후 칠 년째 백수 노릇을 하고 있는 창식(「하루」),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성공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서울의 강퍅한 현실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서울의 달」), 신문 배달부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억척스레 삶을 살고자 버둥거려보지만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벽에 부딪치고 있는 ‘나’(「해 뜨는 풍경」)의 모습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비관적 자화상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삶의 무력감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숭어」, 「득음」, 「소풍」은 억척스레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숭고성을 성찰하도록 하고, 냉철한 자기인식과 현실인식에 바탕을 두면서 악무한의 현실을 맞장뜨고 있다. 이들 세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작중인물이 부딪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 「작품해설」 중에서,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