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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남들이 겪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 누구보다 불행하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죽기엔 너무 억울한 일이었으니까.
비록 지금 미려에게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죽음이 쉽고 달콤하다 해도. 난 살 거야. 그럴 것이다. 죽어야 한다면 그건 그녀가 아니다.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한 인간들이다. 미려가 환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살라고 했죠?” 고개를 숙여 환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손이 움찔 물러나려 할 때까지 오래도록 입술을 떼지 않았다. 전해져 오는 체온이 너무나 따뜻했다. “안아주세요. 부탁드려요.”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요.” 미려의 새빨개진 얼굴에 낙담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툭 뜨거운 눈물이 낙루했다. 역시 그랬던 거다. 더럽혀진 여자를 안고 싶지 않았던 거야. 비록 말은 그러했을지라도. “후회도 살아 있어야 하는 거죠. 전…… 지금…… 죽을 만큼 절박해요.” 툭 미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크기만큼 환의 심장에 구멍이 났다. 왜 쓰리고 아플까? 환으로선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그동안 지켜본 미려의 아픔에 동요된 것일까? 미려가 고통을 이겨내려고 보이는 가엾고 처절한 몸부림에 동정이 인 것일까? 아니면 자그맣고 약해 보이는 여자의 처절한 노력에 감탄을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감정에 환은 조금 놀랐다. 언제나 정확하게 모든 것을 구별하고 정의 내리던 환이었기에 알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원해요?” “네.” “원한다고 스스로에게 우기는 것이 아니고?” 환의 말대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려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난 증명이 필요해요.”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까?” “살아 있다는 것…… 여자……라는 것…….” “당신은 살아 있고, 분명한 여자야.” 다시 환이 말했다. “내가 뭐로 보이죠? 윤미려 씨 눈엔?” “은인……. 그리고 세상. 만일 사장님이 절 거부한다면 세상이 절 거부하는 거예요. 맹세할 수 있지만, 정말로 불가항력이었어요.” 그것은 거의 통곡 같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소리치던 미려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남자도 믿지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날 더럽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남자들에게 교태를 부렸다고 생각할 거야. 짙은 절망과 자책으로 미려는 움츠러들었다. 죽고 싶다. 그러면 이런 수치를 다시는 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흔들리는 미려의 눈빛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윤미려 씨.” “…….” “미려 씨.” “……네.” “이렇게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당신은…….” 용감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미려가 원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환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원해?” 미려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환을 바라보았다. 환이 어떤 의도로 묻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원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안기는 것을 원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세상이 나를 안아준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요.” “확인하고 싶은 이유는?” “나한텐…… 눈물과 분노로 젖어버려서 화석으로 굳어버린…… 그래서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어요. 그 기억을…… 새로운 기억으로 잊고 싶어요.” 가면처럼 딱딱해진 환의 표정에 시리도록 새하얀 미려의 얼굴에 자조의 미소가 얼핏 서렸다. 역시 무리였나 보다. 말은 불가항력이니 어쩌니 했어도 이 남자도 아까 그 부인과 생각의 밑바탕은 똑같은 것일지도. 역시 안 되는 거였어. 역시……. “아니야.” 미려의 생각을 읽은 환이 미려의 손을 잡았다. “안지 않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이유가 아니라는 말이야.” “…….” “당신은 지금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어. 그걸 알면서도 내가 당신을 안는다면, 그건 내가 당신을 이용하는 게 되는 거야.” “틀렸어요. 당신이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난 지금 증명이 필요하고 기억을 덧씌워줄 상대가 필요한 것이니까.” “당신은, 후회할 거야.” “아뇨, 그런 것은 정상적일 때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환의 눈빛은 그녀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부정을 한다 한들 순수한 여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빼앗긴 건 사실이고, 여자로서 많은 자격을 잃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적어도 그녀 자신에게는. 그래서 절박했다. “내가 원해요. 지금 나한텐 당신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줘요.” 잠시 미려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환은 내내 잡고 있던 미려의 손등에 키스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말아.”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