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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Muller-Schott 다니엘 뮐러-쇼트 첼로용 편곡 협주곡 (CelloReimagined - Bach, Haydn, Mozart)
Daniel Muller-Schott 다니엘 뮐러-쇼트 첼로용 편곡 협주곡 (CelloReimagined - Bach, Haydn,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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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FM '명연주 명음반` 선곡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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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아티스트 소개7

작곡Carl Philipp Emanuel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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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고전파 작곡가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프로이센 황태자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쳄발로 주자로 일했고, 그의 즉위와 함께 베를린의 궁정악단이 되었다. 1768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의 궁정악장으로 재직했다

Carl Philipp Emanuel Bach의 다른 상품

작곡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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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1802년에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훌륭한 곡을 많이 작곡 하였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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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Franz Hay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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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은 1732년 3월 31에 태어나 1809년 5월 31에 사망하였다. 로라우에서 태어나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o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은 1732년 3월 31에 태어나 1809년 5월 31에 사망하였다. 로라우에서 태어나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o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스테파노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모르친백작 집안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하였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후작 집안의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의 악장은 G.베르나였으나 그가 사망한 1766년부터는 하이든이 명실상부한 그곳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에스테르하지후작의 집에서는 하이든이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 있어서는 고전파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아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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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Wolfgang Amadeus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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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불리는 작곡가. 세 살에 건반을 익히고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신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의 삶은 영광의 순간만큼이나 깊은 좌절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부임한 대주교와의 갈등 속에서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하던 청년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과 파리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첫사랑의 배신과, 낯선 도시 파리에서 마주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차가운 세상의 외면뿐이었다. 이 모든 영광과 비극의 순간, 모차르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불리는 작곡가. 세 살에 건반을 익히고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신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의 삶은 영광의 순간만큼이나 깊은 좌절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부임한 대주교와의 갈등 속에서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하던 청년 모차르트는, 일자리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과 파리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첫사랑의 배신과, 낯선 도시 파리에서 마주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차가운 세상의 외면뿐이었다.

이 모든 영광과 비극의 순간, 모차르트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기댈 수 있는 스승이며, 족쇄이기도 했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가장 내밀한 편지를 썼다. 마침내 「이도메네오, 크레타의 왕」의 성공으로 빈에 정착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 등 불멸의 걸작들을 쏟아냈지만, 동시에 평생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1791년, 미완의 「레퀴엠」을 남긴 채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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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Daniel Muller-Sch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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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뮐러-쇼트

첼로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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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Werner Ehr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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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에르하르트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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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L'Arte del Mo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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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테 델 몬도

품목정보

발매일
2017년 11월 28일
시간/무게/크기
크기확인중
제조국
EU
KC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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