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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숏타임
1. 우유 │ 2. 젤리의 추억 │ 3. 이사 │ 4. 밤이 길어서 │ 5. 편지는 따뜻하다 │ 6. 숏타임 │ 7. 긴 밤 Ⅱ. 운명 1. 나비 보라매 │ 2. 눈의 가족 │ 3. 서울대 공대 │ 4. 관상 │ 5. 명작의 조건 │ 6. 윤동식도 아니면서 │ 7. 일련의 사유과정 │ 8. 미묘지상주의 │ 9. 무한 경쟁의 나라에서 │ 10. 당신에게 │ 11. 운명 Ⅲ. 렛미인 1. 넘버 쓰리 │ 2. 오즈의 마법사 │ 3. 교문을 누가 열었지? │ 4. 응답하라 1988 │ 5. 수술실에서 │ 6. 계급투쟁의 전말 │ 7. 호칭의 등급 │ 8. 막잔 │ 9. 렛미인 Ⅳ. 그날 1. 트루먼 쇼 │ 2. 기차는 한 시에 떠나네 │ 3. 금강바라밀경 │ 4. 걱정 말아요 │ 5. 6밀리 인간 │ 6. 오해의 진화 │ 7. 커피 아메리카 │ 8. 말이 고파서 │ 9. 그날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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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 가.”
나는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다. 때와 장소 따위 가리지 않는다. 다만 낯은 상당히 가렸는데 그녀와는 초면이었다. 촌스럽게 나이도 따졌다. 그녀는 나보다 열일곱 살은 많아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제시하는 옵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숏타임 오천 원. 긴 밤 만 오천 원.” 나는 그리 인기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놀 사람은 많았다. 백 프로 무료 놀이상대들이었다. 그때도 무료로 놀다가 귀가 하는 길이었다. 그들과의 놀이가 썩 즐겁지는 않았다. 무료했다. 혼자인 편이 더 나았겠지만 혼자여도 되는 줄, 그때는 몰랐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그땐 흘리고 버리고 탕진해도 좋을 만큼 시간이 넘치고 넘쳤으니까. 그런 줄 알았으니까. “돈 모자라면 깎아줄게. 놀다 가.”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솔깃했다. 나는 불타는 청춘이었고, 이성애자였으며, 싱글이었고, 심지어 동정이었다. 다른 성별의 상대와, 밀폐된 공간에서, 몸에 걸친 의복의 개수를 0에 수렴할 때까지 줄여가면서 놀고 싶은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구치던 시절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좋았다. 그녀만 아니라면. 나는 단호하게 내 의사를 밝혔다. “안 놀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거절을 무시했다. 왜냐고 묻지 않았고, 나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냥 막무가내로 따라왔다. 간헐적으로 놀다 가, 놀다 가, 놀다 가를 반복하면서. ---「숏타임」중에서 “아들이 운동하지?” “아뇨.” “아냐?” “아닙니다. 저, 아들 없습니다.” “아… 자녀가…?” “없습니다.” 다소 피로해 보였던 남자의 얼굴이 뜻밖에도 슬그머니 펴진다. “아깝다. 낳기만 낳았으면 서울대 공대는 공부 안 해도 한 번에 갔을 텐데.” “그래요?” “아직 안 늦었어요. 얼른 낳아. 좋잖아. 서울대 공대 아무 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은 제대로 봤는데, 내가 운명을 저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상대가 너무 떳떳하게 나오니 나는 괜히 미안해진다. 슬슬 자리를 뜨려는데 남자가 막아선다. “저기… 내 말이 그럴듯했으면 복비 쪼로 만원만. 정신을 집중했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나는 얼마간의 돈을 드린다. 복비는 아니고, 공연 관람비로. 남자가 연신 허리를 굽실대더니 새로 나타난 흡연자에게 다가가며 다짜고짜 말한다. “서울대 공대…?” ---「서울대 공대」중에서 나는 갈수록 더 뻘쭘해졌다. 연행돼 온 사람들 중 두어 명 은 안면이 있었는데, 다들 하나 같이 ‘근데 쟤가 왜…?’ 하는 눈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허탕치고 온 형사들은 돌아가며 나를 찝쩍댔다. “근데, 이 새낀 뭐야?” “아, 이 새끼 말입니까? P의 방에서 같이 디비져 자고 있더라고요.” “그래? 이 새끼 뭐지?” 그러면서 꼭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고는 몇 초쯤 살피다가, 별거 아닌 놈이네, 하는 눈으로들 돌아섰다.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데, 그런 꼴을 새로운 형사들이 나타날 때마다 당하자니, 갈수록 욱했다. 20세기 말에 개봉했던 영화 [넘버 쓰리]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다. 송강호가 새롭게 만든 소수정예 신흥조직인 불사파가 별일 못하고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은 그들이 너무 하찮아서 상대를 안 해준다. 그러자 불사파 조직원이 경찰에게 사정한다. “우리를 조직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나도 차라리 그런 심정이었다. ---「넘버 쓰리」중에서 “최우근 씨 되시죠?” 누구지? 아는 목소리 목록을 떠올려서 뒤져본다. 없다. 누 구시죠? 내가 묻자 상대가 경직된 소리를 낸다. “검찰청 특수붑니다. 사기범을 체포했는데, 조사를 하는 와중에 최우근 씨 명의로 된 대포통장이 발견됐습니다….” 어쩌고저쩌고 말이 길다. 내용보다 그 억양에 신경이 간다. 중국 교포 사투리다. 아, 누군지, 왜 걸었는지 알겠다. 그 유명한 보이스피싱이다. 구구하게 이어지는 상대의 말을 끊는다. “그러니까… 검찰에 출두하면 되는 거죠?” 상대가 반색을 한다. “예. 반드시 출두해야 합니다. 긴데 그 전에…” “연변으로 가면 되나요?” “에? 뭐라고요?” “연변 검찰청에 며칠, 몇 시까지 가면 되느냐구.” ---「말이 고파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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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이야기 전개
우리들 삶의 깊숙한 곳의 실체를 바라보다 『숏타임』은 총 4개의 테마로 삶의 다양한 면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1장 숏타임은 이제는 추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담담하게 그날의 일과 대화들을 복기하듯 풀어내었다. 자신이 의도한 바 없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인물과 마주하면서 겪게 된 일들을 무심한 듯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야기의 뒷면에 웅크리고 있는 쓸쓸하면서도 서글프기까지 한 인물들의 현실에 희미한 불빛을 비추듯 비추어주고 있다. 2장 운명은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 살면서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나빠 보이는 듯해도, 그리 나쁜 일만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에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장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를 한 걸음 떨어져 누군가를 눈으로 관찰하듯 읽다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은 깨달음이 가슴을 두드릴 것이다. 3장 렛미인은 80년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그 시절의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들이 저마다 다르듯, 이제껏 우리가 보아왔던 다른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접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관한 작가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4장 그날은 소소한 일상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작가만의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러스함 또한 짙게 묻어 있소 읽다 보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감을 느끼며 배시시 웃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