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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한여름 밤의 꿈 2. 초대받지 않은 손님 3. 이런 남자 없습니다 4. 누구 마음대로? 5. 아! 가방이여 6. 시나브로 7. 믿어요 8. 마음의 소리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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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을 맞아본 일이 있는가?
수록은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그게 바로 나다! 그럴 만큼 그는 지금 충격에 빠져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여자에게 맞은 따귀로 인해 패닉에 빠진 수록은 여자가 토끼처럼 달아나버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 어느새 카페 문을 박차고 달아나버린 여자의 흔적에다 하마터면 ‘야!’라는 고함을 지를 뻔했으나, 임수록이 누군가. 여자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예의바른 페미니스트 아닌가. 급히 ‘야!’라는 고함을 ‘이……’라는 신음으로 바꿨다. 대체 누구지? 생전처음 맞아본 따귀는 제법 아팠다.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왼쪽 뺨이 계속 후끈거렸다. 바짝 마른 여자가 힘도 좋지. 손바닥으로 슬슬 볼을 쓰다듬던 수록은 눈을 반짝 빛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전화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꼬리를 남겨두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자신의 흔적을 흘린 것이다. 검은색 휴대전화를 집어든 수록의 입가가 슬쩍 비틀어졌다. 이건 뭐야, 새로운 접근 방식인가? 그랬다면 적어도 어느 부분만은 확실히 성공이라 할 만했다. ‘내 뺨을 때린 것은 네가 처음이야’는 그야말로 로맨스, 순정만화의 공식 중 하나가 아닌가. 수록이 통화키를 누르자 가장 최근에 통화한 상대의 번호와 이름이 뜨면서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액정에 나타난 상대의 이름이 웃겼다. 네가 공주? 물음표로 끝나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숨죽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 만났어? 어떻든? 괜찮아? 이건 뭐야? 혹시 이건 의도적인 접근인가? 수록은 좀 더 입술을 비틀었다. 요런……. 어디 두고 자. 잡기만 하면……. 뺨을 맞은 것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지요.” 수록의 대답에 상대는 놀란 듯 잠시 침묵했다. 곧이어 희미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누구……세요? 한참을 달려나와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 뒤에야 겨우 뛰는 것을 멈춘 태경은 정신없이 헉헉거렸다. 5년 동안 태경을 분노하게 했던 원수를 갚았다. 카페에서 튀어나오면서 태경은 그리 생각했다. 아직도 이렇게 손바닥이 화끈거릴 정도니 그놈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플 터, 생각할수록 통쾌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외나무다리가 아닌 이름도 고급스런 카페 ― 귀족에서 생각도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뺨 한 대 때린 것으로 끝내야 하는 것이 좀 억울하지만, 뒤늦게라도 갚았으니 그것만이라도 어디란 말인가. 이 자식아, 너 때문이야. 내가 접촉 혐오증에 걸린 것은. 정말이다. 5년 전 그런 일만 없었다면 스킨십에 대해 이렇게 펄쩍 뛰어오르는 병에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5년 전, 그놈을 만난 날은 여름방학 중인 8월 초였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온 세상이 다 익어버릴 것 같이 무더운 날이기도 했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태경조차 무더위에 축 늘어져 헉헉거릴 지경의 폭염이었다. 태경이 거실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 미성이 쇼핑을 갔다가 돌아왔다. 무얼 그렇게 샀는지 쇼핑백을 잔뜩 들고서 말이다. “얜, 웬 낮잠을 이렇게 퍼질러 자? 이태경, 일어나. 자, 너 이거 사다 달랬지?” 엄마가 던지는 쇼핑백을 받으며 태경은 입술만 비죽거렸다. 저 여러 개의 쇼핑백 중에서 내 몫은 이거 하나야? 이것도 사주고 싶어서 사준 것은 아닐 거야. 분명히 엄마 것만 사는 것이 미안해서 딸 것도 샀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 마지못해 사왔을걸? 엄마가 던진 쇼핑백을 들여다본 태경은 브래지어 두 개를 보고 잔뜩 인상을 썼다. 태경은 엄마가 사다준 하얀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순면의 브래지어는 아줌마들이나 하는 디자인이었다. 이건 분명 대형 마트 덤핑 코너에서 오천 원에 파는 물건이 틀림없었다. 엄마, 제발! 내가 입을 속옷, 내 취향대로 사고 싶다고. 태경이 속옷이 낡아서 새로 사야겠다고 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태경은 내일쯤 돈을 타서 저번에 봐둔 속옷 세트를 사려고 시내로 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사온 것이다. “사달라고 해서 사다줬건만 표정이 그게 뭐냐?” “내가 아줌마야? 이런 것을 입게.” “그게 어때서? 그리고 아줌마가 입는 속옷은 따로 있다던?” 엄마 입는 걸 보니 아줌마가 입는 속옷은 따로 있던데? “아무튼, 엄마.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거 말고 레이스 달린 거 입고 싶단 말이야.” “누구에게 보일 일 있어? 속에 입는 옷에 무슨 레이스?” “엄마는 속옷을 누구에게 보이려고 입어? 게다가 이건 B컵이잖아. 엄마는 딸의 가슴 사이즈도 몰라?” “나도 알아. 너 A컵인 거.” “그런데 왜 B컵을 사왔어?” “자존심 상해서.” 그러면서 털어놓은 미성의 이야기를 듣고 태경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속옷을 고르고 있는데 명화 엄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명화 엄마는 미성과도 친구 사이였다. 태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와 명화 엄마를 보면서, 친구란 숙명적인 라이벌로, 딸은 자존심 대립의 한 부분으로 사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와 명화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딸을 성적으로, 키로, 하다못해 누가 더 노래를 잘하냐 하는 것들을 은근히 경계하며 견주었다. 그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진정한 엄친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는 일, 명화로 인해 태경은 일찌감치 인생이 고달프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우리 딸, 이번 시험 올 백이야.’ ‘어머, 좋겠네. 아유, 명화는 똑똑도 하지. 우리 애는 두 개나 틀렸지 뭐야. 국어에서 하나 산수에서 하나. 애가 좀 덤벙대잖아.’ 분명 웃으면서 말했으나 그럴 때의 엄마의 눈에선 레이저처럼 빛이 나왔다. 그 빛은 태경을 향해 쏘아져왔고 그럴 때마다 태경은 다음 시험 때까지 들볶일 생각을 하며 오싹 공포에 떨어야 했다. ‘너 다음 시험에 올백 아니면 알지?’ 뒤이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협박. 그리하여 태경에게 열여덟 해의 시간은 무척이나 힘들고 버거웠다. “명화 이모를 만난 거랑 A컵을 B컵으로 잘못 사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태경은 명화 엄마를 명화 이모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명화는 ‘넌 왜 우리 엄마를 이모로 만들고 그래?’라면서 째려봤다. “명화 엄마가 그러잖니. 너 아직도 A컵이냐고. 명화는 B컵은 작고 C컵은 좀 크다면서 가슴이 좀 큰 것 같아서 고민이라고 하는데 그 앞에서 내가 A컵을 사야겠니? 나도 자존심이 있어. 이것아. 그래서 B컵 사왔다. 아니 공부를 명화보다 못하면 키라도 더 크던지, 그것도 아니면 얼굴이라도 더 예쁘던지. 하다못해 가슴이라도 더 크던지 해야지, 대체 넌 명화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니? 응?” “성격이 좋잖아.” 웃으며 말했지만 태경은 기가 막혔다. 태경은 자신의 가슴에 그다지 큰 불만은 없었다. 이 정도면 봉긋하니 모양도 예쁜데 엄마는 당신이 딸을 이렇게 낳아놓고는 왜 저러시는 건지 원. “내가 네게 우유를 얼마나 먹였는지 알아? 네게 먹인 우유를 다 모으면 태평양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저수지 하나는 채울 거다. 그렇게 먹였는데도 왜 가슴이 아스팔트 위에 껌딱지처럼 납작한 거니, 응?” 세상에. 우유 먹으면 가슴 커진다는 건 또 무슨 소리람. 그럼 이 세상에 가슴 작은 여자는 아무도 없게? 가슴 작으면 우유를 먹으면 되니 말이다. 게다가 이 가슴이 왜 아스팔트 위에 껌딱지냐고. 어우, 어우. 내가 정말 성격이 좋아서 지금 웃고 있다. 이런 경우엔 백이면 백 다 화를 낼 거다. 기가 막혀서. 엄마는 아무래도 명화 이모에게 우정보다는 열등감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그런 거야 인간으로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부로 명화를 이겨야 한다고 잠도 안 재우고 들들 볶아서 날마다 코피를 흘리게 하여 결국 쓰러지게 만든 것을 시초로 해서, 명화보다 키가 작다고 키 크는 체조를 해야 한다고 저녁마다 요가를 2년이나 시켰고, 그래도 명화의 키를 넘어서지 못하자 그다음엔 허리라도 가늘어야 한다며 강제 다이어트를 시키면서 하루에 이천 번씩 훌라후프를 돌리게 한 것들은 정말 고역이었다. “엄마는, 엄마 자존심 때문에 딸 가슴에 맞지도 않은 B컵을 사와?” “오늘부터 B컵 프로젝트에 들어가서 네 가슴을 B컵으로 만들 거야. 그래서 B컵 사온 거야.” 엄마가 벌떡 일어섰다. “자, 오늘부터 이 운동을 시작하는 거야. 이게 가슴 커지는 운동이거든. 우선 손을 이렇게 아래로…….” 앞날이 캄캄하구나. 엄마의 성정으로 봐선 태경의 가슴이 B컵이 안 되면 가슴 커지는 크림은 기본이고 나아가서는 가슴 키우는 수술까지 해준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엄마는 태경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졸업만 해. 내가 코 수술 시켜주고 그 짝짝이 눈 쌍꺼풀 수술도 시켜줄 테니. 그럼 명화보다 예쁠 거야.’ 난 그냥 생긴 대로 살고 싶다고요오. 그리고 평범한, 보통 다른 아이들의 엄마 같은 엄마를 갖고 싶다고요. “어서 따라하지 않고 뭐해?” “됐어, 엄마. 그런다고 커지면 세상엔 가슴 큰 여자만 있게?” “하긴, 그렇겠다. 그럼 어떡하지?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수술할까? D컵으로. 그러면 명화 엄마가 짹소리도 못할 거야.” “엄마, 그러는 거 명화 이모에 대한 열폭이야.” “열폭이 뭐니?” “응……뭐냐면 말이지, 열심히……폭발적인 에너지로 산다는……뭐 그런 뜻이야. 좋은 뜻이야, 좋은 뜻.” 열등감 폭발이라고 제대로 말하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할 수 없어서 재빨리 둘러댄 뒤 태경은 벌떡 일어섰다. “어디가?” “명화네.” “세수나 하고 가. 자던 얼굴로 나가다니 무슨 여자가 그래? 너 명화 반만 닮아라. 명화가 생전 그런 얼굴로 집 바깥에 나오는 거 봤어?” 그렇게 명화가 좋으면 명화 엄마 하시던지요. 게다가 나 아직 여자 아니고 소녀거든요? 바깥은 태양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태경은 마당에 있는 수도를 틀어 쓱쓱 물 세수를 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다시 물로 비벼 빨고는 젖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묶었다. “너무 늦게 있지 말고 와라.” 으, 잔소리. 꼭 저럴 때만 보통 엄마 같지. 슬슬 집을 벗어난 태경은 명화네로 가기 위해 숲길로 접어들었다. 야트막한 작은 동산의 숲을 넘어가는 길은 명화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와사사삭. 바람에 나뭇잎들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우와, 시원해. 태경은 눈을 감고 바람을 맞았다. 무더위에도 숲에선 싱싱한 초록의 향내가 퍼졌다. 눈을 감고 있으면 숲과 동화돼버릴지도 모른다. 태경은 피부와 마음으로 흠뻑 초록의 향기를 빨아들였다. “엄마야.” 무언가가 발에 걸려 휘청 고꾸라진 태경의 눈에 풀 속에 길게 누워 있는 인영이 들어왔다. 태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이야? 누워 있는 사람은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하얀 꽃잎 같은 피부가 햇빛에 녹아버릴 것같이 보이고 완전한 흑색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입술은 또 어떤가. 섬세한 선을 그리고 있는 붉은색이 아주 화려했다. 백설공주처럼 눈처럼 희고 흑단처럼 검고 피처럼 빨간색을 갸름한 얼굴에 전부 갖고 있었다. 세상에! 명화보다 더 예뻐. 순식간에 태경의 안목이 넓어졌다. 태경은 홀린 듯 미인의 날렵한 콧날과 기다란 목에서 차츰 아래로 눈길을 내렸다. 미인은 타는 듯한 놀빛의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태경은 미인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다리를 본 순간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완벽하다. 완벽해.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미인이라는 것이 이렇게 눈을 황홀하게 하는구나.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는 동안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가슴이 콩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 레즈의 피가 흐르나? 잠시 태경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닐 거야. 절대로.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기에 태경은 부정을 하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언제나 자신이 노멀하다고 생각했기에 충격은 너무 컸다. 난 정말 노멀이라고. 그런데 왜 여자의 얼굴을 보는데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리는 거야? 안 돼. 안 돼! 가슴을 부여잡던 태경은 미인 역시 자신만큼이나 가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부분이 이기적인 것 같더니 가슴만 착한 모양이다. 누워 있는 미인의 가슴은 아주 판판했다.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가슴이 작을지도 모르겠다. “A컵 동지…….” 우앗! 이런. 속말이 그만 나와버렸다. 태경은 급히 두 손을 휘저었다. 이건 정말, 정말 실수다. 미인이 알아듣지 않길 바랐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이미 알아들은 모양이다. 미인의 눈이 슬쩍 태경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웃는 걸까? 미인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그것이 죽을 정도로 멋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나 이 미인에게 홀딱 반해버렸나봐. 난 레즈가 아냐. 단지 심미안이 뛰어날 뿐이야. 나는 그냥 예쁜 사람이 좋은 거야. 그래서 친해지고 싶다. 낯선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하나? “안녕.” 눈부터 웃으며 태경은 미인을 향해 인사를 했다. “옆에 누워도 돼요?” 반말을 하려다 아무래도 나이가 더 있어 보여 일단은 존대를 한 태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얼른 누웠다. 빤히 보는 미인의 눈초리에 태경은 이유 없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좀 이상한 아이로 보일라나? 그럴라나? 어쨌든 이렇게 누우니까 세상이 새롭구나. 아,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요. 가슴 뛰어 죽겠네. 빤히 자신을 보는 미인의 눈빛이 너무 강해서 태경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태경이라고 하는데 친구할래요? 아니면 누구네 집에 왔어요?’라고 묻는 게 자연스러울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으나 태경이 한 말은 생각하고 망설인 것이 아닌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머리 좀 넘기지 그래요? 이렇게 예쁜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리는 것은 좀 아깝지 않아요?” 미인의 눈을 긴 앞머리가 내려와 가려진 것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머리칼은 정말 모든 사람이 보게 해야 한다. “아름다움은요, 오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명한 붉은빛. 아니, 핑크빛의 입술. 핑크색이 이렇게 유혹적이고 사랑스러웠더냐? “난 내가 남자였으면 좋겠어. 그럼 뺨 맞을 각오하고 그쪽 입술에 키스를 했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런 입술을 갖고 있어요?” 갑자기 미인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눈앞에 미인의 얼굴이 다가왔다. 꽃무더기가 확 다가온 것 같았다. 어? 쳀거 뭐지? 태경은 너무도 놀라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촉촉하고 부드럽게……부드럽게……부드럽게? 뭐야? 뭐지? 뭐냐고? 꺄악! 놀람의 외침이 나오려는 순간 미인이 싱긋 웃었다. “나는 네가 여자인 게 더 좋아.” 굵은 목소리. 굵은? “왜냐하면 남자하고는 이런 짓 절대 안 하거든.” 다시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이번엔 그냥 물러가지 않았다. 말캉한 뭔가가 태경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거침없이. 그것은 아주 능숙하게 태경의 입 안을 점령했다. 그때까지 태경은 혀가 오가는 키스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키스는 태경에게 첫 키스였던 것이다. 구석구석 그녀의 입 안을 탐하는 남자의 혀는 태경을 충격 속에 빠트렸다. 태경은 너무도 놀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염치도 없지. 어찌 감히 남의 입 안을 제 집처럼 돌아다닌단 말인가. 이런 무단침입의 혀는 깨물어버려도 될 것이다. 혀가 잘린다한들 다 제 잘못이지 그녀의 잘못은 아니니 꽉 물어버리면 될 터인데 태경의 머릿속은 아주 하얀 백지, 그만 그놈의 혀를 깨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경의 눈이 감긴 것은, 읍으로 시작된 소리가 어느 틈에 비음이 살짝 섞인 신음으로 변했을 때였다. “으흑!” 자신이 내는 소리인지도 모를 신음을 흘리던 태경은 가슴을 쥐는 손길을 깨닫고 그제야 남자의 몸을 확 밀어버렸다. 남자는 순순히 물러났고 태경은 벌떡 일어섰다. 태경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이……나쁜 자식 같으니…….” “키스해보고 싶다면서? 그 부탁을 들어준 건데?” 부탁을 들어줘?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말에 분노한 태경은 아주 잠깐 이 남자를 발로 걷어차 줄까, 손톱으로 할퀼까, 아니면 이로 물어뜯을까 심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홱 몸을 돌려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뭔가 몹시 창피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언덕 아래에 내려온 태경은 휙 몸을 돌이켰다. “너 다음에 만나면 죽을 줄 알아.” --- 본문 중에서 |